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73화 (273/275)

제273화

에키온의 손에 죽은 게 아니라면, 다음 생에 그녀를 기억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칼립소의 몸이 얼어붙어 갔다.

황태자가 만든 역장은 여전히 건재하여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칼립소 자신의 능력에 휘말리는 사람은 스스로 말고는 없길 바랐으니.

“이럴 수는 없어, 아악, 아아아악!”

칼립소가 낄낄 웃었다.

“그렇게 소리 질러 봐. 난 네가 죽을 때까지 네 입만은 얼리지 않을 테니.”

칼립소의 몸도 갈수록 얼어붙어 갔다. 칼립소는 확신했다. 이놈이 먼저 죽고, 살짝 늦게 자신도 죽을 거라고.

그 순간이었다.

콰앙!

“뭐야, 이 새끼들 여기도 징그럽게도 많네. 거기 형님, 서쪽이나 맡으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립소는 감기기 시작한 눈을 옆으로 돌렸다.

아틀란이 보였다.

‘에키온 쪽, 일이 잘 끝났나…….’

어떤 전투를 한 것인지 모르지만, 지독히도 치열했던 듯했다.

함께 나타난 벨루스도, 리리벨도, 하우저에게 부축당한 채 나타난 레바이도 모두가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이 홀의 전투에 끼어들었다.

벨루스가 아스엘을 상대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칼립소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겼네.’

3회차에서 전투는 칼립소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기가 달라졌다.

하지만 이번 생엔 칼립소가 참여하지 않아도 다들 잘해 주었다.

칼립소는 못내 억울했다.

이미 써 버린 힘은 돌이킬 수 없었고, 황태자는 더는 말조차 잇지 못하고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칼립소를 노려보았다.

“어쩔 수 없네. 너는 나랑 같이 죽자.”

“너……. 내가, 다음 생에는…… 커헉.”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패배하는 건 너고 이 새끼야.”

공멸이 코앞이었다. 황태자가 먼저 털썩 쓰러졌다.

칼립소는 다리가 얼어붙은 탓에 쓰러지지조차 못했다.

쾅! 쾅! 역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틀란이 거칠게 욕하며 소리 지르는 것 같았다.

“……귀 아파, 인마.”

칼립소가 눈을 깜빡였다. 황태자는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칼립소의 귀에는 점차 느려지는 놈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춥다.’

역장 밖에는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있는데. 왜 갈 수가 없을까.

서울 거리를 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그때보다 더욱 큰 서러움과 억울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칼립소는 한편으로 만족했다. 자신이 나서지 않았다면 분명 다 같이 죽었을 것이기에.

지난 생엔 모두의 희생으로 살았으니, 이번 생엔 나 하나만 희생하면 되는 건가?

그 순간이었다.

“칼립소.”

어깨로 따뜻함이 느껴졌다.

“……더는 죽지 마.”

그 한마디에 칼립소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 냈다.

“……에키온.”

저기 쓰러진 짝퉁 용이 아니라, 그녀의 용이 도착했다. 칼립소는 목까지 얼어붙어 고개마저 돌리지 못했다.

그런 칼립소를 안다는 듯, 커다란 품이 그녀를 안았다.

“칼립소의 죽음은, 한 번이라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사실 나도 그래. 나도 내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적은 없었어.

나는 왜 회귀했던 걸까?

나는 왜…….

“내가 회귀했던 이유, 알고 싶었어…….”

칼립소가 부서질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살고, 싶어.”

에키온은 죽어 가는 제 반려를 보았다. 아주 오래전 용이란 존재는 수인들의 기원 속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시공간을 지배하는 힘을 부여받아, 무수히 많은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 힘이 약해져 수인과 다름없어질 때까지.

“칼립소의 소원, 들어주고 싶어.”

그럼에도 용에게는 기원을 들어주는 힘이 남아 있었다.

에키온은 칼립소가 부담했어야 했을 대가를 함께 나눠지는 것으로, 칼립소를 살릴 수 있었다.

오직 에키온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칼립소의 얼어붙은 몸이 조금씩 움직이는 동안 에키온의 몸이 얼어붙었다.

“……하, 너도 함께 얼어붙으면 어떡해.”

칼립소가 울 듯이 웃었다.

“괜찮아.”

에키온은, 칼립소를 통해 세상을 배운 용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알았다.

“모두가 우릴 구해 줄 테니까.”

수인은,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무책임하네.”

칼립소가 작게 웃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자신을 덮쳤던 억울함과 두려움, 공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꽃이 피었다.

이제는 행복해질 거라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꽃이.

“우리가 함께 이긴 거네.”

챙강!

역장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어붙은 몸이 녹아 쓰러지는 칼립소를 누군가 받아 냈다.

“칼립소…….”

사랑하는 가족이자, 아빠였다.

칼립소는 피에르의 눈물을 보았다. 엉망이 된 몸과 얼굴 또한.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아빠를 보며 칼립소가 방긋 웃었다.

처음 만난 어린 시절처럼.

“아빠, 우리 이제 집으로 갈까?”

피에르가 울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래. 가자꾸나.”

칼립소는 마침내 승리했다.

동시에 자신을 붙잡고 있던 사슬이 자신을 놓아주는 것을 느꼈다.

잘은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아아.

이제 그녀는 회귀하지 않을 것이다.

* * *

하아하아.

황태자 케일은 희미해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케일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한때 가장 고고하고 우월하며 위대한 황족이었던 자신을 말이다!

오히려 지나가며 침을 뱉거나 욕설을 퍼붓는 수인은 있었다.

이가 갈렸지만 더는 이를 갈 수 없었다. 귀와 눈을 제외하고 모두 얼어붙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심장이 멈추면 죽을 것이다. 몇 분이나 남았을까. 3분쯤?

케일은 억울했다. 왜 다시 패배했는가?

회귀하면, 그렇게 되면…….

‘잠깐.’

자신은 정말 회귀한 게 맞는 걸까? 어느 날 갑자기 전생이 떠올랐다. 그런데, 만약 다음 생에선 떠오르지 않는다면…….

자신을 비웃던 칼립소 아콰시아델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대체 왜! 나는 승리하지 못하는 건데. 왜!

대체 그는 무엇을 위해 칼립소 아콰시아델을 이기려 하는가.

처음 그의 목표는 무엇이었지?

죽음을 앞두고 삶을 돌아보는 순간, 황태자의 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료가 필요하신 분! 제가 해 드릴게요! 이쪽이에요!”

가냘픈 음성. 익숙했다. 치료 능력을 가진 다람쥐 수인, 릴리였다.

황태자는 이 소란스러움 속에서 어째서 릴리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린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 순간이었다.

“저는 황태자님이 제일 좋아요. 아빠보다 더요……!”

눈앞으로 성인이 된 릴리가 활짝 웃는 장면이 떠올랐다.

장소는 황실 정원이었다.

주마등인 것인가? 하지만 황태자는 알지 못하는 장면이었다.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저 여자가 제 앞에서 이리도 활짝 웃은 적은 없었기에.

칼립소가 있다면 알아차렸을 이 장면은 ‘원작’이자, 그들이 언젠가 거쳐 온 한 시간선이었다.

그 시간에서 황태자는 릴리를 순수하게 사랑했다.

아끼고 지키려 했다. 그 마음이 때로 지나쳐 집착이 되어도, 릴리는 유순하게 웃었다.

황태자는 손을 뻗고 싶었지만. 그 손은 얼어붙어 죽어 버린 지 오래였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언제부터 잘못되었던가.

“시, 싫어요! 싫어! 실험 싫어!”

왜, 사랑하던 사람을 괴롭혔지?

우습게도 그는 모든 시간에서 비열한 악당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 악당이 되지 않았던 한때가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간임을 알게 되자.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악어의 눈물이었다.

그는 이것이 에키온이 제게 내린 형벌임을 알지 못한 채 죽음 앞에서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간을 마주하며 속으로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

몸이 얼어붙어 눈동자만 미친 듯이 움직이는 황태자의 앞으로 릴리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가 조금 전까지 보던 훌쩍 자란 릴리의 모습이었다.

“죽어 버려.”

릴리가 깊은 증오를 품고 그를 노려보았다.

“환생조차 하지 않았으면.”

릴리는 다신 보지 말자는 의미로 한 말이었지만, 지나간 생을 보았던 황태자에겐 다시 없을 비수로 꽂혔다.

그렇게 황태자는 마지막을 맞이했다. 초라하고 비참하게.

다시는 다음 생이 없을 마지막 죽음을.

“저 새끼, 죽게 두지 마.”

아니, 그건 착각이었다.

황태자는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릴리와 웨일 두 치료사는 기어이 그를 살려 냈으므로.

수많은 수인을 죽인 자에게 평화로운 죽음 따위 사치였다.

그는 앞으로 능력과 신체 일부가 거세된 채 남은 생을 제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며 살 것이다.

그가 죽인 수인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가족의 손에서.

* * *

“야!”

“가주님……!”

칼립소는 피에르의 품에 안긴 채로 모두와 마주했다.

다들 무사했구나……. 칼립소의 눈이 연신 모두를 훑었다.

지독하게 다친 놈은 있어도 죽은 이는 없었다. 어디 하나 눈에 안 보이는 이가 없다는 것에 만족했다.

칼립소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안 죽었네?”

“너는, 지금 그딴 상태로 그런 말이 나와……?!”

칼립소의 온몸은 동상으로 엉망이었다.

이 부상의 의미를 아는 웨일이 제일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괜찮아. 다 치료해 줄 거잖아.”

“내가, 내가 할래요!”

그때였다. 커다란 수인들의 사이를 헤치고 누군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태양을 닮은 예쁜 주황빛 머리카락이었다.

칼립소가 알기로 이 머리 색을 한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릴리였다.

“언니, 내가 치료할 거야!”

릴리는 울먹이는 얼굴로 외쳤다. 어째서 여기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지만.

이제는 더는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릴리, 나보다는 한 사람을 먼저 봐줄래?”

칼립소는 비틀거리며 서 있는 한 남자를 응시했다. 에키온이었다.

“에키온을 먼저 치료해 줘.”

“누가 먼저랄 것 없다. 같이 받도록.”

피에르가 말을 끊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들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는 얼굴. 하나같이 잔소리들을 가득 품은 듯한 표정에 칼립소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고개를 들면 새파랗게 푸르른 하늘이 보였다.

눈부실 만큼 푸르른 하늘은 바다를 떠올리게 했다.

3회차, 그녀가 죽던 날에도 이런 날씨였으나.

이번 생은 달랐다.

“아아, 기분 좋은 하루야.”

그래, 달라진 엔딩만큼, 이어지는 이야기도 달라질 것이다.

귓가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아마도 처절한 끝을 맞이했던 지난 생의 자신은 아닐까.

칼립소는 다가오는 행복을 기다리며 밝게 웃었다.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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