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1화
작전은 실패하지 않았고, 나는 죽지 않을 거야.
“내 상처는, 쿨럭, 걱정하지 마……. 흰수염고래 수인은 쉽게, 죽지 않아.”
“헛소리하지 말고 눈떠.”
칼립소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웨일이 힘없이 미소했다.
“눈, 뜨면. 그럼 나도 받아 주나?”
“알았어, 알았으니까, 눈떠! 네 얼굴이 새카매지고 있는 것도 모르면서!”
“아……. 어쩐지. 머리가 아프더라.”
“웃기지 마. 여기까지 와서 누가 죽어? 죽으면 절대 용서 안 해.”
칼립소는 웨일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3회차의 수많은 죽음을 갑자기 떠올린 탓에 어지러웠을 뿐이다.
“맞아요. 당신이 죽으면 곤란하답니다, 치료사님.”
칼립소의 말을 누군가 받았다. 뱀들의 수장 나타샤였다.
“중독이에요. 가능해요?”
“어머나, 가능하지 않으면 안 될 표정을 하시고서.”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 없어. 대답하세요.”
“……가능해요. 걱정 말아요.”
나타샤가 웨일 옆에 앉았다.
“자, 치료사님. 우리 아이들이 신세 진 걸 갚을 차례네요? 나는 세상 모든 독을 아는 사람이랍니다.”
“쿨럭…….”
“그렇지. 눈 감으면 안 돼요?”
칼립소는 웨일을 달래는 나타샤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저벅저벅 걸었다.
엉망이 된 이들. 쓰러진 이들. 부상당한 이들.
그리고 죽은 이들…….
아군들 사이를 묵묵히 걸었다.
그 사이에서 다나와 암필라도 발견했다. 칼립소는 그들 또한 무심히 지나갔다.
칼립소가 펼친 방어막은 단단했다. 데바나와 아스엘이 공격하는데도 부서지지 않았으니까.
투스까지 합류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총량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남 일인 양 구경하던 황태자가 어느새 방어막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일 터다.
“참, 강해.”
황태자 케일이 입매를 비틀었다.
“천한 태생에도 불구하고 탐이 날 만큼 말이야, 칼립소.”
칼립소가 걸음을 멈췄다.
칼립소는 무표정한 얼굴로 황태자를 주시했다. 그의 입매가 더욱 흉하게 비틀어질 때까지.
“내가 이걸 부수지 못할 것 같…….”
칼립소가 손을 들어 올렸다.
거대한 힘이 움직였다. 황태자가 말을 하다 말고 멈추고 올려다볼 만큼.
칼립소가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면.
그녀는 지난 생보다 더욱 강해졌다는 것이었다.
강해진 힘으로 이런 것이 가능할 정도로.
콰아앙!
고막을 터트릴 작정인지, 굉음이 홀을 지배했다.
파스스스. 하늘에서 먼지가 마치 진눈깨비처럼 흘러내렸다.
쾅, 콰앙! 맹수들은 떨어지는 천장 조각에 혼비백산했다.
오직 황태자와 데바나, 아스엘만이 움직이지 않은 채 칼립소를 쳐다볼 뿐이었다.
멀쩡하진 않았다.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하, 하늘이……!”
적군의 누군가 아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뻥 뚫린 밤하늘이 보였다.
천장을 날려 버린 칼립소가 입 끝을 올려 웃었다.
“진작 이럴 걸 그랬지.”
3회차, 황태자가 마지막까지 숨긴 멸망의 한 수.
용 공작을 폭주시켜 모두가 죽었다. 칼립소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힘을 아꼈다.
황태자가 끝에서 비장의 한 수를 보일 때까지.
그러다 ‘신호’를 느꼈다.
아니, 기척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내가 더는 가장 앞에서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뒤가 있다는 걸 알려 준 사람이 있었지.”
칼립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밤하늘을 가르고 누군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이에게서 퍼져 나간 물줄기가 마치 날개처럼 웅장했다.
탁, 바닥으로 내려선 사람은 새카만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피에르였다.
피에르는 칼립소를 한 번, 그리고 바닥에 죽거나 쓰러진 이들을 한 번 보았다.
“누가…….”
고요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딸을 괴롭혔지?”
칼립소가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사가 왜 그래?”
“아게노르가 그러더군. 등장은 모쪼록 위엄 있는 대사로 시작하라고.”
걔는 무슨 이상한 말을 했담. 진지하게 받아들인 아빠는 뭐고.
피에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밤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이 뛰어내렸다.
피에르가 펼친 물의 힘에 보조를 받아 바닥으로 내려선 이들은 아콰시아델의 정예군이었다.
“이야, 이제 쪽수로도 할 만하겠네.”
칼립소는 웃으며 제가 만든 방어막을 거둬들였다.
“안 그래?”
황태자는 3회차를 기억해 낸 일로 우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상대하게 된 것은.
3회차보다 더욱 강해진, 칼립소가 이끄는 아콰시아델이었다.
아, 한 가지 더.
‘우리 가문의 전설의 천재가 한 명 더 합류한 상태인 거지.’
피에르 아콰시아델 말이다.
“……뭐 해?”
황태자가 이를 으득 갈며 고개를 돌렸다. 데바나가 무뚝뚝한 낯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당장 쳐!”
전투가 재개되었다.
칼립소는 피에르가 손을 뻗는 걸 보며 맞춰서 한 손을 뻗었다.
부녀의 손에서 뻗어 나간 물줄기가 굵게 엮이며 달려오는 이들의 발을 걸었다.
동시에 칼립소는 발을 박차고 황태자에게 뛰어들었지만.
애석하게도 닿기도 전에 흙벽이 솟아오르고, 주먹은 애꿎은 벽만 부쉈다.
황태자는 이미 흙벽 뒤에 없었다.
쯧 혀를 찬 칼립소가 뒤로 물러나자, 피에르가 옆으로 다가왔다.
“아빠, 밖에서 황성을 제압하는 세력, 우리 애들 아니야?”
“맞다.”
칼립소의 표정에 놀람이 스쳤다.
피에르가 이끌고 지휘해야 할 병력이었다. 그런데 왜 여기 있단 말인가?
“그럼 그 병력은 누가 이끌고 있는데?!”
황성과 수도에도 만만찮은 군대가 주둔해 있을 터. 게다가 상대의 진영에서 싸우는 이상 지휘관의 역할이 몹시도 중요했다.
“아게노르.”
아니, 걔가 왜 여기서 나와?
분명 아콰시아델을 지키고 있어야 할 셋째 오빠의 이름이 나왔다.
“걔는 왜 또 여기 있는데?!”
“달려왔더군.”
“그래서 냉큼 맡기고 이리 왔다고? 아빠 혹시 미쳤어?”
부녀가 처음으로 말다툼 비스무리한 것으로 발전하는 틈에도, 칼립소와 피에르의 몸은 착실하게 움직였다.
부녀의 물의 힘은 마치 한 몸처럼 합류하거나 나뉘거나 하여 적들을 농락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도 아게노르가 지휘관으론 애송이란 걸 알고 있으니.”
“그럼……!”
“아게노르 옆에는 이미 유능한 지휘관이 있다.”
“뭐?”
“아, 오히려 나보다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그런 인재가 어디 있는데? 칼립소가 3회차의 인재를 데려온 것도 아니고.
“열세일 때의 전투와 치고빠지는 전략에 다시 없을 귀재를 데려왔다.”
“그게 누군데?”
주요한 인재는 자신이 끌고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네 엄마다. 그녀가 아게노르와 함께 있으니, 걱정 말도록.”
“…….”
칼립소가 흠칫 놀랐다. 그러나 더는 아빠에게 따져 묻지 않았다.
확실히 오랫동안 상어들을 이끌었던 시저라면. 게릴라전에 누구보다 능할 테니까.
‘나 참, 언제 꼬셔서 언제 데려온 건데?’
물론 배알이 꼴리긴 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사전에 말해 주면 좋았을 거 아닌가?
한편으로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전 생에 없던 행운들이, 이렇게 모이다니.
“좋아. 그럼 안심하고, 깽판 쳐도 된다는 거지…….”
피에르와 정예 기사들이 나타나 분투해 준 덕분에 부상자들은 저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아빠, 여기 있는 놈들 다 쓸어버리면 돼.”
게다가 이젠 칼립소가 마음껏 힘을 쓰더라도 알아서 여파를 감당해 줄 사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칼립소가 무력으로 기댈 수 있는 아빠가 도착했다.
“뒤는 잘 부탁할게.”
칼립소가 연습하듯 중간 크기의 너울을 만들어 냈다.
출렁이는 파도가 적군을 덮치는 순간 땅이 넓은 면적으로 일어나 파도를 그대로 흘려버렸다.
동시에 칼립소는 제게 날아오는 주먹을 피해 허리를 숙였다.
칼립소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칼립소의 의지가 아니었다.
칼립소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한 번 넘어 착지한 뒤 돌아본 곳엔 데바나가 서 있었다.
그리고 칼립소를 뒤로 날려 준 피에르도 함께.
“내 딸이 신세를 졌더군.”
피에르가 뒷짐 진 손을 움직였다. 수신호였다.
‘뒤는 내게 맡겨라.’
칼립소가 시원하게 웃었다. 이야, 내가 깽판 좀 치겠다니까 날려 버리고 본인이 치겠다네?
어느새 아스엘 판테리온 앞에는 암필라와 나타샤가 나타나 막아서고 있었다.
이외에도 정예 기사들이 맹수를 상대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보자면 여전히 살짝 밀리는 형세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군 중에서 지쳐 버린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괜찮다.
저놈 하나만 붙잡으면 되는 게임이니까. 칼립소가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 한곳에 착지했다.
“어딜 가려고?”
황태자가 움직이던 그대로 이를 악물었다.
“……칼립소 아콰시아델.”
칼립소가 기분 좋게 웃었다.
세 번. 꼬박 세 번의 생이 걸렸다. 저놈이 ‘하찮은 물고기’, ‘하등한 동물’, ‘비린내 나는 여자’에서 제 이름을 증오를 담아 온전히 부르기까지.
네 번째 대면인 지금, 이제는 이 악연을 끝낼 때가 왔다.
“이야, 내가 딱 하나는 궁금한데, 어떻게 저 고지식한 흑표범들이 네 자살 특공대에 몸담게 했어?”
“…….”
“아, 아니다. 지난 생에서도 너 하나 믿고 몸을 던진 놈들이었지? 너는 세상을 멸망하게끔 용 공작을 폭주하게 만들었고 말이야.”
칼립소의 얼굴에서 차차 웃음이 지워졌다.
“쟤네들은 죽도록 싸우게 시키고 너만 튀면 안 되지, 망할 새끼야.”
“누가, 도망쳤다는 거냐.”
황태자의 눈이 위험한 빛으로 일렁거렸다. 그 아래엔 영문을 알 수 없는 집착이 도사리고 있었다.
황태자의 입 끝이 한쪽만 올라갔다.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음에도 유려한 얼굴이었다.
“나야말로 이 순간을 기다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