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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2화 (12/238)

12화 세상의 이치 (1)

유진산에게 상대를 봐주는 일 따윈 없었다.

그는 전투에 임하면 언제나 전력을 다한다. 목숨을 건 싸움에서 양보를 하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었으니까. 그가 평생을 겪어온 강호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헉!”

뒤따라 공격해오던 도사가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아무리 방심했다지만, 자신의 사제가 손 한 번 못 쓰고 목이 돌아갔다.

그리고 기회를 놓칠 유진산이 아니었다. 강호 경험이 적은 후기지수가 상대하기에 그는 너무나도 노련한 고수였다.

땅속에 박아놓은 창 자루를 움켜쥔 유진산. 동시에 그의 발이 창날을 걷어찼다.

투학-!

창날이 튀어 오름과 동시에 흙먼지가 상대의 안면으로 뿜어졌다.

노인에게 접근하던 도사는 일순간 눈을 감아버렸다. 실전 경험이 별로 없는 자들이나 할 법한 치명적인 실수였다.

“큭!”

동시에 자세를 낮춘 유진산은 한 바퀴를 회전하며 상대의 하체를 노렸다.

시야가 불편해진 도사는 본능적으로 기의 흐름을 읽고 도약했다. 그 순간 유진산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걸렸구나, 애송이 녀석.’

하체를 향하던 창이 기다렸다는 듯이 방향을 틀며 솟구쳐 올랐다. 조금 전의 공격은 허초였던 것이다.

유진산은 상대를 향해 쏜살같이 따라붙었다. 도사가 그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날카로운 빛살이 가랑이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푸우욱-!

“크아악!”

단말마와 함께 도사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했다.

지면에 내려선 유진산은 묵묵히 창을 흔들어 시신을 떨궈냈다.

털썩-!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르신.”

산적이 어찌할 줄을 모르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인사는 됐다. 우선 산채로 가자꾸나. 채주를 만나봐야겠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려고 할 찰나. 등 뒤에서 손녀가 다리를 팔딱이며 소리쳤다.

“하배!”

고개를 돌려보자 아이가 손가락으로 쓰러진 도사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진산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들을 응시했다. 그러던 중 무엇인가를 깨달았는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설이가 아니었으면 중요한 것을 잊을 뻔했구나. 이놈들을 옮겨야 하니 어서 들어라.”

산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료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는 판국에 적의 시신을 챙기라니. 연유가 궁금했다.

“도사 놈들의 시신을요? 왜요?”

“그걸 언제 네 녀석한테 일일이 설명하느냐. 어서 들고 따라와.”

“예, 어르신. 근데 제가 둘 다 들어요?”

유진산은 바닥에서 도사들의 무기를 챙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 녀석 참, 말이 많구나. 젊은 놈이 허리도 안 좋은 노인을 꼭 부려 먹어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무기는 내가 챙겼으니 어서 들고 와!”

“……예.”

수준이 높지는 않지만, 무공을 수련 중인 산적이었다. 조금 지치겠지만, 시신 두 구를 혼자 드는 것쯤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양쪽 어깨 위에 시신을 한 구씩 지고서 유진산을 부지런히 뒤따랐다.

잠시 후 앞서가던 그가 넌지시 물어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상구요.”

“그래, 상구야. 동료들이 죽어서 슬프더냐?”

“예……. 아침에 함께 밥 먹던 녀석들이 눈앞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래도 어르신께서 복수해주셔서 좀 후련합니다.”

“정말 속이 후련해진 것이 맞느냐?”

다시 고민해보던 상구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도사 놈들이라면 다 죽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역시…… 그렇겠지.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악순환의 고리는 반복될 뿐이다. 허나 사람이 어찌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더냐. 업(業)에서 벗어나질 못하니, 그래서 사람이겠지.”

상구는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받은 게 있으면 무조건 돌려줘야지요. 은혜든, 원수든.”

“어쨌거나 원인은 네놈들이 제공한 것이 아니더냐. 선한 짓을 많이 하면 복덕(福德)을 얻고, 못된 짓을 하면 악과(惡果)를 얻는 것이 인과이니라.”

“어르신에 대한 사연은 저도 들었습니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면, 유가장은 왜 그런 일을 당한 것입니까?”

물어보던 상구는 이내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꾹 닫았다.

그러나 유진산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녀석아, 복덕이 없었다면 하늘이 어찌 이 아이를 살려서 내게 보내주었겠느냐.”

가문의 생존자라고는 최고 연장자인 가주와 최연소 손녀가 전부였지만,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그때 업혀있던 유설이 상구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아기가 저 보고 웃는데요?”

“강호에서 오래 살고 싶으면 잘 보여 둬. 훗날 무림의 지존이 될 수도 있는 아이니까.”

“예~ 확실히 천하제일고수가 될 관상이네요.”

건성건성 대답하는 상구의 말투가 유진산의 흰 눈썹을 꿈틀거리게 했다.

“네깟 녀석이 어찌 알아보겠느냐. 검후와 같은 자질을 타고난 아이를.”

그 순간 상구의 표정이 굳어졌다.

검후(劍后)가 누구인가. 정, 사, 마를 통틀어 현 무림에서 대적할 자가 없는 전설적인 고수였다.

자세히 보니 아이에게서 호수처럼 잔잔하고 끝을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상구는 유설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부탁한다. 나는 상구야.”

“상구.”

유설이 팔을 흔들면서 이름을 비슷하게 불러주었다. 어두웠던 상구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 상구. 그 이름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머지않아 산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소식을 들었는지 곳곳이 소란스러웠다.

망루에서 종이 울리며 산적들이 입구로 모여들고 있었다.

상구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대장님은 어디 가셨어?”

산적들 중 일부는 채주를 대장이라 부르고 있었다. 관군 시절의 습관 때문인 듯했다.

아무도 상구에게는 눈짓을 주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은 함께 온 노인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어, 어르신께서 우리를 도와주러 오셨나 봐!”

“그럼 한번 붙어볼 만한 거 아니야?”

그 순간 산적들이 동시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아아아!!”

“와아아아아!!”

유진산은 한 손을 휘저으며 산적들을 비집고 산채 안으로 들어갔다.

손에 들고 있던 도사들의 검은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호들갑 떨지들 말거라. 아직 도와준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

노인의 뒤를 상구가 바짝 뒤따르며 말했다.

“내 어깨 위에 쥐새끼 두 마리 보이지? 둘 다 일격에 뒈졌어.”

“와, 엄청나잖아? 대단하십니다!”

“암! 무당파 놈들 떼로 몰려와도 어르신한테는 안 돼!”

탈영병인 자신들과 달리 체계적으로 무공을 연마한 자들이었다.

무당파의 도사들을 일격에 죽였다는 말 한마디는 산적들의 사기를 끌어 올려 주었다.

그러나 앞장서서 걷던 유진산은 그들의 대화에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이런 정신 나간 놈들이 다 있나.’

기껏해야 강호에 출두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후기지수들이었다.

만약 장로급의 인물이 직접 움직인다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그때는 피할 수 없는 재앙이 불어닥칠 것이 확실했다.

강호를 종횡하던 시절 무당파의 진정한 고수들을 많이 봐왔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전면의 전각에서 낯익은 누군가가 초췌한 얼굴로 뛰어왔다. 흑산도의 채주 풍호였다.

“어, 어르신께서 여긴 어찌…….”

“자네 부하들이 하도 비명을 질러대니 낮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헌데 안색이 왜 그런가?”

풍호는 상구의 어깨에 있는 시신들을 보고 상황을 짐작했다. 표정이 다소 밝아진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놈들의 전력은?”

“여덟 명이라 합니다. 그중에는 일대제자도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무당파의 일대제자라면 대부분 검기를 다룰 줄 아는 일류고수에 속한다.

산적들의 인원이 많다고 한들 당해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비벼볼 만한 자는 채주인 풍호가 유일했다.

“여덟이라. 그 정도면 해볼 만한 전력이 아닌가.”

“어르신께서 도와주신다면요…….”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네.”

풍호는 이미 예상하였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말씀만 해주십시오. 못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유진산은 잠시 고개를 돌려 뒤를 쓱 한번 돌아보았다. 손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의롭지 못한 도적질은 그만두시게. 아이에게 부끄러운 할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일세.”

흑산도를 도와준다면 자신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게 된다. 하나뿐인 손녀에게 언제나 떳떳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풍호도 그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분지에서 농사와 사육은 한계가 있으니, 부하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무슨 좋은 수가 있겠는지요?”

“단지 의롭지 못한 도적질을 그만두라 했을 뿐이네.”

그 순간 풍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노인이 한 말의 의미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산적이 아니라 의적이 되라는 말씀이시군요.”

유진산은 대답하지 않고 화두를 돌렸다.

“시간이 없으니 어떤 전술을 준비하고 있는지부터 말해 보시게. 군관 출신이니 작전이 있을 것이 아닌가.”

“고민해보았지만 할 수 있는 게 마땅히 없습니다. 방책과 망루를 방패 삼아 이곳에서 일전을 벌여볼 생각입니다.”

풍호는 조심스럽게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연륜에서 나오는 그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무당파의 일대제자라면 검기를 다룰 수도 있을 것이네. 아무리 두껍고 높은 방책이라도 검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지. 화살 따위를 맞을 리도 없고.”

“묘안이 있으시면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놈들을 산채의 중심부로 끌어들인 후 포위하여 섬멸해야 하네. 그러려면 다들 분산하여 숨어 있어야겠지. 한때는 관군들이었으니 매복과 은신 정도는 훈련해봤을 것이 아닌가.”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대제자의 눈을 속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숨은 자들의 기(氣)를 감지할 것입니다.”

유진산이 그것을 모르고 말했을 리가 없었다. 뒷짐을 쥔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상관없네.”

“……예?”

“저 두 놈을 이용해 기회를 만들어 볼 생각이니까.”

눈짓을 받은 상구가 도사들의 시신 두 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중 한 구는 피 한 방울 없이 보존 상태가 깨끗했다.

풍호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깔끔하게 처리하셨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저들로 무엇을…….”

“우리의 인원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무당파의 검진이 펼쳐지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네. 그러지 못하도록 몇 놈 잡고 시작해야 승산이 있겠지. 시간이 없으니 어서 저 옷으로 갈아입게.”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풍호는 상태가 양호한 도사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마침 자신과 체구도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얼굴에는 아직도 의문이 남아있었다.

“알겠습니다. 이들로 변장하여 기습하려는 것이군요.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겠는지요? 얼굴을 알아볼 텐데, 접근하기도 전에 발각될 것입니다. 게다가 성공한다고 한들 혼자서 어찌 버티는지요?”

끊임없는 풍호의 반문에 유진산은 슬슬 짜증이 났다.

말하는 것조차 기력이 소모되는 나이가 아니던가. 일일이 설명해주려니 곤욕이었다.

전투를 앞둔 만큼 조금이라도 힘을 더 아껴야 했다.

“대장이나 부하들이나 말이 왜 이렇게 많아!”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설명해줄 터. 야단맞은 풍호는 행동부터 개시했다. 혹시라도 노인이 마음을 바꿔 돌아간다고 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그리고 풍호가 입고 있던 옷을 유진산이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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