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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5화 (5/238)

5화 여기부터 내 영역이야 (2)

유진산은 한동안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객잔 안에서 들려온 대화 내용. 그것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중립에 속하는 벽씨세가는 유가장보다 규모가 크고 일류고수들도 많았다.

그들이 같은 일을 당했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벽씨세가를 쥐도 새도 모르게 몰살시킬 수 있는 세력이 무림에 얼마나 있겠는가. 그리고 아기를 데려갔다니……?’

흉수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반면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의문은 더욱 짙어졌다.

마음 같아선 벽씨세가에 찾아가 흔적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위험했다.

‘굳이 지금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환골탈태를 이룰 때까진 몸을 사려야 했다.

유진산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주변에서 힐끗힐끗 쳐다보는 시선이 하나둘씩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죽립을 쓴 노인이 거대한 지팡이를 들고 아기를 등에 업고 있으니, 눈에 띄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마을을 벗어난 그는 계속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등 뒤의 손녀가 얌전히 있었기에 마음이 가벼웠다. 주변을 구경하는 것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아이가 깊은 잠에 빠져들고, 산속으로 한 시진을 달렸다.

장안성 인근의 양주산이었다.

그곳을 헤매던 중 우연히 뜻하지 않은 장소를 발견했다.

‘도대체 이런 곳에 누가 살았던 거지?’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지 십수 년쯤 되어 보이는 폐가였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아담한 집과 부엌. 마당에는 원두막과 우물까지도 있었다.

유진산은 기분이 좋아졌다.

내심 수도승이 버리고 간 사당이라도 찾길 원하고 있었지만, 이런 훌륭한 곳을 발견할 줄 어찌 예상했겠는가.

“허허. 이런 횡재가 있나.”

집 안에 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어보았다.

벽면에 장식용으로 고정된 칠현금 하나가 눈에 띄었다. 먼지 쌓인 집기류들도 상당수 남아있었다.

그때 비어있는 수납장 위에서 옥함 하나를 발견했다. 표면에 직접 그려 넣은 듯한 눈꽃은 마치 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열어보자 한 움큼의 침이 들어있었다.

‘비침(飛針)? 무림인이 살았던 곳이란 말인가?’

비침은 내공을 담지 못한다면 날릴 수가 없기에, 내가고수만이 다룰 수 있는 암기였다.

이곳에 머물렀던 자가 굉장한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현금과 비침이라…….’

조금 찜찜했지만, 이것저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때 등 뒤에서 손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응애.”

등 뒤로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등 뒤의 보자기를 풀었다.

“……쌌구나.”

능숙하게 아기의 담요를 교체한 그는 땔감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기 위함이었다.

모처럼 뜨끈한 물에 손녀와 함께 몸을 씻어내니 기분이 좋아졌다.

“하배!”

유설이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방긋 웃으며 손을 휘젓고 있었다.

“오냐, 아궁이에 불도 때었으니 오늘은 따듯하게 자보자.”

아궁이로 방을 데우는 것은 고구려라 불리었던 동방국가의 고유한 기술이다. 이후 중원으로 전파되어 일부 소수의 지역에서만 흉내를 내어 사용되고 있었다.

삶의 경험이 풍부한 유진산은 이것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횡재한 기분이었다.

가벼워진 몸으로 손녀와 함께 방에 드러누웠다.

이전에는 모닥불 옆에 쪼그리고 잤던 것이 고작이었다.

오랜만에 따끈한 바닥에 몸을 덥히니, 누적된 피로가 씻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이고 좋다. 아이고 시원해.”

저렸던 허리의 근육통이 금세 치유되는 듯했다.

유진산은 고개를 슬쩍 돌려보았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유설이 배시시 웃으면서 옹알거렸다.

“시언애.”

자기가 뭘 안다고 따라 한다는 말인가.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처럼 따듯한 곳에 누운 손녀는 금세 곯아떨어졌다.

‘내 평생 이런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게 될 줄이야.’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꼽으라면 지금이 빠질 수가 없을 것이다.

유진산도 몸이 점점 노곤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잠에 스르륵 빠져들었다.

정신없이 자던 그는 새벽이 되어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이렇게 편히 자본 것은 사건이 있던 날로부터 처음이었다.

좀 더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유설이의 아침을 준비해야 하지 않는가.

조용히 부엌에서 죽을 끓이다 보니 생각나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 며늘아기들, 고생이 많았겠구나.’

살림을 직접 해보니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식솔들에게 따듯한 말을 충분히 못 해준 게 못내 아쉬웠다.

두런두런 생각에 젖어 있다 보니 호박죽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손녀가 때맞춰 일어났다.

“응애!!!”

목소리의 세기로 봤을 때 밥 달라는 신호가 분명했다.

“다 됐어. 할배 금방 간다!”

그는 양손으로 밥상을 들고 후다닥 달려갔다.

죽을 보여주는 순간 아이의 울음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자, 따라 해 보아라. 배~고~파.”

“배오아.”

옹알거리는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유진산은 호 불어가며 작은 입에 조금씩 죽을 떠먹여 주었다.

행동을 반복하다 보니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아들놈들이 이 모습을 봤으면 까무러쳤겠군.’

가문의 최고 어르신으로 대우받았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렇게 옛 기억을 떠올리다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식솔들의 모습이 생각나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설이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손녀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할배 우는 거 아니다. 다 먹었어?”

숟가락을 가져다 대자 아이는 입을 닫고 고개를 휙 돌렸다.

배가 부른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남은 죽을 자신의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손녀를 보자기에 감싸 업고 밖으로 나섰다.

부엌에 딸린 작은 문을 열자 농기구들이 보였다.

쇠스랑과 낫을 챙기고는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에 보이는 무성한 잡초밭이 그의 시선을 이끌었다. 우물과 가까이 있어 땅이 비옥했기에 텃밭을 일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에 우리 설이 먹일 채소들을 심어야겠구나.”

말은 자신 있게 했지만, 걱정부터 앞섰다.

농사일은 많은 체력을 소모한다. 미리 근력을 키워두지 않았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푸우욱-! 푸우욱-!

쇠스랑이 지나갈 때마다 땅이 움푹 패며 잡초들이 뽑혀 나왔다.

땅을 고르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내공이 충만했기에 힘은 들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허리의 관절이 아프기 시작했다.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그 순간 등 뒤에서 유설이의 옹알거림이 반사적으로 들려왔다.

“아고 어리야.”

하는 말마다 따라서 내뱉고 있었다.

선음지체의 자질을 타고났기에 예상은 했지만, 영특하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앞으로 말할 때 조심해야겠군.’

유진산은 밭을 갈면서 콧노래를 불러줬다.

그러자 아기가 까르륵 웃는 게 등으로 느껴졌다.

양다리를 팔딱이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흥얼거리며 농사일에 매진했다.

텃밭을 꾸미고 씨앗을 뿌리기까진 닷새가 소요되었다.

그동안 두 번의 발작이 더 찾아왔지만, 유설이를 생각하며 버텨냈다.

날이 지날수록 폐가는 제법 그럴싸한 모습으로 변모해갔다.

같은 일상이 몇 차례 반복되고 어느새 그에게도 여유가 찾아왔다.

“오늘은 우리 손녀 고기 좀 고아 먹여야겠구나.”

아기가 잠든 틈을 타서 창을 움켜쥐고 나왔다.

산속을 헤집고 다니며 짐승들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러기를 한 식경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고라니의 변이로구나.’

배설물이 아직 굳어있지 않았으며, 약간의 열기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터.

최소한 잡지는 못하더라도 근처에서는 쫓아내야 했다.

일구어 놓은 텃밭에 침입한다면, 농작물을 파헤칠 우려가 있었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흔적을 찾으며 전진했다.

어금니로 긁어 벗겨낸 나뭇가지들. 고라니의 영역 표시가 분명했다.

그렇게 일각쯤을 헤맬 때쯤이었다.

돌연 유진산의 움직임이 정지해버렸다.

‘누구지? 이 산에 사람이 있었나?’

분명 누군가의 대화 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산이라 생각했건만,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기척을 죽인 채 그곳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이제는 고라니가 문제가 아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몰골들이 왜 그래?”

“말도 마. 겁만 주려고 했는데, 덤비는 바람에 개판났어.”

“상대가 어디였는데?”

“알고 보니 위강표국이었어.”

“무당파의 지원을 받는 표국이잖아? 그들한테 통행세를 받으려 했단 말이야?”

“나도 몰랐지. 깃발을 들고 있었는데, 내가 글씨를 읽을 줄 알아야지. 아무튼, 도사 두 놈이 껴있어서, 오늘 전부 뒈지는 줄 알았다.”

이들의 정체는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확실했다.

같은 산에 사는 이웃들이 하필이면 산적이라니.

숨어서 지켜보던 유진산은 머리가 지끈 아파졌다.

우선은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대화는 이십여 명의 산적 중 서열이 높은 두 명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좀 말해 봐.”

“다행히 지원 조가 제때 나타나서 이겼어. 쟁자수들은 전부 처치했고……. 도사 중 한 놈을 겨우 죽이긴 했는데, 우리도 절반이나 죽었어. 무당파의 이대제자였더라고.”

“…….”

“왜? 표정이 왜 그래?”

“무당파의 이대제자 중에 한 놈을 죽였다고……. 그럼 또 한 놈은 도망쳤다는 얘기네?”

“맞아. 실력이 보통이 아니야. 쫓아갔으면 우리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어.”

“후……. 역시 내가 같이 갔어야 했는데. 일 처리를 그따위로 하니까 매일 채주님한테 줘 터지는 거야.”

“무슨 개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목숨 걸고 표물을 탈취해왔는데 고생했다고는 못할망정?”

머리에 두건을 묶은 산적이 인상을 찡그리며 버럭댔다.

“이런 돌대가리 새끼야! 우린 이제 망했다고!”

“……왜?”

“휴. 일단 가서 얘기하자. 빨리 산채로 돌아가서 채주님께 알려야 해.”

산적들은 무리를 이루어 어딘가로 멀어져 갔다.

그들이 떠난 뒤 유진산은 혀를 끌끌 차며 이동했다.

“어디를 가나 멍청한 놈은 하나씩 있는 법이지.”

거대문파들은 후원금을 상납받고 규모가 작은 세력들을 지원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위강표국 또한 무당파의 지원을 받는 세력이었다. 이번 표행에 무당의 도사 두 명이 지원을 나선 모양이었다.

산적들은 어떠한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나머지 한 명도 죽여 입을 막았어야 했다.

무림맹의 주축을 이루는 거대 문파 무당.

그들이 이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앞으로가 문제겠군.’

머지않아 산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무림의 토벌대가 구성될 것이리라.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경험을 쌓게 하는 데 좋은 희생양들이었다.

불똥이 튀기지 않게 하려면, 산적들이 거처 근처로 오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재빨리 거처로 달려온 유진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유설이는 대자로 누워 평온히 자고 있었다. 입가로 침까지 흘리면서 말이다.

‘우선 이걸 사용하는 게 좋겠구나.’

그가 잡은 것은 여분으로 사 왔던 붉은색 아기 담요였다.

담요를 챙기고는 손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다행히도 피곤한지 깨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조심스럽게 나온 그는 깊은 산속으로 진입하며, 담요를 잘게 찢어냈다.

거처에서부터 이백여 장.

그곳에서부터 나뭇가지에 일정한 간격으로 붉은 천을 묶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이곳은 우리의 영역이다. 어느 놈이든 안으로 진입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손녀가 깨어나기 전에 일을 마쳐야 했기에 최대한 서둘렀다.

그리고 작업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갈 즈음, 어슬렁거리면서 다가오는 산적 무리가 있었다.

“채주님이 격노하셨어. 지금은 피해 있는 게 상책이야.”

“쯧쯧. 그럴 만도 하지. 병신같이 무당파를 건드려놔서.”

“근데 저건 뭐야? 못 보던 건데?”

나뭇가지에 묶인 붉은 천 쪼가리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때 먼 곳에서 유진산이 뒷짐을 지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인사부터 좀 하지. 이번에 이곳으로 새로 이사 온 사람일세.”

산적들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안쓰럽다는 표정마저 떠올라 있었다.

“자식들이 이곳에 버리고 갔나 본데?”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그러니 자식들도 감당하기 힘들었겠지.”

“어떻게 하지? 침입자를 그냥 보낼 수는 없잖아?”

“꼬라지를 보니 불쌍한 노인네니까 그냥 놔둬.”

둘은 뭔가를 속닥거리더니 유진산을 향해 다가갔다.

“할아버지, 이 산은 우리 흑산도가 주인이니 뒈지고 싶지 않으면 내려가소.”

“빨리 가시오. 마음이 다시 바뀔지도 모르니까.”

유진산도 양보할 수는 없었다.

그에겐 안정된 곳에서 손녀를 양육할 장소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곳보다 훌륭한 장소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허허헛. 산은 곧 자연이거늘, 주인이 어찌 따로 있단 말인가. 여하간 영역을 표시해놓았으니,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굳이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 채주한테도 가서 전해주시게.”

산적들은 한숨을 내쉬며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예, 그럼 가서 전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뭐.”

유진산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산적들의 전신에서 살기(殺氣)가 뿜어져 나왔다.

“이럴 줄 알았냐?”

“선을 넘었어, 미친 노인네. 기회를 주었거늘.”

두 자루의 박도가 서늘한 예기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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