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0화
황태자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으니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칼립소의 회귀와 에키온의 힘이 뒤섞여 발생한 ‘사고’와 같은 일이었다.
벨루스와 아틀란이 전생을 기억하는 것처럼. 기억을 떠올린 것뿐.
회귀자는 오직 칼립소 하나뿐이었다.
칼립소 또한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회귀에 사람들이 휘말려 기억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그러니 황태자는 이상한 착각 중이었다. 그리고 제 사상에 사로잡혀 무수한 사람을 학살했다.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던가?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바닥이 웅웅 울리더니 여기저기서 아까 수인 하나를 죽였던 거대한 가시가 솟았다.
땅의 힘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곳에는 보통 수인들이 있는 게 아니었다.
각기 가주이거나 한 가문을 대표할 만큼 실력이 있는 자들.
당황한 것도 잠시, 다들 대처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가시에 죽은 이들은 많지 않았다.
“하하하, 친애하는 여러분. 우매한 당신들이 한 번에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황태자가 손짓하자, 사방을 막고 있던 암벽이 갈라지며 열린 문으로 새로운 수인들이 쏟아졌다.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죽여 드릴 터이니.”
맹수들, 그리고 그중에서 돋보이는 건 흑표범 수인들이었다.
“모두를 죽인 뒤에, 회귀하겠습니다. 다음 생에는 더 좋은 세상에서 만나요.”
칼립소는 처음으로 경악했다.
흑표범 저놈들은 뭐하는 새끼길래 저 미친 소리를 따른단 말인가?
하여간에, 릴리를 데려다가 과보호로 퉁치는 통제를 보일 때부터 알아봤다.
육아물은 무슨. 사이코패스들의 향연이었다!
“한데 모여요! 부상자들과 비전투 인원은 뒤로 빠져!”
다행스럽게도 수인들은 서로 힘을 합쳐 쏟아지는 맹수 수인들을 잘 막아 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칼립소, 숫자가 너무…….”
숫자의 차이였다. 수적 열세는 금방 눈으로도 드러났다.
게다가 장소와의 상성이 최악이었다. 칼립소의 주특기 중 하나는 광역기였다.
거대한 파도로 적을 쓸어버리기엔 적과 아군의 사이가 너무 가까웠다.
같은 편도 쓸려 버릴까 봐 쓸 수 없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수원지가 멀어.’
그랬다. 강력한 힘과 재능을 타고난 만큼 물의 힘을 넘치게 사용하는 건 무리가 없었지만.
물이 너무 멀리에 있다는 점은 칼립소에게도 한계를 만들었다.
칼립소가 황태자를 아는 만큼, 황태자도 칼립소를 안다.
물론 세 번의 인생을 지켜본 칼립소만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하나의 생에서 완벽하게 패배하며 배운 것이 있을 터였다.
본능적으로 탐지해 보아도 물이 너무 멀었다.
이곳에 있는 거라곤 컵에 담긴 음료뿐.
‘제일 좋은 건 사람들 모두를 허공으로 들어 올리는 건데, 그럼 힘의 소모가 커.’
반면 땅의 힘을 쓰는 이들은 펄펄 날아다녔다. 그렇지 않아도 황성은 땅의 힘 가호를 받은 건물이니.
최적의 공간일 터였다.
‘어떡한다. 차라리 벽을 내가 뚫어 버리고 도망을 가야 하나.’
하지만 밖에 있는 병력이 더 많을 경우엔, 이 선택은 최악이 되어 버린다.
“오랜만이군.”
게다가 상황은 더 좋지 않게 흘러갔다.
흑표범들의 수장 데바나 판테리온과 후계자인 아스엘 판테리온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망할 데바나 판테리온이 칼립소 자신을 향해 인사한 게 보였다.
분명했다.
비록 거리가 이렇게나 떨어져 있지만 말이다.
저들이 나타났다는 건, 흑표범의 전력이 여기 모두 왔다는 증거.
여기 모인 수인들은 분명 강했지만, 흑표범들이 괜히 최강 중 하나로 불리는 게 아니었다.
“웨일, 넌 뒤로 가서 부상자들을 부탁해. 비전투 인원들도 부탁할게.”
“……알았어. 무리하지 마.”
칼립소의 물의 힘이 부상자들을 뒤로 빼면서 앞의 맹수들을 누구보다 많이 쓸어버리던 그때였다.
쿵! 쿵!
소란스러운 전투 속 작은 소리였다. 그런데 왜일까, 칼립소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칼립소는 힘을 분배해 손에 창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벽을 향해 힘껏 던졌다.
창이 벽에 꽂히기 무섭게 쾅! 폭발했다.
흙으로 만들어진 벽의 허물어진 부분을 뚫고 무언가 들어왔다.
거대한 푸른 뱀이었다.
“투스?”
칼립소가 말하기 무섭게 뱀은 칼립소를 둘둘 휘감았고, 동시에 칼립소는 차오르는 힘을 느꼈다.
아, 물이다.
투스의 근원이 물이었기에, 살아 있는 수원지나 다름없었다.
투스가 예전에 용의 성으로 가는 길에 호수의 물을 절반가량 삼켰던 것처럼.
투스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양의 물이 있는 것이다.
어느새 작아진 뱀이 칼립소의 어깨에 앉았다.
-칼립소!
맑은 목소리,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낮아졌지만 성장했다고 보면 되는 걸까?
급박함도 잊고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야, 투스.”
그리고 고마워.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뱀의 꼬리가 살랑 흔들렸다.
“좋아, 기운이 나는 지원군도 왔겠다. 이제 제대로 해 볼까.”
칼립소는 밖을 통해 날아온 투스 덕에 대략적인 바깥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칼립소가 예상한 대로 밖에는 병사가 깔려 있었다.
무턱대고 밖으로 나갔다면 절대적 다수를 상대해야 했을 터.
칼립소에게는 유리한 전장이지만 아군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더, 다행인 점은 황성 입구가 소란스러웠다는 것.
‘누가 오고 있는 거야.’
아빠일까?
칼립소가 다시 전투에 뛰어들었다.
한편으로, 칼립소는 많은 힘을 쓰지 않았다.
황태자가 이 싸움에 끼어들지 않는다. 이것이 불안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투스가 합류했지만, 수를 뒤집을 수는 없었기에 하나둘씩 쓰러지거나 제압되는 이들이 늘어났다.
코끼리의 수장 다나라거나 뱀들의 수장 나타샤같이 칼립소처럼 아군이 가까운 상태로는 특기를 발휘할 수 없는 이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다나는 능력을 이용해 바닥을 내려찍어 상대가 디딘 땅을 가라앉게 하거나 밀어낼 수 있었지만.
사용 면적이 넓어 섣불리 쓸 수 없었고, 나타샤의 특기는 독이었기에 마찬가지로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
쓰러지는 이들이 늘어났음에도 전황은 팽팽했다. 칼립소가 흑표범들을 막아 냈기에.
“이야, 꼴 보기도 싫은 면상을 또 보네.”
“…….”
아스엘 판테리온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으나 따로 대꾸하지 않았다.
마치 대꾸하지 말라는 명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시야가 조금 몽롱해 보이기도 했다.
‘약이라도 먹었나.’
매드럼의 연구소 같은 곳이 황실에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으니.
칼립소는 황성 초입에 침입한 이들이나, 에키온 일행이 뭔가를 하기까지 시간만 끌면 괜찮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본능과도 같은 감각이 고개를 억지로 돌리게 만들었다.
칼립소는 그대로 물의 힘을 이용해 아스엘 판테리온을 묶고 밀어 버렸다.
“암필라! 잠깐 이 새끼 좀 상대해요!”
“어? 네? 네!”
데바나 판테리온은 분명 조금 전까지 다나가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나는 다른 이를 상대 중이었고, 데바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곧 수많은 이 중에서 흑표범 수장의 기척을 찾아 알아차렸을 때.
‘안 돼!’
칼립소의 신형이 데바나 앞에 나타났다.
물의 힘을 머금은 주먹이 데바나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데바나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칼립소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물줄기로 그의 다리를 묶고, 다른 한쪽은 저 멀리 기둥에 묶어 휙 당겨 버렸다.
“하, 이미 늦었다…….”
저 멀리 튕겨 나가는 데바나가 비웃으며 한 말이 남았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황급히 돌아보았다.
“쿨럭, 칼, 립소…….”
낭패였다. 웨일의 신상이 황실에도 넘어갔을 텐데. 그렇다면 전쟁에서 유일한 치료사를 먼저 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그래서 후방으로 보냈던 것인데…….
“웨일!”
웨일의 복부에 검이 꽂혀 있었다. 새카맣게 물든 걸 보니 독이라도 묻어 있는 듯했다.
“괜찮, 괜찮아.”
“여, 여긴 후방이 아니잖아! 왜 여기 있는 건데. 물러나라고 했잖아! 왜 다치는 거냐고!”
칼립소가 웨일 앞에 앉은 채 소리쳤다. 일단 웨일을 옮기는 게 먼저인 걸 알고 있다.
하지만 3회차의 기억이 오버랩되며,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이번 삶에는 그 누구의 희생도, 죽음도 보고 싶지 않았다.
칼립소는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돌렸다.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곧 천장에서 비가 내렸다. 싸우던 이도 의아하게 여겨지는 비가.
동시에 빗방울을 맞은 이들 중 맹수들의 몸에서 물로 된 가시가 홱 돋았다.
“커헉!”
“피해, 피해라!”
“크아아악!”
상대가 주춤하여 뒤로 물러나거나 쓰러지자.
칼립소는 막 생겨난 경계에 물로 만든 거대한 방패, 아니 방어막을 만들었다.
그 탓에 아끼던 힘이 대거 쑤욱 빠져나갔지만. 칼립소는 얼른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치료, 치료는? 아. 내가 그냥 널 데리고…….”
“미안…….”
웨일이 힘없이 칼립소의 손을 잡았다. 칼립소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하아, 사람들이, 많이 죽으면 네가 슬퍼할 것 같아서.”
웨일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천천히, 그리고 명확히 발음했다. 나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노력했던 거라고.
“네 작전이 실패하면, 너는 네 탓이라고 생각할 거잖아. 칼립소.”
웨일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칼립소가 동질감을 느끼고 마음이 통한 것은 에키온일지라도.
자신만큼 칼립소를 알지는 못하리라고.
‘네 어깨는 왜, 그리도 항상 무거워?’
웨일은 늘 생각했다.
이다지도 동료가, 수하가 늘어났는데. 칼립소는 늘 가장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네 어깨가 더는 무겁지 않으면 좋겠어. 모든 게 네 탓이라고 생각, 하지 마.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실패는 그만, 생각해.”
웨일은 제 상처를 가늠했다. 꽤 치명적이었다.
“이미…… 네 덕분에 살아 있는 사람이 여기 있잖아.”
웨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칼립소를 몽롱한 눈으로 응시했다.
“나.”
나 여기 있어, 칼립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