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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6화 (16/238)

16화 흑산도의 여왕벌 (1)

특별한 사건 없이 반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 무당파에서 조용했다는 점에서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설마 이간계의 계책이 먹혀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 사건을 잠시 미뤄둬야 할 만큼 그들에게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든가. 현재로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시더.”

유진산은 지금 손녀의 입 앞에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아이는 앵두같이 작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심술이 난 듯 미간을 찡그리면서 말이다.

“당근죽이 얼마나 맛있는데? 어서 한입만 딱 먹어 보아라.”

“설이 당근 시더.”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었다. 아이의 성장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밥을 먹여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잔꾀를 부렸다.

“그래, 그럼 먹지 말거라.”

그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자 유설이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길 반각이 지났을 때 다시 문이 열렸다.

드르륵!

“우리 설이가 좋아하는 고기죽이다!”

유설이는 방긋 웃으며 양손을 휘저었다. 고기라는 말에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꼬기 좋아. 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닫혀 있던 입이 자동으로 열렸다.

“옳지! 잘 먹는구나. 맛있어?”

“냠. 마이떠.”

유진산은 흐뭇한 미소로 신나게 숟가락을 움직였다.

‘버섯이나 고기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다 똑같아지는 법. 세상만사가 모두 마음먹기 나름인 게다.’

단지 당근죽에 버섯 하나를 잘게 썰어 넣었을 뿐이었다.

유설이의 먹성에 사육장의 닭도 몇 마리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음 같아선 매일 육류를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아껴야 했다.

‘버섯이라도 좀 더 따놔야겠군.’

손녀의 식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쨍그랑-!

경계선에 설치해둔 사기그릇이 깨지는 소리였다. 침입자가 온 것이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흑산도의 산채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이 녀석들, 함부로 찾아오지 말라고 했거늘.’

수련에 몰두해야 했기에 흑산도의 방문을 불허했다. 하루라도 빨리 삼 갑자의 내공을 모아야 환골탈태를 하고 다음 행보를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진산이 거처 밖으로 나가자 유설이 해맑게 웃으며 달려왔다.

“그래, 배를 채웠으면 소화를 시켜야지. 할아버지랑 같이 가보자꾸나.”

그는 손녀와 함께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끈으로 묶어둔 경계선은 이십여 장 거리였으니 멀지 않은 곳이었다.

잠시 후 그곳에 도착한 유진산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무당파의 이대제자인 현희였다.

아직까지 흑산도와 함께하고 있는 것도 의외였지만, 그녀의 달라진 겉모습은 더욱 놀라웠다.

몸에 쫙 달라붙는 표범가죽 옷에다 호피모자라니. 게다가 그녀의 뒤를 여섯 명의 장한이 호위하듯 기립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헌데 복장이 왜…….”

현희는 방긋 웃으며 오른쪽 손바닥을 어깨 뒤로 내뻗었다.

“그거 가져와 봐.”

“예, 총관님!”

멍한 얼굴로 있던 유진산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무당파의 이대제자가 흑산도의 총관이 되어있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현희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작은 보따리를 내밀었다.

“어제 멧돼지를 한 마리 잡았거든요. 그래서 고기를 좀 가져왔어요. 토끼 한 마리도 넣었습니다.”

그 순간 아래에서 유설이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소리쳤다.

“꼬기!”

아이는 빨리 보따리를 자신에게 내놓으라고 손짓했다.

“예쁜 아가, 오랜만이네? 근데 이건 무거워서 들 수가 없어. 위험하단다.”

한눈에 보아도 아이가 들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무게였다. 그러나 유진산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울기 전에 어서 넘겨주시게.”

어리둥절한 현희는 보따리를 아이에게 건넸다. 넘어질 때를 대비해서 자세를 잡아주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자신의 몸통보다 큰 자루를 움켜쥐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현희의 다리를 붙잡고 얼굴을 비벼댔다.

“히. 좋아~.”

“아, 아니 그걸 어떻게 들고 있니?”

그녀가 어찌 알겠는가. 청랑의 내단을 흡수하고 환골탈태까지 이룬 아이임을. 이미 유설은 현희보다 월등히 많은 내공을 보유하고 있었다.

“허허. 신경 쓸 것 없네. 헌데 이걸 건네주러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용건이 있는지 말해 보시게.”

현희는 쪼그려 앉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아직 소식 못 들으셨죠? 지금 강호가 발칵 뒤집혔어요.”

세상과 단절하고 사는 그가 무슨 소식을 듣겠는가. 그래도 요즘 강호가 돌아가는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솔깃해진 유진산은 그녀를 재촉했다.

“무슨 내용인지 어서 말해 보시게.”

“검후 아시죠?”

“무림인이 황제는 몰라도 검후는 모를 수가 없지. 천하제일고수를 어찌 모르겠는가.”

“그분이 금분세수식을 거행한대요. 열흘 후에 백양현에서요!”

금분세수(金盆洗手). 무림인이 강호를 떠나기 위해 하는 공식적인 은퇴식을 말한다.

최소한 오십 일 전에는 무림맹에 공표해야 하며, 이 의식을 무사히 마치면 무림의 모든 은원관계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옛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강호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원수들이 마지막 복수를 위해 모두 몰려들기 때문에, 의식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들은 많지 않았다.

“검후는 나이가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벌써 은퇴를 한다고……?”

“이유는 아무도 모르죠. 워낙 유별나기로 소문난 분이잖아요?”

“하긴. 그런데 백양현이면 여기서 반나절이면 가는 곳이 아닌가?”

현희는 눈빛을 빛내며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네. 그래서 구경하러 가려고요. 같이 가요, 할아버지.”

검후는 어느 세력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의 인물이었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닌 그녀는 한 번도 상대를 죽이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다만 불구로 만들고 다녔을 뿐. 명예를 중시하는 무림인들에게 죽음보다 더욱 수치스러운 피해를 안겨준 것이다.

과거 무림맹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기재들을 한 자리에서 모두 병신으로 만든 일화도 있었다.

“오래 살고 싶으면 나다니지 말고 그냥 이곳에 있게. 자네도 무당파의 도사들이랑 마주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번 금분세수식에는 공식적으로 개인 간의 다툼이 허용되지 않으니까요. 백양현에서 사사로이 검을 뽑는 순간 무림 공적이 되는 거죠.”

“그것만으로는 안심되지 않아. 강호에서 아기를 업고 다니는 노인이 얼마나 있겠나.”

현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방긋 웃으며 물었다.

“제가 왜 할아버지를 찾아와서 부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잠시 생각해보던 유진산은 피식하고 웃었다.

“자네도 변장이 필요한 게로군. 아이의 엄마로 말이야.”

현희는 유설을 번쩍 들어 가슴으로 안아 들었다.

아이도 그녀가 마음에 드는지 까르륵 웃으며 얼굴을 파묻었다.

“저랑 같이 가주세요, 할아버지. 가족처럼 같이 가면 되잖아요? 먼 곳에서만 지켜보고 올 거예요.”

유진산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렇지 않아도 유설에게 입힐 옷과 생활용품을 구매하기 위해 한 번은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검후의 은퇴식이라면 무림맹의 핵심 원로들도 참석할 터. 원수일지도 모르는 그들의 모습을 직접 확인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수많은 방파가 몰려드는 만큼, 운이 좋다면 어떠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가족으로 위장을 한다라…….’

충분히 일리는 있었다. 그가 위험요소를 계산해 보고 있을 때였다.

현희가 애교 서린 목소리로 애원해왔다.

“같이 가요, 아버님~. 제가 모시고 갈게요. 네?”

변화된 그녀의 모습을 보자니 웃음이 나왔다. 흑산도의 간부로서 완전히 적응한 모양이었다.

“거참. 언제 네가 내 딸이 되었단 말이냐.”

“저번에는 막내 며늘아기랑 닮았다면서요?”

“사실이긴 하다만, 그것으로는 부족해. 대신 조건이 있다.”

현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너무 순수해 보였기에, 유진산도 마음이 훈훈해졌다.

“정말요? 무엇이든 말씀만 해주세요!”

“조금이라도 위험하다고 판단된다면 나는 바로 돌아갈 것이다.”

“물론이죠. 정말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요?”

강호를 은퇴한 지 이미 수십 년이었다. 그렇기에 약간의 변장만으로도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은 없을 터였다. 사고에만 휘말리지 않는다면 위험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었다.

“헌데 채주의 허락은 받았는가?”

현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 있게 답했다.

“이미 얘기해놨어요. 우리 채주님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녀의 표정을 살펴보던 유진산은 껄껄 웃었다. 대충 상황이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현희와 채주 사이에 뭔가가 있음이 확실했다.

“그럼 그리하게. 모처럼 바람 좀 쐴 수 있겠구만.”

싱글벙글해진 현희는 아이를 건네며 작별을 고했다.

“헤헤. 고맙습니다! 그럼 하루 전에 모시러 올게요!”

현희와 그를 따르는 산적들은 볼일을 마쳤다는 듯 유유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유진산은 유설의 손을 잡고 거처로 돌아왔다.

해의 위치를 보니 미시(未時)쯤이 되어있었다. 또다시 지루한 수련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아이를 마루 위에 앉혀둔 그는 방에서 화룡신창을 꺼내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공 수련이었지만, 신체 단련도 게을리할 수가 없었다.

“후웁.”

숨을 크게 들이마신 유진산은 유가창법의 구결에 따라 창 자루를 움직여갔다.

앞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 그와 함께 창끝이 바람결을 따라 움직이며 호흡을 함께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아름다운 곡선이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유가장의 창술은 부드러움을 근본에 두고 있다. 상대의 시선을 현혹하며, 공격을 흘려보내고, 힘을 더하여 되돌려주는 것이다.

당연히 유가창법의 일인자는 가주인 유진산이였다.

“히이~.”

평소처럼 유설이 해맑게 웃으며 지켜보고 있다. 무술 훈련을 지켜보는 것이 신기하고 재밌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무엇인가 좀 이상했다.

창무(槍舞)를 추던 유진산의 움직임이 갑자기 정지했다. 유설이 마루에서 내려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배!”

“……왜?”

“설이 꺼.”

“응? 뭐가?”

유진산이 어리둥절하며 좌우를 살폈다.

그때 땅콩 같은 손가락이 자신의 창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헛웃음을 삼킨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이거 달라고?”

“응!”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도 따라 해보고 싶은 듯했다.

그러나 화룡신창은 유설의 키보다 열 배나 길었다. 이걸 어찌 휘두른단 말인가.

고민하던 그는 마지 못해 창을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 환골탈태를 이룬 이상 다칠 우려는 없었다.

“허허…….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아라.”

아이는 화룡신창을 건네받으려 했으나 쉽지가 않았다. 손가락이 짧아서 굵은 자루를 움켜쥘 수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뜻대로 안 되자 유설의 눈가에 물기가 그렁그렁해졌다.

“흐이잉.”

“울지 말거라. 뚝!”

시선을 맞추어 다독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히잉. 하배 나빠!”

서럽게 우는 손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어찌 편하겠는가. 유진산은 먼 곳을 내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의 시야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사육장을 보강하기 위해 미리 꺾어왔던 대나무였다.

‘옳거니! 이거면 적당하겠구나.’

유진산은 대나무 하나를 냉큼 가져와 가늘게 쪼갠 후 단면을 부드럽게 다듬기 시작했다.

어느새 울음을 그친 유설이 기대감 가득한 눈동자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흐뭇한 미소로 아이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조금만 기다려라. 금방 끝난단다.”

“하배 좋아.”

유설은 할아버지의 등 뒤로 달려가 얼굴을 파묻고 해맑게 웃었다.

반각이 지난 후 그럴싸한 연습용 창이 한 자루 완성되었다. 가늘고 뭉툭한 게 봉의 형태에 가까워 보였다. 그야말로 훌륭한 장난감이었다.

“자, 되었구나. 어서 한번 같이 해보자꾸나.”

봉을 받아든 유설은 자신이 수련할 때 짓는 진지한 표정을 따라 했다. 그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수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아이에게 가문의 창술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우리 가문의 조상님 중에는 창귀(槍鬼)라 불리던 전설적인 고수가 있었단다. 그분이 남겨놓은 창술 비급은 찾지 못했지만, 이 유가창법 또한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자부심을 느껴야 한단다.”

유진산의 말은 손녀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미 유설은 양손으로 봉을 움켜쥔 채 기수식을 흉내 내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자세가 제법 그럴싸했다.

“유가창법의 일초식은 추일극섬(追一極閃)이다. 이것이 펼쳐지기 시작하면 그 어떠한 상대도 피해낼 수가 없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말을 마친 그는 왼발을 내디디며 창을 어깨 위로 잡아당겼다. 동시에 유설도 행동을 따라 했다. 매일 할아버지의 수련을 지켜보다 보니 동작을 외운 모양이었다.

물론 아직은 흉내만 내는 어설픈 몸짓에 불과했다.

잠시 후 화룡신창의 창끝이 전면으로 뿜어져 나가며 회오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파아아앙-!

초식을 마친 유진산은 은근슬쩍 손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입이 자동으로 벌어졌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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