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7화 (17/238)

17화 흑산도의 여왕벌 (2)

손녀를 지그시 응시하던 유진산은 폭소를 터트렸다.

나무를 움켜쥔 유설이 팔다리를 팔딱이며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재롱을 떨듯이 말이다.

“허허헛. 우리 설이가 할아버지를 즐겁게 해주는구나.”

“히이~.”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보니 신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뭔가가 이상했다. 껄껄 웃던 유진산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그냥 의미 없는 팔딱임인 줄 알았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죽창이 움직이는 경로가 유가창법의 창결(槍訣)을 따르고 있지 않은가.

매일 같이 마루 맡에 앉아 자신의 수련을 지켜본 것만으로 흉내를 내는 것이다.

‘이게 바로 선음지체란 말인가? 이런 재능이라면 훗날 유가장의 창귀가 부활할지도 모르겠구나.’

정말이지 놀라운 자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제 막 창술에 걸음마를 뗀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아직 두 살배기 아기임을 고려한다면 무림사에 전례를 찾아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손녀가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는데 싫어할 할아버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기분이 좋아진 유진산은 뿌듯한 표정으로 손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마루 맡에 앉아 바람을 쐬며 잠시 여유를 즐겼다.

“오래전 양가의 이화창(梨花槍)과 우리 유가의 살풍창(殺風槍)이 천하제일의 창술을 다투던 시대가 있었다. 비록 양가 놈들의 창술이 화려하고 강맹하지만, 무거움 속에 부드러움을 내포한 우리 유가장의 창술을 이길 수는 없었다고 한다.”

유진산도 어렸을 때 조부로부터 전해 들었던 얘기였다. 그리고 그는 손녀에게 다시 가문의 일화를 대물림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양가 놈들이 천하제일의 창술가라는 명예를 쥐고 있구나. 만약 유가살풍창의 비급이 실전되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할아버지가 물려받은 것은 이 화룡신창 한 자루뿐이로구나.”

유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구멍 난 자신의 천 옷에 손가락을 쑤셔 넣으면서 말이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유진산은 인자한 미소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을에 내려가면 옷을 좀 사주마.”

손녀의 옷은 이곳 양주산을 오기 전에 샀던 것들이 전부였다. 성장이 빨랐기에 지금은 몸에 맞는 게 없었으며, 그마저도 곳곳이 찢어지고 헤져 누더기를 걸친 정도에 불과했다.

그때 유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꼬기 옷.”

유진산이 의아한 표정으로 부엌 앞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죽어있는 토끼 한 마리만이 축 늘어진 채로 있었다.

“밥 먹은 지 얼마 안 됐잖아. 토끼는 저녁에 먹을 거야.”

유설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고는 손가락을 다시 가리켰다.

“꼬기 옷!”

유진산은 이해했다는 듯 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토끼가 입은 옷이 탐이 나는 모양이로구나. 오냐, 할아버지가 뺏어주마.”

그는 토끼의 귀를 한 손에 움켜쥐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일각도 지나지 않아 가죽 한 장을 들고 나왔다.

무두질을 해야 하지만 손녀는 기다릴 마음이 없다는 듯 검지를 내뻗으며 재촉했다.

“음, 가만 보자…….”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가죽에 구멍 두 개를 뚫고는 실로 묶어 목에 걸어주었다. 등 뒤로 내려온 털가죽이 마치 피풍의처럼 제법 그럴싸했다.

하지만 피풍의를 두른 아기의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허! 허허허!”

유설도 모처럼 받은 선물에 기분이 좋은 듯 양팔을 벌리고 뛰어다녔다.

“히이~”

짧은 휴식도 잠시. 흐뭇하게 웃던 유진산은 다시 수련을 재개하기 위해 창을 붙잡았다. 머릿속의 종양 때문인지 날이 갈수록 체력이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오래 버티기 위해서는 신체 활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보자꾸나.”

기다렸다는 듯이 유설도 자신의 막대기를 들고 옆에 우뚝 섰다. 할아버지를 흉내 내는 것에 재미를 들인 듯했다.

아이에게 있어서 막대기는 장난감이었고 수련은 곧 놀이였다.

그렇기에 유진산은 딱히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움직임을 천천히 하며 눈에 익히도록 하는 것이 전부였다.

* * *

특별한 일 없이 수련에 매진하며 아홉 날을 보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유진산의 놀라움은 더해져만 갔다. 손녀의 동작이 조금씩 정교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가창법을 모르는 자가 본다면 의미 없는 아기의 팔딱임처럼 보일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손녀의 몸짓은 아무런 위력이 없지만, 유진산은 확신했다. 이러한 수련이 훗날 창귀가 될 수 있도록 폭발적인 잠재력을 불어넣어 줄 것임을.

창결에 몸을 맡긴 그는 유가창법의 묘리에 대해 쉼 없이 떠들어댔다.

지금은 유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지만, 계속 듣게 하여 마음속 깊은 곳에 각인시킬 요량이었다.

“만물 중 가장 부드러운 것은 바람이다. 그 무엇도 바람의 본성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지. 우리 유가창법의 근본은 이 바람결에 있느니라.”

무아지경에 빠져든 유진산은 창무(槍舞)를 펼치고 있었다. 내공을 운용하지 않고 있었기에 강맹함은 없었으나, 오히려 그 모습이 고풍스럽고 아름답기만 했다.

“바람은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기에 유연하며, 그 힘이 한곳으로 모이면 바위를 뚫을 수 있다.”

그가 창을 한 번씩 내지를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뿜어져 나갔다.

그것이 재밌다는 듯 유설은 까르륵거리며 동작을 흉내 냈다.

“재미떠.”

노년에 창술을 연마하는 일은 체력적으로 곤욕이지만, 손녀와 함께하니 마음이 맑아지고 즐거움이 가득했다.

일다경이 지났을 즈음 돌연 유진산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푸욱-!

그는 창을 바닥에 박아넣고 허리를 풀기 시작했다.

“아이고, 할아버지는 삭신이 쑤셔서 좀 쉬어야겠구나.”

옆을 돌아보니 유설도 죽창을 바닥에 꽂고는 양손을 허리춤에 올렸다.

“아고, 삭신 쑤셔.”

유진산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큰 눈을 깜빡거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이런 건 따라 하는 거 아니다, 얘야.”

“알아떠.”

정말 알아들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을 잘 듣는 모습이 기특하기만 했다.

한참 흐뭇한 미소로 몸을 풀고 있을 때였다. 돌연 그의 시선이 십 장 밖의 나무 뒤를 향했다.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공 수련을 하고 계셨나 봅니다, 어르신.”

흑산도의 채주 풍호였다. 총관이 된 현희와 함께 몇 명의 부하를 대동하고 왔다.

“이 나이에 수련은 무슨. 운동이나 하는 거지. 그런데 무슨 일이야?”

단아한 의상을 차려입은 현희가 앞으로 나섰다.

“벌써 잊으신 건 아니죠?”

“글쎄. 요즘 기억이 오락가락해서 말이야.”

“저랑 같이 백양현에 다녀오기로 했잖아요.”

유진산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손녀를 안아 들었다.

“그런 적 없어. 다른 볼일 없으면 어서들 돌아가. 우리 손녀 밥 먹여야 하니까.”

현희의 표정이 순식간에 울상으로 변해버렸다. 여차하면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검후의 은퇴식을 보러 가기로 한 거 정말 기억 안 나세요?”

“그런 기억 없으니, 어서들 돌아가래도.”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채주 풍호를 바라보았다. 마치 어떻게 좀 해달라는 눈빛으로 말이다.

풍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께서 기억이 안 나시는데 어쩔 수 없잖아. 쉬시는 데 방해하지 말고 일단 돌아가자고.”

“……나는 이날만 기다렸다고요.”

그 모습을 무심히 지켜보던 유진산은 잠시 침묵하다가 폭소를 터트렸다.

“허허허. 마을에 내려가면 정체를 숨겨야 하는데, 연습이 필요하지 않은가. 연기 한번 해봤는데 그럴싸한 것 같구만.”

금세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았던 현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다시 토라진 표정으로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어휴. 너무하세요, 정말!”

유진산은 손녀를 안은 채로 껄껄 웃으며 등을 돌렸다.

“잠시 준비하고 나올 테니 저기들 앉아서 좀 기다리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마을을 내려갈 수는 없었다.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제법 신선 같은 풍채가 풍겨 나왔다.

풍호가 그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그렇게 입으시니 한층 젊어 보이십니다. 정말 멋있습니다, 어르신.”

“흠흠. 뭐 소싯적에 그런 말을 많이 듣기는 했지. 그런데 자네도 같이 갈 생각인가?”

“아닙니다. 저는 자리를 비울 상황이 안 돼서, 산 아래까지 마중해 드리려고요.”

“반나절이면 가는 거리야. 먼 길 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마중이 필요해?”

그의 속내를 모를 유진산이 아니었다. 아마도 무당파 출신의 처자 때문이리라.

이웃의 연애사야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그래도.”

“알았으니 어서 가자고. 도착해서 밥이라도 한 끼 사 먹으려면 바로 출발해야 하니.”

* * *

섬서성 백양현은 면적 대비 인구가 적은 지역이다.

그러나 최근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가는 곳마다 무림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천하제일 고수로 명성이 자자한 검후의 은퇴식 때문이었다.

지존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아두고 싶은 것은 모든 무림인의 욕망이었다. 더군다나 강호의 유명인사들이 한 자리에 몰려들 터. 식견을 쌓을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드디어 검후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니…….”

청설문(淸雪門)이라는 작은 문파의 문도였다. 그는 골목 어귀에서 동료와 함께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무공뿐 아니라 미모도 천하제일이래.”

“흐흐.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 형님이 한번 꼬셔 봐?”

“아서라.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골로 가는 수가 있어.”

“우리 둘밖에 없는데 뭐. 근데 그분 과거가 무림맹하고 별로 좋지 않기로 유명했잖아? 괜찮을까?”

“안 괜찮을 거 같으니까 구경하러 온 거잖아. 아마도 이번 은퇴식은 정말 볼 만할 거야. 정파고, 사파고 간에 원한을 산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던데.”

강호에서는 말을 아낄수록 수명이 길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대화에 열중이던 그들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근처로 다가오는 이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흠흠! 잠시 좀 지나가겠네.”

보자기로 감은 큰 지팡이를 쥐고 죽립을 눌러쓴 백발의 노인이었다. 그리고 아기를 업은 여인이 그의 옆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나들이를 나온 가족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때 전각의 벽면에 등을 기댄 청설문의 문도 한 명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할아버지, 이곳은 소호객잔으로 가는 길인데요?”

유진산은 걸음을 잠시 멈추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맞네. 우린 지금 그곳으로 가는 길일세. 밥을 못 먹어서 말이지.”

“거긴 안 가는 게 좋아요. 지금 무림인들로 꽉 찼으니까.”

“흠. 하지만 마을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더군. 무섭지만, 배를 채워야 하는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옆에 있던 청설문의 다른 문도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는 무림맹의 분쟁 금지령이 내려졌으니 해코지는 없을 겁니다. 근데 밥 먹다가 체하셔도 책임은 못 져요.”

“허허. 젊은 친구들이 마음 씀씀이가 참 좋구만. 충고는 고맙네.”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앞장서서 나아갔다.

잠시 후 현희가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의 팔짱을 끼며 살랑거렸다.

“아버님은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

“나는 그저 소면 한 그릇이면 충분하겠구나.”

“에이, 비쌀까 봐 그러는 거죠? 저 돈 많아요. 오늘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채주한테 용돈을 듬뿍 받은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평소에도 식탐이 별로 없었기에 무엇을 먹던 관계가 없었다. 그것보다 그녀의 변화된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껏 그렇게 밝은 성격을 감춰두고, 어찌 도가의 문파에서 지내왔나.”

“그러게 말이에요~. 그동안 제가 왜 무당파에서 눈치를 보며 그 고생을 했는지. 인생을 낭비했어요.”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나 보군.”

“그럼요. 산채에는 원하는 게 다 있어요. 뭐든 다 할 수도 있고요.”

현희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흑산도에서 그녀의 존재는 여왕벌과도 같았으며, 말 한마디는 곧 법이었다.

그녀는 지금 불편함은커녕 산적생활의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하지만 자네 얼굴을 알아보는 도사들과 만난다면 불편하지 않겠나.”

“에이. 그게 어디 쉽나요? 강호가 얼마나 넓은데요.”

“뭐, 틀린 말도 아니지. 도착한 것 같으니 빨리 먹고 나오는 게 좋겠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