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69화 (269/275)

제269화

황태자가 황제 살해를 공표하기 한 시간 전.

에키온 일행은 신전 안에 있었다.

저녁 시간, 칼립소가 회의실에서 나오고서 무려 한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그들 모두 에키온의 힘으로 신전 안에 잠입할 수 있었다.

에키온과 아틀란 단둘이었던 팀에는 벨루스와 리리벨, 레바이에 하우저까지 합류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곳에서 뭐든 알아오거나. 혹은 발견했을 때 파괴하는 게 우리 목표다.”

벨루스가 이리 말했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너도 용 공작인데, 어째서 여기 들어오는 데 반나절씩이나 걸린 거지?”

“이곳에 용의 힘이 중첩되어 있으니까.”

에키온은 벨루스의 질문에 대답하며 손가락을 폈다.

“이 숫자. 혹은 그 이상이 합쳐졌어.”

그게 바로 저 신전에서 느껴지는 힘이라고. 다들 그 대답을 듣고 침묵했다.

그리하지 않고서야 자신을 덮친 충격을 갈무리할 수 없었기에.

신전 안에는 침입자를 대비한 무수히 많은 함정이 있었지만.

레바이가 함께 있었기에 그들은 안전하게 피하며 나아갔다.

함정을 함부로 파괴했다간 밖에서 알게 될 가능성도 있었으므로.

모두 함정에 걸리더라도 최대한 조용히 빠져나가자는 합의를 한 뒤였다.

아틀란이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물의 힘을 꽤 써야 했으므로, 가벼운 피로가 그의 얼굴에 내려앉아 있었다.

“근데 쥐새끼 하나 안 보이네, 진짜.”

모습과 기척을 죽이는 물의 힘을 쓴 게 무색할 정도로, 이곳엔 살아 있는 존재가 없었다.

있는 거라곤 침입자를 갈아 버리겠다는, 살벌한 의지가 담긴 함정뿐이었다.

게다가 그 함정도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건지.

허공에 몸을 띄울 수 있는 범고래 수인 여럿과 함정을 미리 알아차리는 데 큰 공을 세운 레바이가 없었다면.

이미 시체가 되었을 게 분명한 함정들이 무수히 많았다.

악의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어쩌면 경비나 같은 편에게도 들키면 안 되는 게 여기 있다는 소리겠지.”

레바이의 말에 에키온을 제외한 일행은 각기 무겁거나 딱딱한 얼굴을 했다.

“여기가 마지막 방인가?”

미로처럼 만들어 함정이 산재한 신전 중앙과는 다르게.

일직선으로 이어진 길을 쭉 걷자, 하나의 방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틀란이 대표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연 순간 암기가 날아오는 함정도 있었지만. 레바이는 그런 건 없다고 판단했다.

마침내 문이 열린 방으로 들어갔을 때, 모두가 침묵했다.

눈앞에는 수없이 많은 뼈가 산처럼 쌓여 있었으므로.

전쟁의 기억이 남아 있는 벨루스, 아틀란, 레바이와 하우저마저 입을 다물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미친 새끼.”

이 한마디로는 모두의 심정이 제대로 담기지 않았다. 아틀란이 이를 갈았다.

대체 이 거대한 뼈 무덤이 만들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숫자가 감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매드럼 같은…… 실험실이 여기도 있었다는 건가?”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벨루스와 레바이의 짤막한 대화 속에 분노와 혐오가 어려 있었다.

에키온만이 모두와 다르게 평온한 표정으로 힘의 근원을 찾아 헤맸다.

“잠깐만, 저걸 보십시오.”

그러던 중 하우저가 손을 들어 뭔가를 가리켰다.

다들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우저가 가리킨 곳에는 앉은 채로 처참하게 죽은 시체가 있었으니까.

죽은 지 오래된 건지, 부패한 시체였다. 입이나 코를 막을 미숙한 자는 없었기에 빤히 응시했고.

어렵지 않게 판단했다.

“황제로군요.”

레바이가 가장 먼저 말했다. 요인 파악이 업무였던 이인 만큼 제일 먼저 알아차렸던 것이다.

“어? 맞지? 맞지? 저 머리 색은 사자밖에 없잖아?”

“부패하긴 하지만 얼굴 형태나 손가락이 하나 없는 것도 일치하는군.”

“저 옷, 기억에 있습니다.”

리리벨은 아무렇지 않게 황제를 잘 아는 양 대화를 나누는 이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초를 치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요인 파악에 소홀히 했던 모양이라고 의지를 다질 뿐.

“살해당한 것으로 보이고, 시기는 어림잡아 몇 년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당연히 황태자가 죽였겠군.”

범인은 모두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를 죽였다면 왜 황위에는 오르지 않았을까?

레바이가 곰곰이 고민했다.

그는 칼립소 다음으로 황태자에 대해 많이 아는 자였다.

“일단 저 시체를 가져가 보는 건 어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내가 하지. 그리고 용 공작, 진원지는 어디인 것 같나?”

벨루스가 물의 힘으로 황제의 시체를 허공에 띄우는 순간이었다.

“바로 거기.”

에키온이 황제가 앉아 있던 의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막, 묶여 있던 게 풀렸어.”

황제의 시체가 무언가의 봉인을 맡고 있던 걸까. 일행 모두가 한 곳을 향했다.

거대한 뼈가 알아서 조각조각 맞춰지고 있었다. 마침내 만들어진 건, 뼈로 만든 사람의 모습이었다.

한 손에는 검을 든 모습. 하지만 심상치 않았다.

심장에서는 음습한 녹색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

“……근원지, 저기 있어. 심장에.”

“잠깐만. 잠깐만. 설마, 그럼 네가 느낀 모든 힘이 저기에?”

“응.”

가까스로 조금 전, 에키온이 펼친 손가락 개수를 떠올린 아틀란이 사색이 되었다.

다른 일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틀란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야, X됐네.”

저건, 황실이 모은, 전대 용 공작들의 사체를 모아 만든 괴물이었다.

없앨 것이냐. 아니면 이대로 나가서 칼립소에게 갈 것이냐.

그러나 괴물은 그들에게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에키온은 제 힘을 더욱 끌어내는 동시에, 어쩐지. 이것만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약해.’

오늘 낮, 신전을 본 순간 처음 느꼈던 크기에서 덜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다들 피해! 윽!”

“리리벨, 그물을 만들어!”

“알아!”

이보다 더한 것이 있을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칼립소.’

에키온은 문 쪽을 바라보았다. 곧 에키온은 줄곧 제 몸에 품고 있던 존재를 밖으로 내보냈다.

푸르른 뱀이 활짝 열린 문을 통과했다.

“덤빌 거야.”

에키온의 경고가 끝나기 무섭게-.

쾅!

다시 전투의 시작이었다.

* * *

“황제는 내 손으로 죽였습니다.”

죽음과 같은 정적이 이 홀에 내려앉았다.

황태자의 황제 시해 인정. 초유의 사태 앞에서 누가 말을 꺼낼 수 있을까.

“그러니, 내 말이 황제의 것과 같습니다.”

웃음 서린 음성에서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될 동안, 충격에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아비를 죽였다 선언하는 이의 낯이 너무나 해맑고, 평온했으므로.

칼립소는 눈을 깜빡였다. 사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충격을 받진 않았다.

충분히 그럴 만한 새끼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주목한 건, 어째서 이걸 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랑스럽게 공표했는가, 였다.

왜 저런 미친 소리를 할까?

이미 발표 전부터 황실에 날을 세운 이들이 잔뜩 있었다.

당연하다. 저와 같은 종의 수인들을 잃은 이들의 대표이자 가주들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내 아버지는 제국의 무궁한 영광과 평화에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어 마땅했지요.”

하나,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는 한가락 하는 이들이 넘쳐났다.

누군가 손을 들었다. 외양만 보아선 어떤 수인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황실을 향한 적개심만큼은 숨김없이 드러났다.

“외람되오나, 황태자 전하. 저희는 여기, 황실의 입장을 듣고자 소환되었습니다. 분명 황제 폐하께서 붕어하신 일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오나, 그것이 매드럼의 인체실험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올곧게 말하던 이가 순간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설마, 황제 폐하께서 그 실험을 지시하셨던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닙니다.”

황태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조금 굳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제 말에 끼어든 이를 불쾌하게 여기는 게 분명했다.

“오히려 아버지께서도 희생양, 그래. 숭고한 희생을 하셨지요. 실험 끝에 죽었으니까?”

“……예?”

쥐 죽은 듯 고요했던 연회 홀에 경악이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저 말인즉, 황태자가 실험을 지시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아니던가?

무엇보다, 제 아비를 실험 대상으로 서슴없이 이용했단 말이었다!

더는 고요하지 않았다. 술렁임이 퍼져 나가는 가운데, 황태자는 툭툭, 단추를 벗어 제 망토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다음엔 웃옷을 벗어 바닥에 버렸다.

알 수 없는 행동에 모두가 당황하는 찰나, 오직 한 사람.

칼립소만이 손을 뻗었다.

“젠장, 다들 뒤로 피해!”

허공에 뭉친 물의 힘이 거대한 방패를 만들었으나, 이미 늦어 버렸다.

“커헉……!”

땅에서 솟은 거대한 가시에, 용감하게 이의를 제기했던 수인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꺄아아악!”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패닉이 온 자가 문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홀을 벗어날 수 없었다.

거대한 벽이 솟아 사방을 막아 버렸으므로.

순식간에 사람 하나를 죽인 황태자는 평온했다.

그는 생긋 아름답게 웃었다.

“여러분, 사실 이번 생은 한 번 반복된 세상이랍니다.”

혼란이 범벅된 얼굴로 덜덜 떨거나, 굳어 버린 이들이 억지로 황태자를 응시했다.

무슨, 미친 소리인가. 저게?

“저는 말이죠. 이번 생을 ‘연습’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본 게임은 시작하지 않은 거죠.”

그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이미 평온함과 정상을 놓아 버린 눈동자.

칼립소는 저 얼굴과 눈을 잘 알았다.

“내가 혼자 죽을 것 같아?”

3회차에서 완패한 뒤, 용 공작을 폭주시키고 광소를 터트리던 얼굴과 일치했으니까.

그래서 에키온을 떨어트려 놓았건만. 놈은 역시나 음흉한 새끼답게,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한데 그 방향이 이상했다.

황태자가 사이비 교주처럼 황홀한 표정으로 양손을 활짝 펼쳤다.

“저는 이 생을 마무리하고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제 광신도들을 쳐다보는 것처럼 하해로운 시선으로.

“그럼, 좋은 세상이 될 테죠.”

좋은 세상이란 황태자가 바라는 대로, 희망하는 대로 완성된 세상일 터.

여기서 경악한 그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그만의 아집이었다.

칼립소는 입을 살짝 벌렸다.

막 예상했지만, 설마하니 저 새끼.

‘미친, 저 새끼 지금 본인이 회귀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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