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아직 간다고 안 했어요 (2)
“휴.”
현희의 입에서 계속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짚단이 깔린 바닥에 드러누운 그녀는 어제의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별거 아니었지만, 순간순간이 마치 꿈만 같았다.
그저 잘 먹고, 씻고, 잠깐의 자유를 만끽했을 뿐이었지만 그 달콤함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나가고 싶어.’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 생각밖에 없었다.
평생 이 좁은 감옥 안에 갇혀 있어야 할 것 같은 공포가 느껴졌다.
그때 누워있던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기다리던 사람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푹 쉬셨는가.”
유진산을 바라보는 현희의 얼굴은 무척 밝아져 있었다.
“네…….”
처음과 다르게 무척 고분고분한 모습이었다.
유진산은 쇠창살을 가운데 두고 의자에 앉아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이 노인이 언제 또다시 올지 모르네. 그러니 혹여 할 말이 있다면 지금 건네시게.”
어젯밤 그가 특혜를 누리고 싶다면 거래를 제안하라고 은근슬쩍 얘기한 바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밤새 고뇌하였던 부분이었다.
흑산도는 없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무공이겠지.’
현희는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단순히 이곳에서 대우를 받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간 사문에서 당했던 서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무당파가 여도사의 입문을 허락한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자질이 뛰어남에도 사숙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일이 일쑤였고, 사형제들로부터는 시기와 따돌림이 끊이질 않았다.
돌이켜보면 좋은 추억조차 없었거늘, 그런 사문을 위해 이렇게까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자괴감이 들었다.
결심을 굳힌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달싹였다.
“저를…… 자유롭게 해준다면 무당파의 검법 중 하나를 알려주겠어요.”
유례 깊은 무당파의 검법은 하나하나가 만금의 가치를 지닌다. 그것을 산적들에게 알려주겠다니. 무림인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유진산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당파의 검법이라……. 그래도 괜찮겠는가? 자네 사문에서 이 사실을 알면, 험한 꼴로 파문을 당할 걸세. 어쩌면 척살을 당할지도 모르고.”
“여기에 처박혀서 죽어가는 것보다는 파문을 당하겠습니다.”
그녀가 밤새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충분히 자네 마음을 이해하네. 그럼 거래 성립이로군.”
유진산이 손뼉을 두 번 부딪치자 산적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즉시 그녀의 포박을 전부 풀어주었다.
다시 자유의 몸이 된 현희는 얼굴에서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사람이 자유를 되찾는 것보다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 따라오시게.”
유진산은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깨끗한 통나무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깨끗한 목재 침상과 작은 탁상. 그리고 각종 집기류와 비파까지 보였다. 그녀가 좋아할 만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곳은 뭐죠?”
“자네에게 주는 작은 선물일세. 다시는 뇌옥에 들어갈 일이 없을 테니, 앞으로 이곳을 이용하시게.”
“고, 고맙습니다.”
산적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다니.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을 깨닫고는 조금 당황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잠시 이곳에서 쉬고 계시게. 노을이 질 때쯤 앞의 공터로 나와 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유진산이 돌아가고 홀로 남겨진 그녀는 침상에 드러누웠다. 좁은 뇌옥에서 벗어나 아늑한 곳에 누우니 마치 꿈만 같았다.
산채 곳곳으로 감시가 삼엄하여 도망칠 틈이 없었지만, 기회는 언제든 찾아올 터. 급할 것은 없었다.
긴장이 풀어진 그녀는 잠시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쿵-! 쿵-!
문 앞에 누가 찾아왔다.
열어보니 산적 한 명이 찻잔을 움켜쥐고 있었다.
“홍아차입니다. 맛이 괜찮으니 한번 드셔보시지요.”
현희는 멍한 얼굴로 얼떨결에 찻잔을 건네받았다.
“이걸 왜 저한테……?”
“귀중한 분이시라고 채주님이 특별히 모시라 하셨습니다. 앞으로 하루에 세 번, 차가 배달될 것입니다. 저는 바로 좌측으로 보이는 대기실에 있으니 필요한 게 있으시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
산적이 돌아가고 탁상 앞에 앉은 그녀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이어 차를 음미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자들이 단체로 미쳤나?’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묘한 느낌이었다.
하루아침에 포로의 신분에서 귀빈이 되어있었다.
그녀가 차를 다 마실 때쯤 산적들이 다시 찾아왔다.
쿵-! 쿵-!
이번에는 두 명이었다. 기다란 상에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식사시간입니다. 양껏 드시고 그냥 놔두시면 반 시진 뒤에 와서 치우겠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그녀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마음을 비우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무당파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상황이 조금 이상했지만, 마치 황궁의 공주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 식경이 지난 뒤. 그녀는 소화를 시킬 겸 밖으로 나섰다.
‘산적들이 음식 솜씨가 제법이네.’
배가 부르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자 산채의 작은 연무장이 보였다.
상의를 탈의한 채 무예를 수련하는 백여 명의 산적들.
동작을 지켜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머릿수만 많지 가소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를 발견한 누군가가 소리쳤다.
“교관님께서 나오셨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장한들이 그녀의 앞에 도열했다. 그러고는 두 다리를 바짝 붙이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렸다. 군단에서 병사들이 상급자에게 하는 인사였다.
척-! 처처척-!
어리둥절한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흑산도의 채주가 그녀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녀에게서 빼앗았던 무당파의 검을 돌려주기 위함이었다. 유진산이 지척에서 대기하고 있었기에 돌발행동은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괜찮으시면 한 수 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얼떨결에 검을 받아든 현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흑산도의 두목이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다니.
게다가 건장한 장한들이 토끼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평생 이런 기분을 언제 느껴보았단 말인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우쭐해졌다.
“그럼…… 잘 지켜보세요. 무당파의 검법이 무엇인지.”
그녀의 왼발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동시에 물결처럼 나아가는 검 끝이 방향을 틀며 태극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움직이는 검의 곡선은 점점 빨라지며, 화려한 장관을 연출해갔다.
검술 시범은 일각 동안 이어졌다. 그것이 끝나는 순간 산적들이 동시에 열렬한 갈채를 보냈다.
“우와아아!”
“와아아아아!”
“정말 최고예요!”
산적들은 단지 미리 언질을 받은 대로 행동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쯤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자신들의 검술과 무당파의 것은 질적으로 하늘과 땅 차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희의 기분은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적대관계였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말이다.
“소청검법이라고 해요. 무당파의 기초 검법이지만, 기본이 탄탄하여 대성을 이룬다면 상승검법에도 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의 검이 땅을 치고 하늘로 떠올랐다. 동시에 한 바퀴를 회전하며, 날카로운 바람을 뿜어냈다.
파앙-!
그리고 그녀의 동작을 따라하는 흑산도의 산적들.
처음이라 그런지 어색하기가 그지없었다.
“크윽!”
“컥!”
넘어지는 자들이 속출했으며, 옆에 있는 동료의 옷자락을 베어버린 자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현희는 깔깔대고 웃었다.
“그렇게 움직이면 어떡해요? 자세를 이렇게 잡아야죠.”
현희가 산적들의 틈새로 들어가 자세를 잡아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십여 장이 떨어진 곳. 유진산과 풍호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것 같은가?”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저 처자가 우리에게 무공을 알려주고 있다니…….”
“머리는 좀 단순한 것 같지만, 그만큼 순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아이일세. 허나 아직 어려서 호승심이 좀 있는 것 같으니, 감안하여 잘 보살펴 주시게.”
“알겠습니다.”
첫날의 훈련은 날이 완전히 저물고 나서야 끝이 났다.
거처로 돌아온 현희는 탁상에 앉아 턱밑에 깍지를 끼고 있었다.
‘이걸 어찌한다?’
계속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주를 생각해보았지만, 한순간도 감시가 끊이질 않았다.
흑산도에서 무공이 가장 고강한 채주와 부채주가 번갈아 가며 온종일 감시하고 있었다.
“휴. 나도 모르겠다.”
당장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준비된 욕탕에서 몸을 씻고 와서 침상에 눕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닷새가 지난 후 소청검법에 대한 구결과 초식을 모두 전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변화가 일어났다. 더는 자신을 감시하는 자가 없어진 것이다.
기회를 틈타 밖으로 나선 그녀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곧이어 산채를 둘러싼 울타리의 작은 구멍을 찾아냈다.
현희는 그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옆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나가면 옷이 더러워지지 않겠나. 이미 약속한 것을 지켰으니, 당당히 정문으로 나가도 붙잡지 않을 것이네.”
“할아버지…….”
유진산이 뒷짐을 지고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개심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는 미소였다.
“헌데 어디로 갈 생각인가? 우리에게 검법을 알려준 이상 무당파로는 돌아갈 수가 없을 터인데.”
“그건…….”
“지금 나가도 관계는 없지만, 급하지 않다면 날이 밝을 때까지 쉬었다가 떠나시게. 채주한테 부탁하여 여비와 식량을 좀 챙겨주겠네.”
유진산은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려 멀어져갔다.
현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대로 아무도 자신을 감시하는 이가 없었다. 산적 몇 명과 눈이 마주쳤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거처로 돌아와 침상에 드러누웠다.
‘그러고 보니 갈 데가 없잖아. 그리고 만약 내가 산적들한테 검술을 알려줬다는 걸 사문에서 알기라도 하면……?’
생각도 하기 싫었다. 파문이 문제가 아니라 공적으로 낙인찍힐 터였다.
두런두런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어느 순간 스르륵 잠이 들고야 말았다.
날이 밝은 후 그녀는 아무런 생각 없이 문을 열어보았다.
끼이이익-!
따듯한 햇살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며 눈을 부시게 했다.
한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아래를 보자 보따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어젯밤 노인이 얘기했던 여비와 식량인 듯했다.
이렇게 순순히 보내줄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막상 떠나려니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그녀는 무심히 그것을 움켜쥐고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엽전 뭉치와 육포 따위의 건량. 게다가 어디선가 빼앗은 것으로 짐작되는 비단옷까지. 부족함이 없었다.
“지금 떠나시려는 모양이군요.”
흑산도의 채주 풍호였다.
“그게 아직…….”
“저희가 어찌 잡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저희가 악연으로 만났지만, 그것이 때론 인연으로 변하기도 하는 법이지요. 저희를 너무 원망하지 마시고, 좋은 기억만 가지고 떠나셨으면 좋겠습니다.”
“…….”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자 채주가 왼손을 산채 입구를 향해 내밀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붙잡아주면 한 번 거절하면서 반응을 살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냥 나가라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자 오기가 생겨났다.
‘얘네 뭐야? 아직 내 입으로 나간다고 얘기한 적도 없는데?’
무당파에서는 그저 눈치나 보는 이대제자에 불과한 그녀였다.
그러나 이곳에 있으면 수많은 장한들의 시중을 받으며 공주같은 생활이 가능했다. 언제 자신이 이런 호화스러움을 누려본단 말인가.
현희는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소청검법은 무당파의 보법과 함께 펼치지 않으면 위력이 제대로 안 나오거든요. 그냥 가기엔 조금 마음이 쓰여서…….”
그 순간 풍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소협께서 거기까지 생각해주셨다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조금 더 머물러서 저희를 좀 지도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어지간한 산적들은 현희의 일초지적도 안 되지만, 채주인 풍호는 얘기가 달랐다.
그의 수준은 그녀의 아래가 아니었음에도, 겸손함에는 가식이 없어 보였다.
“정 그렇게 부탁하신다면야…….”
그녀는 마지못해 못 이기는 척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무당파의 무공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현희는 무당파의 이대제자 중에서 최고의 후기지수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상승무공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무공을 꿰차고 있었다.
풍호는 양손으로 포권을 건네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소협. 저희가 어떻게 보답해드려야 할지.”
그 순간 현희의 고개가 슬쩍 올라갔다. 턱선을 드러낸 그녀는 어느새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선 산채를 좀 둘러보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예, 그럼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소협. 함께 걸읍시다.”
흑산도의 채주 풍호와 무당파의 이대제자 현희. 이 둘은 나란히 산채의 주변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마주치는 산적들마다 양발을 붙이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십여 장이 떨어진 공터. 그곳에선 한 노인이 아이의 손을 잡고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허허허. 그러고 보니 둘이 잘 어울리는 것도 같구만.”
그때 아래에서 유설이 그의 손가락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맘마!”
“허허. 그래, 우린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오늘은 할아버지가 토끼탕을 끓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