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66화 (266/275)

제266화

황실이 모든 가문을 소환한 날이 밝았다.

놀랍게도 황실은 뻔뻔하게 모든 관련 가문을 수도로 소환한 일만으로 모자라, 낮에는 대회의를 열 것이며.

밤에는 연회를 베풀 터이니 참여하라고 통보했다.

당연히 소환당한 이들 입장에선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소환당한 이들은 모두 매드럼의 인체 실험의 피해자들이 있는 가문이었으니까.

‘이 새끼, 수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누가 수습하겠답시고 이렇게 광역 도발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었다.

머리가 좋고 음흉한 그놈이 일단 당연히 오지 않으려 하는 가문마저 오게 하기 위해 이런 수를 쓴 걸지도.

그놈과의 싸움은 직접적인 전투가 없을 때도 치열한 수 싸움이 오갔다.

비나 눈이 올 때의 야습이라거나. 지형지물을 이용한 급습이라거나. 때로는 물에 독을 타는 악랄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내게 물의 힘이 있는 한 물에 타는 독은 그리 힘을 쓰지 못했지만.

“그럼 저는 다른 가문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그래, 너무 무리하진 말고.”

레바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라는 말, 반드시 받들겠습니다.”

“저, 저……!”

나는 고개를 숙이고 등을 보인 뒷모습을 보며 혀를 탔다.

“삐딱한 놈 같으니.”

내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이렇게밖에 못하는 놈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뒤, 회의장으로 향했다.

보통, 가문들이 모두 모이는 정상회의는 가문의 수장 혹은 대표와 그의 보좌관 정도만 입장이 가능했다.

당연히 무기는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사실 물의 힘이나 땅의 힘을 쓰는 자에겐 의미 없지만 말이지.’

다른 수인들에게나 해당 사항이 있는 검문이다.

황태자가 낮에 소집한 대회의에서는 오직 수장이나 가문 대표만 입장이 가능했다.

보좌관들과 호위들은 모두 옆방 대기실에 대기하도록 명령이 떨어졌다.

설마하니 회의실에서 깽판을 칠까 싶었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나서면 문이나 벽 정도는 부술 수 있다.

필요하다면 그들을 써먹을 수 있다는 소리다.

나는 회의실로 들어가기 전에 문 옆의 벽을 툭툭 두드려 봤다.

‘꽤 두텁긴 한데, 매드럼 연구실의 외벽만큼은 아니네.’

그 외벽도 뚫었으니, 이 벽도 문제없을 거란 소리다.

“저, 아콰시아델 가주……님?”

시종이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거의 마지막에 도착한 탓에 회의실은 꽉 차 있는 상태였다.

거대한 원탁이 보였고, 의장 자리에는 금발 머리가 보였다.

에키온의 눈동자 색을 늘상 보고 있어서인가.

황태자의 머리칼은 아무리 봐도 ‘탁한’ 금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늦었군. 아콰시아델의 가주.”

그 말처럼 자리는 단 한 자리만 비어 있었다. 게다가 가장 말석이다.

이 새끼, 초장부터 되도 않는 시비를 걸고 있었다.

나는 픽 웃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웬일이십니까, 어디서 비린내 난다는 소리로 시작을 하지 않는 날이 있으시다니.”

회의실에 있던 수장과 대표들 중 몇몇이 숨을 삼켰다.

공식적으로 칼립소 아콰시아델이 황태자 케일 헬테아데를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내 인사는 오직 황태자만이 무슨 소린지 알 수 있으리라.

황태자는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앉도록.”

그 말에서 나는 이번 생에서 수중 동물 수인들의 달라진 위상을 느꼈다.

앉아 있는 몇몇 맹수 가문 수인들이 노려보거나 시선을 피했다.

노려보는 이들의 눈에도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나는 그들 대부분이 매드럼과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매드럼이 사라지며 큰 타격을 입은 가문임을 알아보았다.

특히나 치타 가문은 가주를 잃었다고 했나? 소장과 협의할 것이 있어 그곳에 있다가 명을 달리했다고 했다.

“모두 도착했으니, 회의를 시작하지.”

그렇지 않아도 조용하던 회의실이 더욱 고요해졌다. 각자의 감정을 품은 시선이 황태자에게 한데 모였다.

시선이 익숙한 듯 그는 입꼬리를 반듯하게 끌어 올렸다.

믿음직스러운 정치인의 얼굴을 한 채, 포문을 열었다.

“우선, 황실 대표로서 한마디 먼저 하겠다.”

그리고 회의가 시작하기 무섭게 폭탄을 툭 떨어트렸다.

“우리 황실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네.”

* * *

칼립소와 레바이, 그리고 호위로 붙은 하우저가 회의실 쪽으로 빠진 시점.

같은 시간, 황실 한 곳엔 에키온과 아틀란이 서 있었다.

“저쪽엔 병사가 너무 많다.”

“그냥 가는 건?”

“갈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걸려. 다른 길은 없겠냐?”

그 말에 에키온이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황실에서 이상한 게 느껴져.”

이 탐색은 에키온의 한마디로부터 시작되었다.

본디 칼립소가 시간을 끄는 동안 에키온은 용의 힘을 찾는 역할을 맡았다.

칼립소와 함께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에키온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순순히 수긍했다.

더는 고집부리지 않기로 했으니까.

“저쪽 길은 어때?”

황실 탐색엔 많은 인원이 도리어 해가 될 것으로 판단해. 에키온과 혹시 모를 전투와 침입을 대비한 아틀란, 이 두 사람이 맡았다.

“괜찮은데? 확실히 아까보단 사람이 적어. 좋아. 가만히 있어 봐.”

아틀란이 물줄기로 제 몸을 둥실 띄웠다. 곧이어 에키온의 몸도 둥실 띄웠다.

“거칠게 움직이지 마라? 난 세심한 조절 같은 거 잘 못해서 이 능력도 오래 못 써.”

그는 물의 힘으로 자신과 에키온의 모습과 기척을 숨겼다. 칼립소만큼은 아니지만 아틀란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아게노르 그놈이 여길 왔어야 했는데.’

새삼 아콰시아델을 지키고 있을 셋째가 아쉬워졌다. 잠입과 암살에 도가 튼 놈인데 말이다.

“말은 해도 되는 거야?”

“어어. 근데 크게는 하지 마. 큰소리 차단까지는 못해.”

두 사람이 하늘을 날아 이동하는 동안, 순찰하던 수인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이번에도 그 중요한 게 지하에 있을 것 같냐? 그 원숭이 새끼들처럼 말이야.”

“……아니, 지하 같진 않아.”

에키온이 고개를 슬쩍 저었다. 의문이 들었다.

보통 중요한 건 지하에 숨겨 두지 않나? 켕기는 게 있는 놈들일수록 더욱 그럴 텐데.

원숭이들도 그래서 지하에 제일 중요한 에너지원을 숨겨 두지 않았던가.

칼립소가 말하길 황실에게 용의 힘은, 매드럼의 에너지원같이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 집착하는 대상일 거라 했다.

의문이 커지는 한편, 갈수록 경비 인원이 줄어들었다.

‘대신 한가락 하는 놈들로 채워 놨네.’

경비 숫자는 줄고 양질의 인재로 채워 두었다.

듬성듬성 보이는 맹수들을 보며, 아틀란은 칼립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용의 성에 갔을 때, 용 공작을 가둔 건물을 소수의 강인한 전투인원을 깔아놓고서 감시했다고 했나. 같은 격이었다.

“여기 잠깐 멈춰서, 저놈들 순찰 주기를 잠시만 파악하자.”

두 사람은 아틀란의 주도하에 커다란 나뭇가지에 위에 착륙했다.

아틀란은 다가오는 맹수 기사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2인 1조, 가끔 3인 1조인가. 로테이션은 어떻게 돌리려나?

아틀란은 익숙한 경험을 살려 아래를 응시한 채, 입만 열어 물었다.

“야, 나 하나만 물어보고 싶은데.”

“응.”

“벨루스 그놈이 칼립소가 어차피 애인이나 남편을 둘 바엔 그 흰수염고래놈이 낫다고 하던데. 이런 헛소리를 너도 들어 봤냐?”

“…….”

에키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틀란은 없는 눈치를 끌어모아 에키온이 들어 봤거나, 혹은 알고 있던 거라고 생각했다.

“웨일은…… 노력하겠다고 했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칼립소 곁에 있고 싶다고.”

“아니, 대체 어떡하면 여동생님 하나밖에 모르던 인간을 제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냐? 그 새끼도 난놈이네, 진짜.”

아틀란은 소리 차단을 위해 작게 조곤조곤 뱉으면서도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야, 취소할게. 난 벨루스, 아니. 형이 왜 그런지 알고 있거든.”

에키온의 시선이 아틀란을 향했다.

“한 번도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지만, 형도 칼립소가 죽었다는 사실이 정말 충격이었을걸?”

삼형제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여동생이자 가주였던 칼립소를 존경하게 됐고, 충성을 다했다.

셋 중 가장 융통성 없는 인간이 첫째였으니.

아마 그는 이번 생에서 차마 티 내지도 못한 채 혼자 숨죽여…….

“더럽게 많이 울었겠지.”

그저 눈물을 밖으로 내보이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런 형이니까.

“그러니까 걘 어떤 상황에서도 칼립소를 살릴 수 있는 놈을 어떻게든 옆에 붙여 두고 싶은 모양이야.”

“…….”

감정을 배운 에키온도 이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우린 이번 생에도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걜 지키고 싶어. 물론…… 걘 이런 소릴 제일 싫어하겠지만 말이다.”

아틀란은 여전히 에키온을 보지 않고 있었다. 바닥으로 고정된 시선이 꼿꼿하기만 했다.

“그리고 이보단 다 함께 오래 살고 싶다. 거기엔 너도 있었으면 좋겠고.”

에키온은 잠시 침묵했다.

“……고마워.”

칼립소 외에 어떤 사람도 반기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에도.

유독 지겹도록 말을 던져 오고 시비를 걸어 오던 이가 아틀란이었다.

에키온은 이제 이것이 인간들이 말하는 ‘정’이며 ‘호의’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야, 대충 파악했다. 지금이야. 가자.”

곧 아틀란의 힘으로 다시 날아올랐다. 머지않아 두 사람은 에키온이 ‘용의 힘’을 느낀 장소 앞에 도달했다.

“……시X. 이게 뭐냐?”

그리고 아틀란은 당황했다.

“이거, 전생엔 없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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