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그거 먹는 거 아니야 (1)
유진산은 풍호를 데리고 산채의 마당으로 나왔다. 뒷짐을 쥔 그가 한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저 위치가 청랑이 들어왔다가 나간 곳이로군.”
그가 말하는 곳에 목책 일부분이 함몰되어있었다. 두께가 얇고, 높이가 낮아 방어에 취약해 보이는 지점이었다.
“맞습니다. 토목 재료를 준비하여 내일부터 보수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냥 그대로 놔두시게. 적이 어느 방향으로 올지 알 수 있다면, 좀 더 효율적인 대비책을 세울 수 있는 법이지.”
“어지간한 함정은 놈에게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유진산의 검지가 공터의 한쪽 부근을 가리켰다.
“우선 저곳에 깊은 구덩이를 만드시게.”
“땅을 파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허나 청랑의 도약력이라면 아무리 깊게 파도 단번에 뛰어 올라올 것입니다.”
“일반적인 구덩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질퍽한 수렁이라면 어떻겠는가?”
풍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물이 많이 괸 수렁에서는 무림고수조차 쉽게 도약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라면 잠시 동안 놈의 발목을 묶어둘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네. 서둘러 준비하시게.”
수렁을 만드는 법은 어렵지 않다. 단지 땅을 파고 바닥과 벽면을 다진 후 물을 붓는 과정에서 많은 인력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지금 산채에는 여유 인력이 넘쳐났다.
유진산이 작업하는 모습을 감독하고 있을 때, 채주가 다시 다가왔다.
“식사를 좀 준비하였습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손녀까지 굶길 수는 없었다.
유진산은 아장아장 마당을 걸어 다니는 아이에게 다가가 가슴으로 안아 들었다.
“으차! 우리 손녀, 밥 먹으러 가자꾸나.”
밥이란 단어를 알아들었는지 아이의 얼굴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식사가 준비된 곳은 채주의 전각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풍성한 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온갖 산나물과 과실들. 게다가 오리찜과 탕까지 보였다.
“변변치 않지만 한번 드셔보십시오. 모두 저희가 직접 기른 것들입니다.”
“별일이 다 있구만. 산적들이 농사를 짓고 사육을 하다니 말이야.”
“강호인들을 상대로 약탈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어느 정도 자급자족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유진산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양민들의 재산은 탐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인가 보군.”
“하하. 그랬으면 이 정도의 산적 집단을 관에서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겠지요.”
유진산은 산나물과 고기를 연신 아이의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산채를 둘러보니 체계가 잘 잡혀있더군. 아무리 보아도 자네는 산적 두목의 관상이 아니야. 이곳에 있기 전까지 어디에 있었는가?”
잠시 머뭇거리던 풍호는 과거를 회상하듯 천정을 응시했다.
“십여 년 전에는 군부에 있었습니다. 저희가 모시던 양유 장군이 반란을 일으켰고, 저는 직속 부하들을 데리고 진영을 이탈했습니다.”
“나도 그 사건을 기억하네. 나라가 한참 소란스러웠지.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가담했던 모든 병사가 참수를 당했다고 들었네.”
“맞습니다. 저희는…… 반란에 가담하는 것보다는 탈영병이 되기를 택했습니다.”
“신념에 따라 움직인 것이니 그 누가 자네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여하간 그 일로 도피하다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게로구만.”
“예. 어르신의 말씀대로입니다.”
유진산도 처음으로 오리고기 한 입을 베어 물었다.
“맛이 괜찮구만. 자네도 어서 들게. 먹고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어떤 일을 말입니까……?”
“함정을 팠으니 미끼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개를 끄덕인 풍호도 서둘러 허기를 채우기 시작했다. 큰 싸움을 앞두고 있었으니, 끼니를 거를 수가 없었다.
손바닥만 한 유설이의 배가 빵빵해지고 나서야 식사가 끝이 났다.
“식사는 괜찮았습니까?”
“물론이네. 우리 손녀가 이렇게 많이 먹은 건 처음일세.”
상체를 숙인 풍호가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맛있었어?”
“마이떠더.”
풍호는 놀란 표정으로 유진산을 바라보았다.
비록 정확한 발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말을 따라 한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굉장히 총명합니다.”
“허허, 특별한 아이일세.”
유설은 소화라도 시키려는 듯 다시 마당을 뛰어다녔다. 그래 봐야 어른의 보폭보다 느린 속도였지만 말이다.
“미끼는 어떤 것으로 준비하시겠습니까?”
“수렁이 완성되면 나뭇가지와 짚단으로 덮고, 주위에 동물의 피와 살점을 뿌려두시게. 그것이 놈을 흥분하게 만들 것이네. 그러나 결정적으로는 누군가가 직접 미끼로 나서야겠지.”
“영악한 식인늑대이니 사람이 아니면 넘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허나 그 일을 누가…….”
“내가 한번 해보겠네.”
“아닙니다. 어르신이 직접 나서면 함정임을 눈치챌 우려가 있습니다. 제가 발목을 묶어둘 동안 놈을 끝장내 주십시오.”
“의외로군. 부하들을 시키지 않고, 자네가 나서려 하다니 말이야.”
“그리한다면 어떤 부하도 저를 믿고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이들의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놈이 있지 않습니까? 큰놈이 더 먹음직스러운 법이니 나에게 맡겨두소!”
흑산도의 부채주인 왕규였다.
유진산도 마주친 기억이 있었다.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제법 쓸 만한 몸놀림을 가지고 있던 녀석이었다.
풍호가 믿음직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다.
“혹시 모르니 갑주를 챙겨 입고 가.”
“예, 형님. 맡겨만 주세요.”
이곳에 정착하기 전에 입고 있었던 관군의 갑주를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날이 어둑해지자 산채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망루에 궁수들을 가득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산적들은 각자의 거처 안에 숨어있었다.
유진산도 기척을 죽인 채 구석의 통나무집에 은신했다.
뒤를 돌아보자 산적 한 명이 뇌옥 안에서 잠든 유설을 안고 있었다. 산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아이를 부탁하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곳은 아무도 못 들어옵니다.”
자신도 갇혔던 곳이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두꺼운 쇠창살 안에 숨어있으면 안심이었다.
지루한 시간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문틈에 낸 구멍을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마당에 홀로 서 있던 부채주 왕규가 한 걸음을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다.
유진산이 다급히 그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 뒷걸음질 치지 말고 그대로 있거라.
청랑이 나타난 것이리라.
자신 있게 소리쳤던 부채주는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놈을 마주친 이상 본능적인 공포가 이성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때 왕규가 공포를 이겨내려는 듯 양손도끼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어서 와봐, 이 늑대새끼야! 내일 아침에는 네놈의 앞다리로 배를 채워야겠다!”
청랑이 왕규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숨어서 지켜보던 모두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둘의 거리가 이 장 이내로 좁혀진 그 순간. 돌연 청랑이 밟고 있던 지면이 푹 꺼져버렸다.
첨벙-!
진흙 위로 물이 무릎까지 괴어있는 수렁이었다. 안에서는 분노한 청랑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놈이 다시 빠져나오는 것은 시간문제.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채주 풍호가 다급히 소리쳤다.
“궁수 발사!”
망루 위의 산적들이 동시에 활의 시위를 놓았다.
팟-! 파파팟-!
구덩이를 향해 수십 발의 화살이 쏜살같이 다가갔다.
그러나 화살로 청랑을 죽일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잠시 시간을 벌기 위한 행위일 뿐이었다.
“지금이다!”
전각에서 산적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는 그물과 투창이 들려 있었다.
구덩이 속으로 그물이 활짝 펼쳐지며 청랑의 움직임을 일순간 봉쇄했다.
동시에 이어진 투창 세례가 그곳을 향해 쉼 없이 이어졌다.
투콱-! 콰콰콰콱-!
몇 개의 창끝이 청랑의 몸에 적중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가죽을 뚫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오히려 놈을 더욱 화나게 했을 뿐이었다.
크르르릉-!
화난 맹수의 울부짖음은 이곳에서 나가면 모두 죽여버리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더는 흑산도의 산적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잠시 후면 지옥의 구덩이에서 악마가 기어 나올 터.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있을 때였다.
“모두 비켜!”
돌연 산적들의 뒤쪽에서 기의 폭풍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창을 사선으로 꼬나쥔 채 전광석화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눈처럼 흰 장삼을 입은 백발의 노인. 유가장의 가주인 유진산이었다.
그의 허리춤에 매어진 날카로운 태도 한 자루가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타앗-!
그의 신형이 지면을 박차고 삼 장을 떠올랐다.
양손으로 창을 고쳐잡자 창끝에서 붉은 기류가 솟구쳐 올랐다.
곧이어 한 마리의 매가 급강하를 하듯 구덩이를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구덩이 안에서 거센 폭음이 터져 나왔다.
안에서 숨 막히는 격돌음이 연달아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산적들도 지켜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노인이 당부했던 마지막 임무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덮어!”
그 순간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산적들이 움직임을 개시했다.
네 명이 한 조로 움직이는 그들의 어깨에는 기다란 통나무가 올려져 있었다.
곧이어 십수 개의 통나무가 길게 놓이며 구덩이의 입구를 틀어막아 버렸다.
쿵-! 쿠쿠쿵-!
아래에서는 벼락이 치듯 거센 폭음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유진산과 청랑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리라.
모두가 손에 땀을 쥐고 노인을 응원했다.
“어르신, 힘내세요!”
“이기실 수 있습니다!”
촤아악-! 콰직-!
뭔가에 베이고 차이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산적들은 마치 자신이 안에서 싸우는 것처럼 극도의 긴장을 느꼈다. 싸움의 승패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다경이 지난 후에서야 점차 소음이 사그라졌다.
산채에 침묵이 흘렀다. 그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채주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열어라.”
통나무를 걷어냄과 동시에, 모두가 구덩이로 몰려들었다.
산적들은 입을 떡하니 벌리고 금붕어처럼 뻐끔거렸다.
피투성이가 된 유진산이 태도에 몸을 지탱하며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옆으로 온몸이 난자되어 축 늘어진 청랑의 시신이 보였다.
그리고 창 한 자루가 놈의 복부에 꽂혀 반대편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이놈들아, 빨리 올려라. 힘들어 죽겠다.”
그 순간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환호성이 뿜어져 나왔다.
“우와아아!!”
“와아아아아!!”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어르신 최고예요!”
유진산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일평생 언제 이렇게 뜨거운 환호를 받아보았단 말인가. 젊었던 시절 강호를 출두할 때의 두근거림 같은 것이 느껴졌다.
십여 명의 산적들이 구덩이로 내려가 그가 올라서는 것을 도와주었다.
“운이 좋았던 거야, 이 녀석들아.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좁고 질퍽한 구덩이가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던 일이었다.
지상으로 올라온 그는 창에 몸을 기대며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체력이 모두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전각 안에서 풍호가 유설을 안고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아이를 건네받은 유진산은 그의 어깨를 한 번 토닥였다. 그러고는 말없이 등을 돌려 유유히 멀어져갔다.
장창을 움켜쥐고 절뚝거리며 산채를 빠져나가는 뒷모습엔 비장함이 느껴졌다.
산적들은 그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갈채를 보냈다.
“휴. 삭신이 쑤시는구나.”
약속된 부분을 이행했으니 더는 산채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손녀를 안고 거처로 돌아오자 온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운 그는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었다.
별빛을 머금은 듯 눈부시게 빛나는 푸른 구슬. 청랑의 몸속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보니 내단이 분명하구나.’
영물의 내단이라고 하여 무턱대고 복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로는 막대한 내공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부작용으로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즉사하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군다나 공덕을 쌓기는커녕 무수히 많은 악행을 쌓아온 영물이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후자일 가능성이 좀 더 높았다.
유진산은 자신의 목숨으로 모험을 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나에겐 쓸모가 없는 물건이니, 나중에 기회를 봐서 팔아버려야겠구나.’
손녀 유설이 옆에서 달라고 손을 휘젓고 있었다.
“안 된다, 얘야. 위험한 물건이니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으마.”
구슬을 다시 품속에 넣으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찾아온 뇌공환의 통증.
“끄윽…….”
모처럼 무리를 했기 때문일까? 평소와는 고통의 강도가 달랐다.
손녀가 머리맡에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유진산은 내단을 다시 품속으로 회수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은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힘을 잃고야 말았다.
털썩-!
콩알 같은 손녀의 발가락을 향해 데굴데굴 굴러가는 내단. 그것이 유진산이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목격한 장면이었다.
유진산의 몸이 축 늘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통이 점차 사그라질 때쯤 그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휴.”
그는 기절하기 직전의 상황을 더듬어보았다.
무엇인가가 생각난 듯 다급히 내단부터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도대체 어디 갔지?’
그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손녀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두 발로 우뚝 서서 큰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말을 옹알거리면서 말이다.
“마이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