19화 명색이 정파라는 것들이 (1)
검후를 끝으로 더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의 금분세수식을 참관하지 못하게 된 무림인들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무림맹이 언제부터 이렇게 막무가내가 된 거야?”
“이런 개…….”
성을 내던 몇몇 무림인들이 동시에 입을 닫았다. 왕휼이 살기(殺氣)를 발출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검후에게 당한 망신 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해있는 상태였다.
“누구든 한 번 만 더 입을 놀려보시오. 무림맹이 아닌, 왕휼의 이름으로 입을 다시 열지 못하게 해줄 테니.”
더는 언성을 높이는 자가 없었다.
곳곳이 술렁이며, 불만 섞인 음성으로 소곤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유진산도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었다.
“명색이 정파라는 녀석이 오만과 패기만 가득하구나. 도대체 언제부터 강호가 이렇게 변한 것이냐.”
현희가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그녀 또한 경험이 많지 않았던 무당파의 이대제자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달랐어요?”
“적어도 내가 활동했던 시대의 강호는 협의(俠義)가 가득한 세상이었다.”
“그때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라 상상이 안 돼요. 그런데 이제 어쩌죠?”
유진산은 검후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더니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돌아가자꾸나.”
은퇴식을 구경하겠다고 무림맹을 뚫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현희도 이해한다는 듯 군말 없이 옆으로 나란히 걸었다.
“그래도 할아버지 덕분에 즐거웠어요. 같이 와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유진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그녀의 품에서 곤히 잠든 손녀를 바라보았다.
“우리 설이도 자네가 맘에 드나 보군. 세상 가는 줄도 모르고 자는 걸 보니.”
“그러게요. 금세 잠들었네요.”
“배도 부르고, 날씨도 선선하니 피곤하겠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유진산과 현희는 어느새 무림인들과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둘의 발걸음이 동시에 정지했다. 돌연 등 뒤에서 거센 굉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꽈아아앙-!!!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연달아 몰아치는 소음은 마치 산이 무너져 내리고 천둥이 치는 듯했다.
콰앙-! 콰콰쾅-!!
몰려들었던 무림인들은 몹시 당황하며 웅성거렸다.
“뭐,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폭음의 진원지는 검후의 금분세수식이 거행되고 있을 장소였다.
짐작되기로 그곳에는 정파의 원로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사들이 있을 터였다.
현희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눈빛을 빛냈다.
“아무래도 싸움이 벌어진 것 같아요. 누가 검후에게 도전했을까요?”
유진산은 귀를 쫑긋거리며 소음에 집중했다.
싸움의 여파가 이렇게 먼 곳까지 미치다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격돌하는 음색이 일률적이지가 않는군. 아무래도 정당한 결투 같지는 않아.”
“설마 무림의 원로들이 검후를 포위 공격이라도 한다는 말이에요?”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강호란 곳이 원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세상이지.”
“에이, 할아버지도 참. 그럴 리가 없지…….”
현희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 검후가 사라졌던 길목. 그곳에서 한 줄기 빛살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곧이어 입구를 틀어막은 무림맹의 무사들을 단번에 관통에 버렸다.
콰아앙-!
하나하나가 일류를 넘어서는 무림맹의 고수들이었으나, 그들은 방어조차 하지 못한 채 사방으로 튕겨 날아갔다.
“크윽!”
“컥!”
틈새를 비집고 빠져나온 빛살은 한 마리의 봉황처럼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림인들은 동시에 전율했다.
“……검후?”
한 번의 도약으로 십여 장을 전진한 검후의 경공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녀는 이어서 무림인들의 어깨를 짓밟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깃털 같은 움직임에 모두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검후는 유진산의 코앞을 스쳐 지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유설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 것을. 그리고 창백해진 얼굴을 말이다.
그가 본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더는 움직임을 시야로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검후가 왜 도망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무림인들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검후가 나왔던 그곳에서 기(氣)의 폭풍이 몰아쳐 왔기 때문이다.
“도, 도존?”
도존(刀尊) 진무강. 천룡문의 문주이며, 무림에서 제일가는 도법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무림맹의 소속은 아니었지만, 아들이 검후에게 당해 불구가 된 일로 원한을 품고 있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가문의 대가 끊기게 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후를 뒤쫓는 인물은 도존뿐만이 아니었다.
“독고성이다!”
호북성의 제일 고수인 그는 무림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의 뒤로도 쟁쟁한 인물들이 쏜살같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무림의 십대고수로 거론될 만큼 굉장한 인물들이었다.
검후를 뒤쫓기 시작한 여섯 명의 원로고수들. 그리고 그들의 후미를 애꾸눈의 젊은 여승이 뒷짐을 지고 뒤따르고 있었다.
“설마 저자들이 함께 검후를 협공한 거야?”
“이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검후는 물론 원로고수들까지 시야에서 안 보일 정도로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대결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밀집된 군중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천여 명이 넘는 무림인들이 동시에 경공을 펼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뒤쫓았다.
현희도 재빨리 고개를 돌려 유진산을 바라보았다.
“우리도 따라가요, 할아버지!”
유진산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각적으로 거절했다.
“싸움 구경하러 뛰어다니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아.”
“그래도…….”
“이미 늦었어. 전광석화 같은 자들을 무슨 수로 쫓아가려고?”
검후와 그녀를 뒤쫓던 무림의 원로고수들은 이미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방향을 잃은 무림인들만 무턱대고 뒤쫓을 뿐이었다.
“휴. 어쩔 수 없죠.”
“강호에서는 호기심이 과할수록 명이 짧아지는 법이네. 자네는 젊으니 언제든 기회가 있지 않겠나.”
현희는 어깨가 축 처진 채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무림인들이 죄다 빠져나가서 그런지 마을 곳곳이 휑하기만 했다.
그들은 장터에 들러 옷가지와 생활필수품을 몇 가지 구매한 후 바로 발길을 돌렸다.
목적을 모두 마쳤으니 이제 산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날이 조금씩 어둑해지고 있었다.
백양현을 떠난 후 이름 모를 산을 넘어 지름길로 향하고 있었다.
유진산은 아이를 데리고 산에서 노숙하고 싶지 않았기에 경공 속도를 올렸다.
“좀 더 서두르지. 무당파의 이대제자 중 무공이 제일이었다면서 어찌 그리도 경공이 시원찮은가.”
“치. 할아버지가 빠른 거예요.”
한눈에 보아도 현희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다. 그냥 돌아가는 것이 못내 아쉬운 것이리라.
“아까 보니 검후가 내상을 입은 것 같더군.”
“네? 검후가요?”
역시나 검후 얘기를 꺼내니 그녀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유진산은 그녀의 우상이 검후임을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아까 잠시나마 스쳐볼 수 있었네. 얼굴이 창백하더군.”
“어떡해요……. 혹시 잘못되는 건 아니겠죠?”
현희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는 듯했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여유를 부린다는 것은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걱정할 것 없네.”
“다행이다. 무사했으면 좋겠어요.”
“근데 왜 검후를 응원하지? 무당파 출신이면 무림맹을 응원해야 정상이거늘.”
“그건…….”
현희가 무어라 대꾸할 찰나. 갑자기 유진산이 경공을 멈추며 한 손을 올려 보였다.
“쉿.”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현희도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슨 일이죠?”
“조용히 해봐.”
유진산이 지팡이를 감싼 보자기를 벗겨내자 가보인 화룡신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보자기로 잠든 손녀를 등 뒤에 묶은 후 천천히 전진했다.
마치 늑대가 먹잇감을 탐색하듯 그의 움직임에는 조심성이 가득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허…….”
“이럴 수가. 이게 뭐예요?”
산세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쓰러진 수십 그루의 나무들. 그리고 두 쪽으로 갈라진 바위는 검강이 훑고 지나간 듯 깨끗한 절단면이 드러나 있었다.
인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무림인들을 피해 산길을 택했건만, 재수도 없군.”
“여기서 싸웠나 봐요.”
“느낌이 좋지 않으니 빨리 벗어나는 게 좋겠어.”
둘은 경공 속도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신속히 산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돌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처참한 광경이 계속해서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반각을 이동했을 때였다.
“끄윽.”
누군가의 신음이었다.
유진산과 현희는 동시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야 말았다. 십여 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한 검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를 알아본 현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독고성……?”
그는 땅속에 박아 넣은 검 자루를 이용해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숨이 끊어질 듯 말 듯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모습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더는 전투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자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주변으로 두 명이 더 주저앉아있었는데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몰골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은 현희도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무당파의 태상장로 신분인 금강진인. 사문의 어른이 이곳에 있을 줄 어찌 예상했겠는가. 현희는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초인의 경지에 이른 그의 눈썰미를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너는…… 현희가 아니더냐.”
현희는 화들짝 놀라며 움찔거렸다.
“예?”
“……네가 이대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났기에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리 와 보거라.”
정체가 발각된 현희는 얼떨결에 그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
“검후가 저기 앉아 있으니…… 어서 끝장을 내거라. 움직일 수 없을 테니, 가서 찌르기만 하면 되느니라.”
금강진인이 눈짓으로 신호를 보낸 곳.
느티나무 아래 검후가 가부좌를 튼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매우 가까운 거리였지만, 의식하고 보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기척이 감쪽같았다.
“검, 검후를 왜 죽여요?”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된다. 살아있어서는 안 되는 악인이니, 어서 시키는 대로 하거라.”
분명히 검후 또한 무방비 상태로 보였다. 아무래도 최후의 격돌에서 서로가 극심한 내상을 입고 양패구상한 모양이었다.
“…….”
“어서!”
원하든, 원치 않든 한쪽을 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도 결정될 터.
당황하던 현희는 고개를 돌려 유진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뒷짐을 쥔 채 고개를 가로로 한 번 내저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무림맹이 아니었던가. 그들을 편들 이유가 전혀 없었다.
유진산과 눈빛을 교환한 그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금강진인을 바라보았다.
“장로님.”
“……?”
“왜 저를 알아보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