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화
* * *
일주일 뒤.
수도에 도착했다. 바로 황성으로 가기 전에 우린 반가운 이를 마주했다.
“공작님……!”
바로 육지 거북들의 수장이었다. 그는 몇 년 만에 에키온을 만나 눈물을 흘렸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눈물을 흘렸다.
보는 사람이 감격보다는 당황할 만큼 울어서 내가 나서서 말려야 할 정도였다.
“이,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한 모습을 보게 되다니, 이 늙은 가신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사실 육지 거북 수장은 나이로 치면 당장 내일 명을 달리해도 이상하지 않다 보니.
함께 온 거북 수인들이 묘한 표정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에키온은 어린 시절처럼 멍하니 바라보지 않았고, 육지 거북 수장의 손을 잡아 주었다.
나 또한 에키온의 성장을 한눈에 확인하는 기분이라 괜히 흐뭇해졌다.
“뭐야, 그 기분 나쁜 얼굴은?”
“내가 뭐?”
“꼭 저놈을 키우기라도 한 얼굴로 보고 있었잖아?”
“그런가. 그런데…… 솔직히 이 정도면 키운 거 아니야?”
시비를 걸어온 아틀란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애인을 아들처럼 바라보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며 투덜거렸다.
내가 언제 아들처럼 바라봤다는 건지. 그냥 양육자의 느낌도 들었다는 거지.
“오랜만이군요. 범고래들의 어린 수장.”
“네, 반갑네요.”
눈물을 그친 노인이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이젠 어린 수장보다는 젊은 수장이란 표현에 걸맞은 모습이 되었군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내가 많이 어리긴 했지.
“이렇게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우릴 불렀다는 건, 더는 용 공작님의 존재를 숨기지 않겠다는 소리군요.”
나는 웃었다.
확실히 아콰시아델을 나서면서부터, 아니, 그 직전부터 더는 용 공작이 수중 동물 수인의 땅에 있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거리가 워낙 떨어져 있던 탓에 수도와 용의 도시까지 소식이 닿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겠지만.
황실이 아무리 막아도 소문은 퍼졌을 것이다.
그리고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이 이 소문을 진실로 굳히는 일이었다.
“내 옆에 용 공작님이 계신 것이야말로, 용께서 더는 황실의 편이 아니란 걸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으니까요.”
육지 거북 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주름지고 나이가 든 모습이었지만, 현명함으로 빛나는 눈은 여전했다.
“용의 도시는 용 공작께서 계신 곳을 지지할 것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것도 이야기를 한다는 걸 깜빡했네요.”
“음? 무엇을 말입니까?”
이곳엔 육지 거북 수인뿐만 아니라 동맹으로서 소개하기 위해 코끼리 가문의 수장 다나와 하마 수인 암필라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이미 에키온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던지라, 크게 놀란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나는 육지 거북 수장을 한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난 용 공작의 반려가 되었어요.”
그러자 지금까지 지켜보던 다나와 암필라도 놀란 눈치였다.
수도까지는 따로 도착했으니 나랑 에키온이 제대로 붙어 있던 걸 보지 못한 탓에 놀란 모양이었다.
이들 입장에선 용이 평생 단 한 사람의 반려만 맞이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상황일 거였다.
그렇다 보니 육지 거북 수인의 ‘다음은?’ 하는 눈앞에서 말을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생각만 한 채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심지어 당사자에게도.
“이 일이 끝나면 약혼식을 올릴 겁니다.”
“…….”
반려란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거북 수인들이 매우 놀란 표정을 지은 가운데, 육지 거북 수장은 홀로 고요했다.
마치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지혜로운 낯으로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군요. 한 가지 청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처음 듣는 소식에 놀라기는커녕 요청이라니, 궁금해지긴 하네요. 뭔가요?”
“약혼식은 용의 도시에서도 해 주십시오.”
육지 거북 수장은 오히려 놀라기는커녕 바로 공손해져서는 마치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렇게 요청까지 하지 않아도, 용의 도시에서도 아콰시아델에서도 한 번씩 하려 했답니다.”
에키온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네 마음은 알겠으니까, 그만 쳐다봐. 여기 아빠도 있다고, 에키온……!
나는 뒤통수에서 저릿한 시선을 느끼며 하하하 웃었다.
그렇게 다나와 암필라에게 육지 거북 수장을 소개하려던 자리는 졸지에 내 약혼식 통보의 장이 되어 버렸다.
* * *
“그 자리에서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어.”
쿡 찔러 들어오는 정방향 직구에, 나는 옆구리를 찔린 채 아하하 웃었다.
시선을 돌아보면 옷시중을 받는 웨일이 보였다. 커다란 체구에, 길게 뻗은 팔다리.
균형 잡힌 몸에 걸친 베이지색 정장이 몹시도 잘 어울렸지만, 내 시선은 옷보다도 지그시 쳐다보는 얼굴에 머물렀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어.”
“에키온도 놀라던데. 아주 많이.”
“그럴 거야. 당사자도 몰랐던 사실이니까.”
말 안 했거든. 그러자 웨일이 시중을 받다 말고 놀란 표정을 했다.
그러다 푸핫, 작게 웃었다.
“아하, 그래서 그렇게 놀란 얼굴이었구나. 난 또 다 아는 사실을 나만 모르는 줄 알았지.”
“그럴 리가 있겠어.”
코끼리, 하마, 육지 거북 수인들을 서로 소개하기 위한 자리엔 우리 아콰시아델 측 주요 인물들도 참여한 상태였으니.
모두가 약혼 발표를 실시간으로 들었단 소리다.
“무슨 그런 발표를 동네 술집에서 하냐고, 이미 둘째놈에게 잔소리란 잔소리는 푸지게 먹었어.”
“하하하.”
“대체 본인은 예의고 범절이고 개나 준 것처럼 사는 주제에 나한테 그러는 이유가 뭔지 몰라.”
“아끼니까 그러지 않겠어?”
“아니, 그냥 재미 들린 거지. 뭐 하나 잔소리할 게 생겼으니까. 놀랐던 건 아틀란보다도 벨루스가 한마디 했다는 거였어.”
그랬다, 아틀란이야 자신이 미리 알지 못했다는 서운함을 잔소리로 푼 것 같은데.
벨루스는 정색하고서 그런 사실을 왜 미리 알려 주지 않았냐며 서운해했던 것이다.
처음 겪는 첫째의 투정 아닌 투정에 얼마나 놀랐던지.
“벨루스 님은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놀라고 서운하고, 또 계획이 어그러져서 당황했을 테니까.”
“벨루스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
“그럼.”
웨일이 벨루스와 가까웠던가?
확실히 웨일은 치료에 관한 연구를 맡으며 내정을 돌보던 벨루스와 마주칠 일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형제 중 누구보다 아빠의 성격을 쏙 닮은 벨루스는 가까워지기 힘든 유형이었다.
“벨루스 님께서는 감사하게도 나를 좋아하시지.”
뜻밖의 이야기긴 했다.
“그보다 계획이란 건 뭐야?”
두 사람이 친해졌다면 나로선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 뜬금없이 나온 계획이란 게 궁금했을 뿐.
“아, 별거 아니야.”
웨일이 싱긋 다정하게 웃었다.
동굴처럼 낮은 목소리가 곧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알렸다.
“벨루스 님이 조만간 약혼 논의를 위해 너랑 내가 둘만 있을 자리를 마련하려 했으니까?”
“뭐?”
가끔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목소리가 반대쪽 귀로 흘러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지금이 딱 그러했다.
벨루스가 무슨 자리를 마련해?
제 연애에도 관심 없으며, 그간 내가 에키온과 뭘 하든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첫째놈이 뭘 어쩌고 어째?
“놀랐나 봐.”
“……안 놀라게 생겼어?”
웨일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뺨을 긁적였다. 희미하지만 머쓱한 표정이었다.
“벨루스 님이 내가 너랑 잘되기를 바란 게, 그렇게 놀라운 일이야?”
“……미안한데, 걔가 남의 연애사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야.”
“그게 왜? 소중한 여동생이잖아.”
난 그 얘길 네 입으로 듣는 것도 충격인데.
이런 얘기를 할까 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곧 시선을 옮겨 지금까지 말없이 옷을 정리하던 수인들에게 눈짓하자, 그녀들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고 모두 방에서 나갔다.
현재 이곳은 수도 의상실이었다.
나와 웨일은 미사가 그렇게 강력히 주장하던 제대로 된 예복을 맞추러 왔고.
이곳은 우리가 매드럼에서 함께 싸웠던 로레일의 동료. 토끼 수인 ‘레잇’의 언니가 운영하는 의상실이었다.
이 의상실로 말할 것 같으면 수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누가 됐든 1년쯤 대기해야 의상을 맞출 수 있는 곳이라나?
레잇의 언니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의 생존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우리에게 전면 협조하게 된 상황이었다.
우리가 함께 의상을 맞추게 된 경위는 간단했다.
황태자가 내게 보낸 서신, 그곳엔 우리 땅에 있는 ‘치유 능력자’도 같이 보고 싶다고 적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즉, 우리는 함께 미끼 노릇을 하게 되었단 상황이란 소리다.
이번 자리에 참여하는 파트너는 다른 누구도 아닌 웨일이었다.
“이번에 내가 네 파트너로 나가게 되었잖아.”
다들 시선 몰이는 하나 대신 둘이면 더 좋을 거라며 찬성했다.
“이런 말 해서 네가 약간이라도 신경을 쓰면 좋을 것 같아,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