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2화
그때였다. 황태자의 홍채가 기이한 색으로 변했다. 한 가지 색이 아니었다.
붉었다가, 푸르러졌으며, 녹색이 되었다가 금색이 되었다.
조각 같은 얼굴과 어우러져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듯 기괴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얼굴로 묘한 무늬가 떠올랐다. 흡사 뱀이나 도마뱀 같은 파충류의 비늘처럼 보였다.
게다가 무언가 황태자의 이마를 뚫고서 나왔다. 뿔이었다.
‘……용?’
칼립소는 용의 성에서 용을 형상화한 그림도, 조각상도 본 적 있었다.
거기 나온 뿔과 똑같이 생긴 형태였다. 황태자는 갑갑한지 제 목을 벅벅 긁으며 단추를 풀어 헤치려 했다.
‘변신 시간 같은 걸 기다려 줄까 보다!’
칼립소는 주인공의 변신을 얌전히 기다려 주는 아동물 만화 악당 따위 될 생각이 없었다.
콰앙!
칼립소의 주먹이 황태자에게 날아가는 찰나 황태자가 주먹을 꾹 쥐었다.
양 주먹끼리 부딪치며 만든 파동이 주변 사람을 날려 버릴 만큼 강력했다.
칼립소의 눈이 부릅 뜨였다. 황태자는 그 모습을 보며 통쾌함을 느꼈다.
“하, 하하……! 너만 강해질 줄 알았어?”
두 사람의 주먹이 각기 다른 힘을 품고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아니지, 아니지.”
황태자는 미친 사람처럼 실실 웃음을 흘렸다. 약이라도 한 것처럼 정신을 놓아 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칼립소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이번 생에도 네가 졌어. 이건 네 발악일 뿐.”
“아하하, 그래, 칼립소 아콰시아델. 그렇게 보이지? 하지만 아냐. 아니라고!”
“뭐?”
“여기 있는 모두가 죽고, 내가 회귀하면 내 승리지. 응?”
“멍청한 게 꼭 저 같은 소리나 하지.”
칼립소의 얼굴로 새파란 비웃음이 어렸다.
“그래, 네 새낀 죽을 때까지 그런 착각이나 하고 살아.”
칼립소의 손에서 물의 힘이 폭발하며 그를 밀어냈다.
칼립소는 비틀거리는 그의 가슴을 흘끗 응시했다.
갑자기 옷을 찢을 듯 풀어 헤친 탓에 그의 가슴이 고스란히 보였고, 가슴 위로 무언가 박혀 있었다.
돌인가? 아니면 보석인가?
붉은색 돌은 심장 자리에서 심장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돌 주변으로 혈관이 도드라졌고, 새카만 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칼립소가 불길한 느낌이 드는 저 돌에 집중하려는 찰나.
황태자에게서 비약적인 힘이 느껴졌다.
‘아차……!’
칼립소가 주먹을 맞고 뒤로 날아가 벽에 박혔다.
콰앙!
옥좌가 있던 자리는 칼립소와 부딪쳐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칼립소는 그 사이에서 벌떡 일어나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았다.
‘주먹을 부딪쳤던 때보다 세 배 정도 강한 힘이다……. 이런 힘을 내는 게 가능한가?’
분명 가슴에 박힌 저 돌이 더욱 세차게 뛰면서부터였다.
게다가 저 돌에서 느껴지는 힘이 어딘가 익숙한 걸 보면, 용의 힘이 틀림없었다.
“아, 결국 네가 생각한 게 이거냐? 네 힘으로 안 될 것 같으니 용의 시체 조각이라도 박아 넣자?”
“하하. 덕분에 네가 쓰러지는 꼴도 보고 아주 통쾌해!”
황태자가 주먹을 쥐었다.
“용의 힘은 시간을 넘나들 수 있지, 왜 전생엔 생각을 못 했을까? 그래……! 위대한 나를 회귀시킨 건 다 세상이 나를 선택했다는 이유지. 이번 생은 착오가 있었지만.”
다음 생에서는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황태자의 얼굴이 환희로 빛났다.
칼립소가 피 섞인 침을 뱉어 내며 손을 휘저었다.
물이 여러 줄기로 나뉘고, 황태자는 물로 만든 새장에 가둬졌다.
“쯧, 열등감 쩌는 새끼. 넌 그 힘 가지고도 절대 과거로 못 돌아가.”
회귀자의 무게도 모르는 새끼가 과거로 돌아가?
어림도 없는 얘기다.
한편으로 칼립소는 작은 불안을 느꼈다. 놈의 말처럼 용의 힘은 시공간을 다루는 것.
만약 저놈이 기어이 그 힘을 다루는 방법을 알아낸 거라면…….
황태자가 새장의 창살을 붙잡았다. 전류가 흐르고 있었으므로, 그의 손이 까맣게 타들어 갔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하하, 칼립소 아콰시아델. 내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
“바로 시공간을 다루는 힘을, 실험해 보다가 죽었지.”
황태자가 양손을 활짝 펼쳤다.
터져 나온 붉은색 힘과 흙벽이 칼립소의 새장을 부서트렸다.
이렇게 될 줄 예상한 칼립소의 물줄기가 거대한 기둥이 되어 그를 후려쳤지만, 그는 그럼에도 웃고 있었다.
“그 숭고한 희생 덕택에 나는 과거로 돌아가는 거야. 이 모든 이들을 죽이고!”
동시에 검은 혈관이 황태자의 얼굴까지 도드라졌다.
그는 더 이상 이전의 사자 수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흰자가 검게 물들어 버린 모습이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괴물 같았다.
“하하하, 아무도 못 막아! 내가 10년 동안, 그 이상을 준비한 거야. 아무도 막지 못해!”
이와 별개로 힘은 칼립소가 처음 느낀 것보다 수십 배로 강해졌다.
칼립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헛소리 집어치워!”
물로 만든 거대한 소용돌이가 황태자를 가격하고, 무기를 쥐고 돌진했지만 어떠한 역장에 가로막혔다.
“이번에도-.”
황태자의 온몸에서 붉은 스파크가 튀었다. 과부하에 걸린 기기처럼 황태자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다 같이 죽자고, 칼립소 아콰시아델!”
칼립소가 처음으로 얼어붙었다.
저걸 나 혼자 막을 수 있는가?
‘막을 순 있겠지만, 이곳이 엉망이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황태자에게서 더욱 큰 힘이 흘러나왔다.
여기서 더 커진다고?
그녀가 경악했다.
아빠와 함께라면?
데바나와 겨루고 있을 피에르를 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고개를 돌리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못 막아.’
하지만 그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안 되면 되게 해야지.’
분명하다. 저 힘이 그대로 밖으로 터져 나오면 이번에도 다 같이 죽는다.
아니, 여기 황실 인원만 죽을까.
여기서 못 막으면, 이번에도 다 같이 멸망하는 거다.
3회차에선 용 공작의 폭주였다면, 이번엔 용의 힘을 억지로 심은 저 사자 새끼의 폭주로.
칼립소가 이를 꽉 물었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각오는 되었다.
‘나 참. 세상 참 모르는 일이라니까.’
칼립소는 늘 고민을 오래 하지 않았다.
빠른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죽는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번 생에선 어떤 위기가 있든 간에 새로운 동료들과 가족들과.
그리고 에키온과 천재로 불린 아빠랑 함께라면 뭐든 이겨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X. 에키온이 막 폭주했을 때보다 더한 힘이네.’
칼립소는 3회차, 세상이 멸망하던 순간을 망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알아차렸다.
저 미친놈이 기어이 방법을 찾아 용의 폭주에 몇 배에 달하는 힘을 제 몸에 욱여넣어 숨기고 있었음을.
그러나 어쩌겠나.
어쩌면 칼립소 자신이 3회차보다 더욱 강해진 이유는 여기 있는 걸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것이다.
그녀가 느끼기에 세상 모든 일엔 이유가 있는 듯했으니까.
‘세상엔 공짜 없다니까?’
칼립소가 쯧 혀를 차며, 고요하게 힘을 끌어올렸다.
전투를 이어 가던 피에르가 고개를 돌렸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당장 가려 했지만, 가로막혔다.
그가 상대하던 데바나가 피투성이가 된 채 그를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못 간다.”
죽음을 각오한 얼굴이었다.
데바나는 다음 생에는 릴리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한 황태자의 약조를 믿었다.
황실의 더럽고 혐오스러운 일들을 대신 처리했으나 그에게도 신념 따위는 있었기에.
데바나가 마지막 생명을 다해 피에르를 붙드는 사이, 칼립소는 온몸의 힘을 폭발시키며 황태자에게 달려들었다.
-칼립소! 멈춰!
에키온이 여기 있다면 달랐을까? 아니, 모르겠다. 에키온 일행이 늦는 건 분명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일 테니.
여기 온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상태일 가능성은 낮았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스스로밖에 없었다. 3회차에서처럼.
-생명이 위험해!
‘괜찮아.’
나도 알고 있거든. 칼립소는 중얼거리며 한 손으로 투스를 손에 쥐었다.
“미안. 도와줘서 고마웠어.”
칼립소가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우리, 또 보자.”
칼립소 자신마저 무슨 의미로 한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저놈을 어떻게든 해치우고 만나자는 건지.
아니면…….
이 말을 끝으로 칼립소는 투스를 저 멀리로 던졌다.
아군을 향해 날아가도록 물의 힘을 썼으니, 안전하게 착지하리라.
그리고 그대로 황태자가 제 몸을 감싼 역장에 몸통을 부딪쳤다.
쿠웅!
칼립소가 온 힘을 다하자, 그녀는 황태자가 펼친 역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황태자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제는 이성마저 거의 잃은 듯한 얼굴이었다.
“뭐야, 뭔데. 여기까지 날 쫓아왔어?”
“오냐. 내가 생애 이런 집착은 처음 해 보네. 기분 좋지?”
“…….”
“그러니까, 뒤져.”
칼립소는 제 손에 가장 익숙한 무기를 쥐었다.
무기는 황태자에게 닿은 순간 챙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괜찮았다.
이리될 것을 알았으니까.
칼립소는 주먹에 힘을 집중했다. 그녀가 뻗은 주먹은 황태자의 손에 그대로 잡혔다.
“너도 알 텐데? 내가 가진 용의 힘이 제대로 발동했다. 이제, 네 힘은 통하지 않아.”
“아아. 네가 폭주시킨 에키온이 그랬던 것처럼?”
칼립소는 주먹이 붙잡혔음에도 전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참 웃기지도 않아.”
“……뭐?”
“왜 비장의 수는 너만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너 같은 악당의 머릿속은 다 비슷한가?”
“…….”
“이기적이고, 저열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자 새끼야.”
황태자는 칼립소의 주먹이 지나치게 차갑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세상에는, 네가 모르는 일들이 더 많단다.”
칼립소는 3회차 용의 폭주를 막기 위해 뭐든 해 보려 했다.
마지막까지 처절한 발악을 한 뒤에 죽음을 맞이했다는 거다.
물의 힘은 정말이지 사용법이 무궁했다. 물과 바다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힘.
지금처럼 저놈의 손을 얼려 버리는 것도 말이다.
“내가 하나 깨달았는데, 진짜 용은 더럽게 튼튼해.”
“……뭐, 뭐야, 이게!”
“그래서 몸도 도통 얼지 않더라고. 심장도, 장기도.”
황태자의 비장의 한 수는 언제나 자기가 죽음에 이르거나 다 같이 죽자고 덤벼들 때 선보여졌다.
그리고 칼립소의 비장의 한 수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참 고마워. 네가 어설프게 반쪽짜리 용이 됐다고 외쳐서 알게 됐거든.”
“아악, 놔, 놔! 놓으라고!”
“네 육체는 아직 피가 돌고, 살갗이 무른 사자의 것이네?”
“으아, 아아아악!”
처음부터 왜 쓰지 않았느냐.
당연했다. 칼립소는 이번 생엔 모두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녀에게도 ‘다음’이 있는 생을 보고 싶었다. 늙어 죽는 게 꿈이었다.
“너는 어떤 경우에도 쓰고 싶지 않았던 걸 쓰게 만들었어.”
“내, 내 몸, 아, 아아, 아아악!”
“그 대가는 네 죽음이야.”
이리 말하는 칼립소의 목소리는 꾸준히 느려졌다. 그럴 수밖에.
황태자의 몸을 얼어붙게 만들며, 칼립소의 몸도 함께 얼어붙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회차, 죽음을 앞두고 용 공작을 바라볼 때도 이러했다.
서울 거리가 눈앞에 보였지만 움직이지 못했던 이유.
제 몸이 얼어붙었기 때문이었다.
“회귀? 꿈도 꾸지 마.”
칼립소의 최종 능력은 칼립소 자신도 잡아먹었다. 다신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능력이었다.
하지만 어떡하나? 모두가 죽는 꼴은 다신 보고 싶지 않으니.
“네가 설사 정말 회귀한다고 해도.”
내가 나서는 수밖에.
칼립소가 히죽 웃었다.
“너는 그 시간대의 나에게 패배할 테니까.”
이렇게 된 건 유감스러웠지만. 생각해 보면 이놈의 마지막 발악이 이렇게 멈추는 꼴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
“아, 아아. 안 돼. 안 돼……!”
칼립소는 놈의 심장이 얼어붙어 가는 걸 느꼈다.
역시, 힘을 쓰는 덴 성공해도 육체까지 용이 되긴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네게 다음 생 같은 건 없어.”
회귀자는 나지, 네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