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화
“짜증 나네.”
연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회의실에서도 써먹었던 시간 끌기가 연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졌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황태자의 모습이 그 증거였다.
땅의 맹세를 한 만큼 나타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음흉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래서 칼립소는 그놈이 싫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뭐 하나 맞는 구석이 없었다.
“나한테 있는 정반대 요소를 모아다가 사람으로 만들면 분명 황태자가 짠 하고 나올걸.”
아그작. 칼립소가 음료에 담긴 얼음을 살벌하게 씹으며 말했다.
“아하하.”
웨일은 웃으며 다정하게 대꾸했다. 그렇구나.
“나는 황태자님을 만난 적이 없지만 네 설명으로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님도 붙이지 마, 그 새끼라고 안 하는 게 우리가 보이는 최대한의 예의야.”
현재 칼립소가 있는 자리엔 웨일만 있지 않았다.
연회에 참석한 인원은 회의에 참석한 인원보다 배로 많았다.
가주와 대표들이 데려온 인원들과 수도에 있는 크고 작은 가문들. 그리고 무엇보다 호위가 잔뜩 있었다.
‘다들 여차하면 전쟁이 날지도 모른단 예상은 하고 있는 거지.’
그만큼 심각한 사항이었다.
하하호호 웃고 있지만, 이 안에 드리운 전운을 느끼지 못한 자는 여기 들어오지 못했을 터다.
아무튼 간에, 칼립소 옆에도 몇몇이 서 있었는데.
바로 코끼리 수장 다나와 하마 수인들의 대표 암필라. 그리고…… 뱀들의 수장인 나타샤였다.
칼립소는 처음에 나타샤를 보고서 놀랐었다. 대회의에는 다른 이를 대표로 보냈더니.
연회에는 직접 참여하고 싶어서 저녁에 도착했단다.
세 수장과 대표는 각기 칼립소의 말에 공감하거나 쓴웃음을 짓거나 애써 웃으며 모른 척했다.
“다들 수긍하는 얼굴이네요.”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답니다.”
다나가 차분한 얼굴로 미소했다.
칼립소는 짐작했다. 아마, 오늘 연회에서 황태자가 어떻게 마무리하든 간에. 제국의 분열은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아콰시아델만 해도 이미 오래전부터 제국에 더는 소속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나는 평온한 낯이지만 이미 결심을 굳혔다는 걸 칼립소는 앞서 그녀와의 대화로 알 수 있었다.
서대륙 가문들 또한 독립을 원하고 있었다.
“후, 사실 공감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 놓고 대체 언제 나타나는 겁니까?”
“흐응, 나도 공감.”
암필라가 황태자의 부재에 참지 못하고 성질을 터드렸고, 나타샤가 우아하게 손을 흔들며 공감했다.
“……범고래 가주. ‘그건’ 어디까지 도착했나요?”
다나가 조용하게 물었다.
“도착했어요, 이미.”
그녀가 물은 것은 피에르와 그가 이끌고 오는 병력을 말했다.
이미 피에르는 여차하면 수도를 급습할 수 있는 위치에 도착했다.
그러자 모여 있던 이들의 얼굴로 안도감이 어렸다.
당연하겠지만 칼립소는 이 대화를 누구도 듣지 못하게 슬쩍 물의 힘을 쓰고 있었으므로.
다나가 굳이 돌려 물을 필요가 없었다.
“한 가지 궁금한 건…….”
칼립소는 고개를 돌려 연회가 열리는 홀 끝을 바라보았다.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 그 문양이 새겨진 휘장이 한쪽 벽면에 고아하게 걸려 있었다.
“황실이 병력의 도착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관하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거대한 병력이 움직이는데, 숨기는 것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황실이 쓰는 힘은 땅의 힘.
피에르는 아마 황실에서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을 거라고 경고했다.
‘이건 흡사…….’
칼립소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녀의 눈이 낮고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곳에 참석한 이들이 각자 어떤 생각을 하든 간에 연회는 이어졌다.
한 시간이 흘렀을 무렵, 연회장에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족 등장을 알리는 소리다.
드디어 황태자가 연회장에 나타났다.
모든 인원이 일시에 대화를 중단하고 집중했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장관이었지만.
단 한 사람만큼은 고개를 꺾지 않았다.
그 탓에 홀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황태자 케일과 그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고개 숙이지 않은 자는 칼립소였다.
황태자는 뻣뻣하기 짝이 없는 칼립소를 보며, 아주 잠깐 입매를 비틀었다.
이도 잠시 등을 돌려 단상으로 걸어갔다.
‘겁쟁이 새끼.’
칼립소의 입매로 비웃음이 어렸다. 완벽주의자, 하지만 패배를 맛본 완벽주의자는 보통 사람보다 더한 공포를 품었을 것이다.
황태자는 우선 인사를 다닐 생각인지, 연회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뒤로 바로 중심으로 이동했다.
이미 시작한 지 한 시간이 흘렀건만.
‘본격적인 시작 좋아하네.’
칼립소가 고요하게 끓는 분노를 가라앉히는 사이, 그녀의 어깨로 조심스러운 손이 올라왔다.
“칼립소.”
황태자와 칼립소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 바로 본론을 꺼내진 않을 듯하니.
“웨일, 우린 잠시 저 끝으로 갈까?”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잘 전해졌는지, 웨일은 얌전히 따라왔다.
“잘 참더라, 칼립소.”
“안 참으면 어쩌겠어.”
칼립소가 손에 들린 음료를 한번 홀짝였다.
와인이 널려 있었으나, 계획을 위해 술을 입에 댈 순 없었다.
“오히려 에키온 쪽에서 얼른 좋은 거 하나 물어오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 그럼 저 사자놈 얼굴을 조금이라도 덜 볼 텐데.”
“이런, 그럼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게 내가 다른 이야기를 해 볼까?”
“뭐, 저 면상을 잊을 만큼의 이야기가 네게 있어?”
“그럼.”
칼립소는 웨일에게 미안하지만 한 귀로 흘려들으며 끄덕였다.
한쪽은 황태자가 언제 입장을 발표할지, 다른 한쪽은 에키온 쪽에서 언제 연락이 올지 집중하고 있던 탓에.
“이 일이 끝나면 나도 네 남편이 되고 싶어.”
분명 이 집중을 흐릴 수 있는 말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칼립소가 조금 멍한 표정으로 웨일을 응시했다.
“나 결혼하기 싫어, 칼립소.”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다들 날 제 가문으로 데려가기 위해 혈안이야. 조금 피곤해.”
웨일의 얼굴을 찬찬히 보자, 그 말처럼 보이지 않던 다크써클이 살짝 보이기도 하고…….
“일이 끝나면 더 심해지겠지?”
반박할 수 없었다. 웨일의 가치는 그만큼 너무나 컸으므로.
“그러니까 네가 데려가.”
“무슨, 넌 너를 애완동물 줍듯이 말해?”
“그렇게 키워도, 대우해도 상관없다는 뜻이지.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도 되겠고.”
“…….”
“네게 영원히 속하고 싶은 마음을 전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칼립소는 이전처럼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조금 전 ‘결혼하기 싫어’라는 말에서 웨일의 절절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웨일이 싫다고 하면, 억지로 강요하는 가문은 없을 터다.
하지만 칼립소가 나서서 명령한다고 한들, 물밑으로 들어오는 권유까지 막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런 이유로 남편을 늘리는 건……. 아니, 그럼 레바이랑은 뭐가 다른데? 똑같은 상황이잖아. 레바이는 그래도 같은 생을 살아왔으니까……. 걘 수절할 것 같았다고.
그럼 웨일은 다른가?
아니, 무슨 형제가 결혼으로 협박(?)하는 모습이 똑같지? 사실 피가 섞인 것 아냐?
“웨일.”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친애하는 수인 여러분.”
고개를 돌렸다. 어느 틈에 저기 간 것인지, 황태자가 옥좌 앞에 있는 단상에 서 있었다.
“일단 나중에 이야기하자. 꼭 대답할 테니까.”
“응.”
웨일과 칼립소 모두 이성적 긴장을 잊고 한껏 집중했다.
“그대들을 아끼며 존중한다는 것을 표하기 위해 내 지금부터는 말을 높이겠습니다.”
뭐? 그 더럽게 오만한 자식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말을 높여? 모든 수인을 제 발아래, 발톱 때만도 못하게 느끼는 놈이?
칼립소가 표정을 매섭게 굳혔다.
“그대들은 아마도 웃는 얼굴 아래 내 등장과 입장 발표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겠지요. 압니다.”
알면 본론부터 뱉어, 이 망할 새끼야. 칼립소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황태자는 과하게 싱글거리며 웃었다. 미친 사람 같기도 했고, 간신히 우아함을 유지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사실 아직 황위를 이어받지 못한 나 대신에 아버지이신 황제 폐하께서 발표를 하는 것이 마땅할 텐데. 이런 생각을 한 분은 없습니까?”
없진 않을 것이다. 회의실에서 황태자를 마주한 순간부터.
다들 은연중에 투병 중인 황제를 떠올렸을 테니까.
모습을 보인 지 오래된 황제였다.
“우선 밝혀 둡니다.”
황태자는 더욱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황제는 내 손으로 죽였습니다.”
죽음과 같은 정적이 이 홀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