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1화 (11/238)

11화 그거 먹는 거 아니야 (2)

“……먹, 먹었어?”

유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단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이의 전신이 붉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유진산은 재빨리 혈도를 짚어 손녀를 잠재웠다. 그러고는 자신의 앞에 가부좌를 틀어놓았다.

손바닥을 등에 밀착시켜 단전을 확인해보던 그는 화들짝 놀랐다.

몸속에서 엄청난 기운이 팽창을 계속하며 용솟음치고 있었다.

‘어찌 이런…….’

그냥 내버려 둔다면 단전이 터져 죽을 상황이었다. 일반적인 아이였다면 분명 그리되었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선음지체라는 특이체질이 영단의 독성을 중화시켜주는 듯했다.

우선 일주천을 통해 용솟음치는 진기를 단전으로 흡수시켜야 했다.

아이의 몸속에서 휘몰아치는 거센 기운이 유진산의 의지에 따라 전신의 혈도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일주천을 계속할수록 유설의 단전에 내공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나 청랑의 내단이 가져다준 내공의 양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아이의 몸이 온전히 흡수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일주천을 수십 번이나 반복하고, 아이의 단전에는 순식간에 일 갑자가 넘는 내공이 축적되어 버렸다.

이제는 내공을 담는 그릇인 단전이 꽉 차버린 상황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진산은 다급해졌다.

‘이걸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어느 순간 고민하던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유일하게 막혀 있는 선음지체의 혈도.

생사현관이라 일컬어지는 임맥과 독맥. 이 두 혈도를 타통하는 데 남은 기운을 소진하는 것이다.

유설의 몸속을 떠돌던 기운이 방향을 틀어 임맥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해일이 밀어닥치듯 막혀 있던 혈도를 연달아 두드리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콰앙-!

철옹성이라 일컬어지는 임맥이 단 세 번의 시도 만에 무너져 버렸다. 그 순간 아이의 전신이 밝은 빛에 휩싸였다.

유진산은 기세를 몰아 독맥을 향해 남은 진기를 돌진시켰다. 그리고 다섯 번의 시도 끝에 독맥을 함락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아이의 전신을 휘어 감았던 밝은 빛무리가 복부 부근으로 이동했다.

‘중단전이 열렸다……?’

환골탈태의 첫 번째 단계였다.

유진산은 남은 진기를 다급히 아이의 중단전에 흡수시켜 버렸다.

작업이 마무리되자 그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지켜보았다. 아이가 환골탈태하는 과정을.

“휴. 두 번은 못 할 짓이로군.”

환골탈태란 전신의 뼈와 살이 재구성되어 완벽한 형태로 재탄생하는 것을 말한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다시 한번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무림사에 이러한 경우가 언제 있었겠는가. 그야말로 사상 최초로 벌어지는 일이었다.

뱀이 허물을 벗듯 변화하는 손녀의 모습에 유진산은 감격에 벅차올랐다.

“허허. 허허허.”

잠시 후 아이의 몸을 감싼 밝은 빛무리가 몸속으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동시에 유설이 눈을 뜨고 있었다. 환골탈태와 동시에 점혈이 자동으로 풀려났기 때문이다.

가벼워진 자신의 몸을 느꼈던 것일까? 눈을 깜빡거리던 유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두 팔을 휘저으며 방 안을 뛰어다녔다.

“히~.”

해맑게 웃는 아이의 모습에 지켜보던 유진산도 마음이 뿌듯했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움직임. 게다가 단전에서 느껴지는 충만한 내공까지. 일평생 내공을 수련한 자신도 성공하지 못한 환골탈태를 손녀가 먼저 경험한 것이다.

“요 녀석, 할아버지 것을 빼앗아 먹으니 맛있더냐.”

말과는 달리 무척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복용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리했더라도 선음지체가 아닌 이상에야 결과를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어쨌거나 유설이 내단을 복용한 것은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눈이 마주친 손녀가 양팔을 벌리고 달려와 넘어지듯 안겼다.

“하배!”

“오냐, 할아버지 씻고 와서 맛있는 개구리 죽을 끓여주마.”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린 그는 밖으로 나와 마당에 내려놓았다.

청랑을 처치한 이후로 위험요소가 모두 사라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환골탈태를 겪고 금강불괴에 가까운 신체 강도를 가지게 되지 않았는가.

이제는 산짐승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 아이가 마음껏 뛰어놀도록 해야했다.

유진산은 땀과 핏물을 씻어내고, 상처부터 동여맸다. 이후 아이에게 밥을 먹이자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운기조식이고 뭐고 오랜만에 푹 쉬고 싶어졌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방에 드러눕자, 유설이 자신의 배 위로 기어 올라와 납작 엎드렸다.

유진산은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길어봐야 앞으로 열흘도 안 남았겠군.’

무당파의 토벌대가 도착할 예상 시간이었다. 그것은 곧 흑산도의 남은 운명과 직결되어 있었다.

미운 정도 정이라 했던가.

산적들에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녀석들……. 예전 일을 생각하면 괘씸하지만 나름대로 따듯한 면도 있었어. 도적들 주제에 양민들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있고 말이야.’

탈영병이었던 그들이 산적으로 전향한 것은 생존을 위한 행위였다.

그들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사람이 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는 것은 기본적인 본능이었으니.

그러나 그들을 도와주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허나 내 코가 석 자인 마당에 누굴 도와준다는 말인가. 정상적인 신체를 갖게 될 때까지는 숨죽이고 버텨야 한다.’

환골탈태를 통해 죽어가는 신체를 벗고 새롭게 태어나야 했다. 그리된다면 전성기의 무위를 뛰어넘어 새로운 무(武)의 경지에 접어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유진산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쉽지 않은 길임을.

황혼기가 될 때까지 환골탈태를 이루지 못했다면 보통은 포기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가슴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응?”

자신의 배 위에 올라타 곯아떨어진 유설이가 침을 흘리고 있었다.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일각이 지났을 무렵 그의 손이 멈추었다. 그 또한 깊은 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 * *

꼬끼오-!

뒷마당의 수탉이 기상을 알렸다.

먼저 일어난 유진산은 운기조식부터 하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닭장과 농작물을 관리하고, 육아와 체력단련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매일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렇게 닷새가 흘렀을 시점이었다.

“끄아아악!”

먼 곳에서 누군가가 내지른 고통스러운 비명이 메아리쳤다.

소리의 진동으로 보아 최소한 오십여 장 밖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밭을 갈고 있던 유진산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올 것이 온 모양이로군.’

유진산은 애써 비명을 무시하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상대는 구파일방 중 하나인 무당파였다. 운이 좋아 토벌대를 물리치더라도, 더욱 강한 자들이 끊임없이 올 터였다. 개입해서 좋을 것은 없었다.

그가 쇠스랑으로 밭을 갈면, 손녀가 졸졸 따라다니면서 막대기로 흩트려 놓고 있었다.

자기 딴에는 흉내 낸다고 하는 짓이었으니 나무랄 수가 없었다.

“아이고, 허리야.”

오늘 새로운 밭을 가꾼다고 작업량이 많았던 터라 허리가 계속 쑤셔왔다.

유진산은 허리를 짚으며 손녀를 바라보았다. 머리에 볏짚으로 만든 모자를 씌워주니 제법 잘 어울렸다.

어김없이 자신을 흉내 내며 양손으로 허리를 움켜쥐는 유설.

“아이고, 어이야.”

“쪼그만 게 허리가 어디 있다고?”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다시 쇠스랑을 움켜쥐었다.

그때 다시 한번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크아악!”

“으악!”

이번엔 두 명이었다.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고민에 빠져 있던 중 유가장이 화를 당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우리 가문을 도와 화를 면하게 해주었다면 무척이나 고마웠을 테지. 진산아……. 이웃의 죽음을 묵과하면서도 어찌 감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이더냐.’

돌연 유진산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쇠스랑을 한쪽에 세워두며 손녀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아가. 오늘 농사는 여기까지 해야겠구나.”

거처로 들어간 유진산은 아이를 보자기로 감싸 등 뒤에 묶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가보인 화룡신창을 움켜쥐었다.

청랑과 싸울 때 자신을 응원하던 녀석들의 얼굴이 떠올라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무당파라면 가문의 원수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세력이지 않은가. 무림맹과 관련된 문파라면 치가 떨렸다.

창 한 자루에 의지한 채 산속을 헤치며 비명이 들려온 방향으로 달렸다.

자신이 그어놓은 영역을 넘어 삼십여 장을 더 전진했을 즈음이었다. 그의 시선이 한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상흔이 여러 개였다. 어깨와 다리의 관통상. 게다가 잘려나간 양팔까지. 공격당한 곳 중에 급소는 없었다.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인 것이다.

‘아무리 복수의 칼날일지라도, 정파를 자처하는 자들의 손속이 어찌 이리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대화가 들려왔다.

유진산은 기척을 죽인 채 살금살금 다가갔다.

“산채의 위치를 얘기할 테냐? 아니면 저놈처럼 죽을 테냐?”

무당파의 도사 두 명이 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들 앞에 무릎 꿇은 산적. 그의 주위로는 처참하게 썰려 나간 두 구의 시신이 보였다.

그는 잔혹하게 죽은 동료들 때문에 무척 격분해 있는 듯했다.

“지랄 떨지 말고 그냥 죽여.”

“산적 주제에 의리를 챙기다니 가소롭군.”

두 명의 도사는 무척 젊어 보였다. 유진산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무당파는 원로고수를 보내 일거에 쓸어버리는 것보다는, 후기지수들에게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을 택한 것이다. 무공이 약한 산적들이라면 실전경험을 쌓게 해줄 훌륭한 상대였으니.

도사 한 명이 산적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동료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사형, 산세를 보니 아마도 산채는 정상 부근에 있을 겁니다. 일단 돌아가서 집결지에 합류하는 게 어때요?”

“여기까지 온 이상 정확한 위치는 알아내고 가야지.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사숙들한테 보고하겠어.”

은은하게 풍겨내는 기세는 제법이었지만, 강호의 경험이 별로 없는 듯했다.

행동과 말투에는 호승심과 무당파의 자부심이 가득해 보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해치우고 정상까지 한번 가보자고요.”

“그래. 그리고 이놈은 네가 처리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걱정하지 마세요. 진청 사제의 복수를 적당히 할 생각은 없으니까.”

무릎 꿇은 산적은 이미 살기를 포기한 듯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처형 임무를 맡은 도사가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이어서 검을 들어 올리는 그 순간.

돌연 뒤에서 낯선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복수도 좋지만, 남의 목숨을 앗아갈 때는 본인의 목도 함께 걸어야 하는 법이지. 그런 각오가 없다면 지금이라도 검을 내리거라.”

산적의 목을 치려던 도사가 미간을 찡그리며 노려봤다.

“누구신지 정체를 밝히시오.”

“저기 앉아 있는 놈의 이웃 어른이라 해두지.”

감정에 벅차오른 산적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르신…….”

도사들은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유진산을 탐색했다. 상대의 기개에서 알 수 없는 불길함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면 나서지 마시오.”

“잘 모르는 것은 바로 너희들이다. 내가 어떠한 일을 당하고 왔는지를.”

유진산이 장창을 땅속에 깊이 꽂아 넣었다.

푸욱-!

이후 그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져 나왔다.

“그리고 지금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를 말이다.”

유진산의 전신에서 서늘한 살기(殺氣)가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그 순간 도사 한 명이 무엇인가를 눈치챈 듯 동료에게 전음을 보냈다.

- 사형, 무림맹에서 수배 중인 유가장의 가주 아니에요?

- 예사롭지 않은 창과 등 뒤에 업은 아이를 보니 맞는 것 같구나.

- 명성을 얻을 좋은 기회입니다. 은퇴한 지 오래된 노인이라 별 볼 일 없다고 했어요.

- 혹시 모르니 네가 먼저 공격해. 내가 보조하겠다.

-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다치지 않게 해요. 반드시 구출해야 한다고 했으니.

그들의 속삭임을 짐작하지 못할 유진산이 아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아직 살날이 많은 아이들이니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혹여 이대로 그냥 돌아가고 싶다면 지금 고하거라. 만약 그리하지 않는다면 손속에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놀고 있네.”

도사 한 명이 유진산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깨 위로 치켜세워진 검 끝이 유진산의 목을 향해 곡선을 그리며 다가갔다.

그러나 상대는 양팔을 부드럽게 벌리며 허점을 내비치고 있었다. 아니, 그런 듯 보였다. 태극을 그리는 그의 양손이 자신의 머리와 턱을 움켜쥘 때까지는 말이다.

게다가 언제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왔는지 검날을 적중시킬 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경악에 휩싸인 그가 두 눈을 부릅뜰 무렵.

우드득-!

목뼈가 돌아가는 경쾌한 소리가 산속을 메아리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