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아직 간다고 안 했어요 (1)
양주산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사건이 있던 날로 열흘이 지난 시점에서 유진산이 다시 산채를 방문했다.
등에는 곤히 잠든 유설이 업혀 있었다. 산채가 소란스러웠지만 피곤한 듯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서는 산적들이 기성을 내뱉으며 무예를 단련하고 있었다.
“이엽! 이엽!”
“히얍!”
그들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흑산도의 채주인 풍호였다.
“요즘 산적들은 무예도 수련하나 보군.”
“무당파 놈들이 언제 또 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지켜보시니 어떻습니까?”
“모든 초식이 하나같이 단조롭고, 살상력에만 치중되어 있군.”
“전장에서 사용되는 관군의 무예들입니다. 무림의 것과는 좀 다르죠.”
“집단전투에만 특화되어 있어. 게다가 초식들이 너무 정직해.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들에겐 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일세.”
“그럼 지도를 좀 부탁드려도 되겠는지요?”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아. 쓸데없이 기력을 소모하는 건 사양하겠네.”
머쓱해진 풍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무림의 무공이 필요하긴 하겠군. 지금 상태로는 발전에 한계가 있을 것이네.”
“좋은 방안이 있을지요?”
유진산은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무당파의 처자는 어찌 지내는가?”
“조용합니다. 근데 최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강호 초출에 이런 일을 겪으니 적응하기 힘들겠지. 먹는 것은 어떠한가?”
“말씀하신 대로 그동안 만두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이지 않았습니다.”
“수고했네. 이제 내가 한번 만나봐야겠군. 그전에 준비해줄 게 좀 있네.”
풍호에게 몇 마디를 건넨 그는 산채 곳곳을 산책했다.
전경이 훌륭한 곳에 있는 분지였기에, 경치가 꽤 괜찮았다. 뒤쪽에는 매화나무 숲까지 있었다.
모처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한 식경을 돌아다녔을 때였다. 낯익은 산적 한 명이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유진산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등 뒤에서 유설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옹알거렸다.
“상구.”
상구는 놀란 눈을 끔뻑이더니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하하! 어르신, 아기가 제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해요.”
“그럼, 대단하지. 누구 손녀인데. ”
유진산은 상구의 안내를 받아 작은 전각으로 들어갔다.
이미 자신도 겪어보았던 장소였다. 산채에서 포로를 묶어두는 뇌옥이 있는 곳이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자 보초를 서고 있던 산적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뒤로 보이는 두꺼운 쇠창살 안에는 한 여인이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지내기가 좀 어떠한가.”
무당파의 이대제자 현희였다. 그녀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유진산을 노려보았다.
“나를 풀어주지 않으면 모두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의자에 앉은 유진산은 손녀를 앞으로 옮겨 안고 쓰다듬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풀어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미 무당파의 도사를 열 명이나 죽였는데 말이야.”
“악귀 같은 살인자들.”
“그 말은 동의할 수가 없군. 우리를 죽이러 온 것은 자네들이 아니던가? 이유야 어찌되었든 앉아서 죽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현희는 말끝을 흐렸다.
“우린 자네들에게 몇 배나 더 많은 인원수가 죽었네. 여하간 무림이 원래 그런 곳이 아니겠는가. 힘이 곧 법인 세상일세. 죽음이 무섭다면 강호로 나오면 안 되는 것이지.”
현희는 입을 꾹 닫고 유진산을 계속 노려보았다.
“…….”
“자네를 풀어줄 수 없는 입장을 이해해 주시게. 대신 지내는 데 불편한 게 있다면 말해보시게.”
불편한 게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산적들의 소굴에 홀로 갇혀 있다 보니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의문만이 가득했다. 도대체 무슨 의도란 말일까.
“……?”
“우리 막내 며늘아기가 생각나서 말일세. 자네 몰골을 보니 제대로 먹지도 못한 모양이군.”
노인이 친근한 목소리로 사근사근 말해오자, 현희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아기를 안고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경계를 느슨하게 만들고 있었다.
“……열흘 동안 만두만 먹어봤어요?”
유진산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뒤에 기립하고 있던 산적들을 바라보았다.
“만두만 먹이다니, 아무리 포로라 해도 너무들 했군. 지금 당장 제대로 된 음식을 가져오너라.”
“예, 어르신.”
산적 한 명이 나가고 일각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십여 명의 산적이 상을 하나씩 들고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리찜과 닭죽, 양고기탕과 과일들까지. 산적들도 평소에 먹기 힘든 음식들이 끊임없이 뇌옥 안으로 들어갔다.
현희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입에는 침이 고이고,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이 찜찜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유진산이 산적들을 향해 말했다.
“모처럼 편히 먹을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군. 손목의 사슬도 좀 풀어주시게. 문도 그냥 열어두고.”
“예, 알겠습니다.”
철컥-!
열흘 만에 양손이 자유로워졌다. 현희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은근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탈출하려면 기회가 지금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모를 유진산이 아니었다.
끼이익-!
쇠창살의 일부가 찌그러지는 소리였다. 유진산이 한 손으로 그리 만든 것이다.
노인의 엄청난 내공에 현희는 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탈출은 조금의 가능성도 없음을 직감한 것이다.
“내 약속하지. 자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을 것이네. 먹지 않아도 되네. 다만 한 식경이 지나면 이 음식은 다시 치워질 것일세.”
그녀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냥 먹자니 자존심이 상했고, 먹지 않으려니 미칠 것만 같았다.
그때 유진산의 가슴팍에서 유설이 바둥대며 소리쳤다.
“꼬기!”
“우리 손녀, 배고프구나. 하지만 이건 우리 음식이 아닌데 어찌하면 좋으냐.”
어차피 음식은 혼자 먹지 못할 만큼 차고도 넘쳤다.
유진산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먹, 먹으세요.”
“허허. 고맙네.”
유진산은 오리고기를 하나 집어 아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유설은 오물오물 먹으며 입을 계속 벌렸다.
“마이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희는 침을 꼴깍 삼켰다.
“반각쯤 남았군. 먹지 않아도 되네. 덕분에 우리 손녀만 포식하는구만. 허허허.”
그때였다. 굳건히 버티던 그녀의 정신이 기어코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섬섬옥수가 잽싸게 닭다리 하나를 움켜쥐었다.
눈이 돌아간 그녀는 그것을 눈 깜짝할 순간에 해치워버렸다.
입안에 닭고기가 가득했으나 양손은 이미 다른 음식을 움켜쥐고 있었다.
“천천히 드시게. 그러다 체하겠네.”
유진산의 말은 이미 귀에 들려오지도 않았다.
허겁지겁 음식을 먹던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너무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되자 산적들이 기다렸다는 듯 때맞춰 들어왔다. 그들은 빼앗듯이 다시 음식들을 회수해갔다.
아직 배가 부르지 않았던 그녀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멀어져가는 상들을 지켜보았다.
“맛이 어떠한가.”
“그, 그냥 먹을 만하네요.”
“다행이군. 다 먹었으면 따라 나오시게. 물론 내키지 않으면 그 안에 계속 있어도 괜찮네.”
현희는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란 말인가.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었다. 지금 이 작은 뇌옥에서 나가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유진산은 산적들과 함께 그녀를 호위하듯 포위하며 어느 통나무 집으로 이동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유진산이 턱짓으로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가 보시게. 한 식경을 주겠네.”
어안이 벙벙해진 현희는 문을 열어보았다.
따듯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탕이 준비되어 있었다. 깨끗한 욕조 안으로 붉은 꽃잎이 둥둥 떠다녔다.
게다가 한쪽에는 갈아입을 수 있는 깨끗한 옷가지도 준비되어 있었다.
“이, 이게 뭐죠?”
“그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을 것이 아닌가. 그간 신경 써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내키지 않으면 그냥 그 문을 닫으시게.”
무당파에서도 깔끔하기로 유명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현희가 그동안 가장 괴로워했던 부분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 아니에요…….”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꿈만 같았다. 따끈한 욕조에 몸을 담그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이없게도 지금이 평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한 식경이 지난 뒤 여지없이 밖에서 산적들이 문을 두들겼다. 아쉬웠지만 버틸 수도 없는 노릇. 새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쭈뼛쭈뼛 문밖으로 나갔다.
역시나 아이를 안은 노인이 인자한 미소로 반기고 있었다.
“허허허. 사람이 달라 보이는구만. 오랜만에 나와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어떤가?”
“좋네요…….”
“평소에는 알지 못했던 여유라는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면 무척 행복한 일이지. 모처럼 나왔는데 산책도 좀 하시게.”
현희는 유진산과 산적들의 안내를 따라 산채 뒤의 매화나무 숲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깔끔하게 차려입은 산적 몇 명이 미리 나와 합주를 하고 있었다.
“실력이 제법이네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녀는 표정을 관리하며 입을 꾹 닫았다.
“음. 내 생각엔 자네도 음에 소질이 있을 것 같군.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있는가?”
“비파요.”
“허허. 기회가 되면 하나 선물해 주겠네.”
어느새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경계심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산책이 끝나는 동안 유진산과 그녀는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마무리된 이후.
마지막으로 도착한 최종 목적지는 그녀가 갇혀 있던 뇌옥이었다.
“오늘 하루 즐거웠었으면 좋겠군.”
산적들이 몇 가지 물품을 가져왔다.
그녀가 원래 입고 있던 더러워진 무당파의 도복. 그리고 손목을 옥죄는 쇠사슬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현희의 두 눈이 경련을 일으켰다.
또다시 뇌옥으로 들어가야 한다니. 죽기보다 싫었다.
“자, 어서 손목을 내미시게.”
“…….”
모든 것을 다 가졌다가 한 번에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마치 게눈감추듯 양손을 등 뒤로 숨겼다.
“왜 그러시는가. 자네는 포로이니 어쩔 수가 없음을 이해해 주시게. 어서 손을 내미시게.”
현희는 다급해졌다. 뇌옥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듯 유진산의 손을 회피하며 버텼다.
“뭐, 뭐라도 요구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잘해주고 다시 가둔다니요?”
“얘기하지 않았는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일세. 어서 들어가시게. 이 노인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 참인가.”
안색이 창백해진 현희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벽에 등을 부딪쳤다.
“잘, 잘못했어요…….”
“무엇을 말인가? 자네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네.”
“저, 절 다시 가두려거든 그냥 죽이세요!”
그녀의 감정은 계속해서 뒤바뀌고 있었다. 혼란에 빠진 것이리라.
유진산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원한다면 오늘과 같은 특혜를 매일 누릴 수 있네. 더한 것도 말이지. 하지만 그러자면 자네도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줘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고민해보아도 자신은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설마?’
그녀는 의심의 눈초리로 산적들의 시선을 훑어보았다. 예상과는 달리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은 없었다.
그녀의 속내를 눈치챈 유진산은 인자한 미소로 말했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은 필요 없네. 흑산도에도 규칙이 있고 말이야. 만약 선을 넘는 녀석이 있다면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네.”
“그럼 무엇을…….”
유진산은 대답 대신 오른손을 벼락처럼 내뻗었다.
푹-! 푸푹-!
느닷없는 기습에 그녀는 피할 생각도 못 하고 점혈을 당해버리고 말했다.
“이해해 주시게. 내일 다시 찾아올 테니, 만약 우리와 거래할 게 있다면 그때까지 잘 생각해 보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