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여기부터 내 영역이야 (1)
산속에 숨어 생활한 지도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지금 유진산은 상의를 탈의하고 몸을 풀고 있었다.
곧게 펴진 허리와 굴곡을 그리는 등 근육. 양팔과 어깨에는 잔근육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노인의 신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모습이었다.
준비를 마치자 그의 발이 지면을 박차고 떠올랐다.
타앗-!
양손으로 나뭇가지를 붙잡고 매달린 모습이 무척 안정적이었다.
잠시도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었다.
크게 호흡을 한 번 내쉰 그는 평소와 같이 운동을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기합성에 맞추어 그의 머리가 나뭇가지 위로 오르락내리락 반복했다.
양팔의 핏줄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단순히 운동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두뇌는 끊임없이 고뇌하고 있었다.
가문을 풍비박산 낸 천인공노할 놈들. 짐작대로 그 대상이 무림맹이라면 돌멩이로 바위를 때리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설령 바위가 아닌 산(山)이라 해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백만 번을 때려서라도 반드시 무너트려 주마.’
일각이 지난 뒤 그의 입에서 환희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백스물!”
기어코 목표치를 달성한 것이다. 내공의 힘이 아니라면 도달할 수 없는 숫자였다.
그는 다시 양다리를 올려 나뭇가지에 걸쳤다.
또다시 시작되는 복근운동이었다.
박쥐처럼 매달려 상체를 좌우로 흔들며 일으키기를 계속했다.
“하나-! 둘-! 셋-!”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어느덧 그의 입이 삼백을 외칠 때쯤이었다.
“응애.”
손녀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유를 먹일 시간이었다.
유진산은 지면으로 뛰어내리고는 손녀에게 달려갔다.
“일어났구나, 아가! 할배가 금방 밥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야밤에 금순이의 젖을 짜와서 끓여놓은 우유가 남아있었다.
얇은 죽통에 옮겨 담아 속 빈 풀잎을 하나 꽂아주었다.
밤톨 같은 손에 쥐여주면 알아서 잘 빨아먹을 터.
흐뭇한 미소로 죽통을 건넨 유진산은 손녀 옆에 앉아 무엇인가를 움켜쥐었다.
어젯밤에 먹다가 남은 토끼고기였다. 맛은 없었지만, 근육을 키우기 위해선 육류 섭취가 필수였다.
한입을 오물거리고 있을 즘이었다.
터억-!
유설이가 죽통을 내던진 소리였다.
“잘 먹어야 건강히 자라지? 어서 먹거라.”
다시 한번 건네려 했지만 잡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평소와는 달리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억지로 쥐여주려 하자 돌연 신경질적인 울음을 터트렸다.
“응애!!!”
아무래도 우유가 먹기 싫은 모양이었다.
“휴. 성질머리는 제 아비를 똑 닮았다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토끼고기를 앞으로 내밀어보았다. 그러자 언제 울었냐는 듯 배시시 웃는 것이 아닌가.
“헤~”
난감한 노릇이었다.
“이거 달라고? 이도 몇 개 없으면서 어떻게 먹으려고?”
쌀톨만 한 크기의 윗니와 아랫니, 네 개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토끼고기를 달라고 양팔을 계속 휘젓고 있었다.
“먹고 싶으면 할아버지라고 한 번 불러보거라. 할~아~버~지.”
그 순간 아기가 까르륵 웃으며 무엇인가 음성을 내뱉었다.
“하배!”
“뭐? 지금 뭐라고 했어?”
그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신선의 오감을 타고난 아이라 사고능력과 발달이 남다르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언어 습득을 시작했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때 또다시 손녀의 외침이 들려왔다.
“하배!”
유진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동안의 고생이 사르륵 녹는 듯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배라 불렀다는 것이다.
자신이 습관처럼 내뱉던 단어를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렴 어떠한가. 소매로 눈물을 닦고는 노구솥을 움켜쥐었다.
인근 마을의 밭에서 서리해온 당근과 호박이 있었다. 모처럼 죽을 끓여볼 생각이었다.
그는 재료를 모아 토끼고기와 함께 잘게 빻아 씻겨내고는 끓는 물에 푹 고았다.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우리 손녀~ 먹을 양식~ 맛있기도 하지요~.”
처음으로 먹이는 영양식이었으니 정성스레 준비했다.
모닥불에 올려진 노구솥 앞에 쪼그려 앉은 모습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도저히 죽음을 앞둔 황혼기의 노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걸쭉한 죽이 완성되자 간을 보기 위해 한 숟가락을 떠내었다. 그것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이었다.
돌연 유진산의 움직임이 갑자기 정지했다.
잠시 후 숟가락을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전신이 발작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끄으으악!!!”
처절한 비명이 산속을 메아리쳤다.
바닥에 쓰러진 유진산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또다시 찾아온 뇌공환의 고통이었다. 온몸의 마디마디가 끊어질 듯이 고통스러웠다.
“……끄윽.”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은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버텨야 한다! 내가 살아야 우리 유설이도 산다!’
이를 악다문 그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는 통증을 줄여주는 금엽초 한 잎을 겨우 입에 쑤셔 넣었다.
고통은 반시진이 지나고 나서야 서서히 사그라졌다.
온몸이 녹초가 된 그는 한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후…….”
한참 뒤에서야 겨우 일어선 그는 유설이의 영양식부터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사이 홀라당 타버리고 말라붙어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성질 같아선 노구솥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말끔히 씻어내고는 처음부터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재료는 충분했다.
“하배!”
재촉하는 것을 보니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오냐. 다 됐으니 어서 먹어보자꾸나.”
손녀는 어느새 큰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호호 불어서 숟가락을 가져다 대니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유진산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여본 죽이었다. 한입을 떠먹이자 손뼉을 부딪치며 까르륵거렸다.
신이 난 유진산은 영양죽을 식혀가며 계속 떠먹였다.
그러길 반각이 지났을 때였다.
그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 모습이 무서웠는지 유설이도 울음을 토해냈다.
“응애! 응애!”
아기를 달래고 있을 틈이 없었다.
기어코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한편으로는 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담요를 아기에게 덮어주고는 구석에 세워두었던 장창을 움켜쥐었다.
‘분명히 느꼈거늘……. 설마 살수란 말인가?’
주변 어디선가 미세하게 감지된 한 가닥의 옅은 살기(殺氣). 그것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고요하기만 했다.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 처치하지 못한다면 굉장히 곤란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헛. 살수치고는 햇병아리로구나. 이미 숨는 것을 다 봤거늘, 거기서 그렇게 쭈그리고 있는 모양새가 꼭 쥐새끼 같구만.”
그는 창의 손잡이 부분을 바닥에 꽂고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왼손으로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태연히 말했다.
“가만 보자. 은신도 어설프고……. 힘없는 노인이 두려워 숨어서 떨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삼급살수인 모양이로구나.”
말과는 달리 굉장한 수준의 은신이었다.
실상 살수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조차 짐작이 안 되었다.
이급살수 정도라면 자신이 위치를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을 터. 운이 좋지 않았다면 미세한 살기조차 발견하지 못했을 일급살수였다.
‘반드시 일격에 끝내야 한다.’
만약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이 정도는 가볍게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섬서의 제일 창잡이로 손꼽혔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가문의 그 누구도 자신의 전성기에 비교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체력은 조금이나마 키웠지만, 몸이 유연하지 못하니 싸움이 길어지게 되면 불리한 상황이었다.
속마음과는 달리 유진산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우쭈쭈! 우리 아가 무서웠어? 겁많은 삼류 녀석이니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할아버지하고 같이 저 불쌍한 아저씨랑 놀아줄까? 저쪽을 보고 따라 해 보아라. 우쭈쭈!”
그때 손녀 유설이 까르륵 웃으며 양손을 부딪쳤다.
“으주주.”
자제력이 강한 살수조차 이성을 잃게 만드는 엄청난 도발이었다.
이들의 비웃음은 어딘가에 숨어있는 살수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돌연 삼 장 근처의 나무 위에서 매서운 살기가 휘몰아쳐 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움직임을 개시한 것이다.
한 마리의 매처럼 다가오는 쏜살같은 움직임.
동시에 유진산의 입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걸려들었다, 이놈!’
그의 왼손은 아기를 덮고 있던 담요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가오는 그림자를 향해 재빨리 던졌다.
파앗-!
활짝 펼쳐진 담요는 살수의 시야를 일순간 차단했다.
서늘한 빛줄기가 번뜩이며 담요를 좌우로 갈라내기 시작했다.
부아악-!
찰나의 순간, 찢어지는 담요의 틈새로 서늘한 창기(槍氣)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가창법 제일초식 추일극섬(追一極閃).
섬전 같은 속도로 전면의 적을 꿰뚫는 쾌창의 초식이었다.
쏴아아앙-!
창끝이 공기를 갈라내며 회오리를 일으켰다.
동시에 한줄기 빛살이 다가오는 그림자의 전면을 단번에 꿰뚫어 버렸다.
푸우우욱-!
“크헉!”
얼굴을 가린 흑의인이 창 자루에 꼬치처럼 꿰어져 있었다.
그것을 한 손으로 지탱하던 유진산은 창을 한 번 흔들어 털어내었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살수는 온몸이 축 늘어지고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 어서 고하거라!”
“…….”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외쳐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죽어가는 살수는 그저 흐릿한 눈으로 하늘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유진산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의 일급살수는 어떠한 고문을 해도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쪼그려 앉아 전리품을 찾아보았다.
놈이 지니고 있던 작은 태도(太刀)는 꽤 쓸 만해 보였다.
이윽고 품속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던 그는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허허! 횡재로구나!”
무려 은자 두 냥이 나왔다.
은자 한 냥이면 한 가정이 석 달은 생활할 수 있는 돈이다. 굉장한 수확이었다.
다른 곳을 뒤져보았지만, 더는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다.
“이렇게 깔끔한 녀석이 어디 또 있을까.”
유진산은 투덜대면서도 살수의 흑의를 벗겨냈다. 무엇 하나 그냥 버릴 것이 없었다.
새로 얻은 천으로 가보인 화룡신창을 둘둘 말았다.
날카로운 창은 거대한 지팡이로 탈바꿈되었다.
더는 이곳에 머무를 수가 없었기에 떠날 채비를 해야 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갈 곳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살수가 이곳까지 찾아왔을 정도면, 지인들에게 접근하는 것도 위험했다.
그러나 어디든 속히 움직여야 했다.
살수가 복귀하지 않는다면 더욱 큰 암흑이 다가올 터.
“응애.”
손녀가 안아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좀 더 나은 곳을 찾아보자꾸나.”
그의 발걸음은 북쪽을 향해 정처 없이 나아갔다.
산길을 넘고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이동했다.
경공과 휴식을 반복하기를 반나절이 지났다. 지쳐갈 때쯤 시야에 마을 하나가 보였다.
‘어차피 한 번은 들러야겠지.’
깊은 곳에 은거하기 위해선 비축 식량과 옷가지 등이 필요했다. 그리고 손녀의 육아에 필요한 물품들도 말이다.
유진산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마을의 중심가였다.
노점상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어이쿠 어르신, 손녀랑 산책 나오셨나 봅니다. 아기가 너무 예쁘네요.”
잡화상점의 주인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묵묵히 다가간 그는 죽립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이거 하나 주시게.”
우선 죽립을 깊게 눌러 얼굴부터 가렸다. 이후 자루에 필요한 물품을 쓸어 담고는 계산을 마쳤다.
근처를 돌며 눈에 띄는 식재료까지 쓸어 담았다.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최단 시간 내에 목적을 달성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것은 없다.’
결심과는 달리 얼마 가지 못해 그의 발걸음이 멈춰 세워졌다.
어느 객잔의 코앞이었다. 안에서 손님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벽씨세가가 습격을 받아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도대체 어떤 미친놈들한테?”
“난들 어찌 알겠나. 하루아침에 세가의 모두가 싹 다 죽어서 발견되었대. 한 명만 빼고 말이지.”
“한 명이라니? 누구?”
“아기의 시체가 안 보인대. 아무래도 흉수들이 데려간 것 같아.”
“이런 천하에 죽일 놈들이 있나. 그러고 보니 진양현의 유가장도 당했잖아. 같은 놈들의 소행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