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어차피 내 막사라 아무도 없었으나, 순순히 물의 힘을 써 주었다.
“바다의 맹세를 하는 대신 레바이 님께 모두 들었어요, 가주님께서 다 계획이 있으시다구요.”
“맞아.”
레바이가 미사에게 계획을 말했다면 다 이유가 있을 터. 나는 별다른 말 대신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욱더 가주님은 예복을 입으셔야 해요. 최대한 화려하게.”
“……음?”
미사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굳이 불편한 옷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있을 터.
나는 무어라 하는 대신 미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날 가주님께서 자리에 참석하시는 동안 다른 분들이 잠입하신다고 들었어요.”
“맞아, 그런데?”
“그럼 가주님께선 더더욱 시선을 잡아 둘 거리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이해가 안 되는데. 내가 예복을 차려입는 것과 시선을 잡아 두는 게 무슨 상관인데?”
“가주님께서는, 가주님의 미모를 너무 모르고 계세요.”
뻔뻔한 축에 속하지만 대놓고 찬양하는 말에는 잠시 멈칫했다.
“내가 예쁘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거랑은 상관없잖아?”
“왜 없다고 생각하세요. 가주님, 남자들은 어떤 이유가 됐든 아름다운 상대에게 시선을 빼앗기게끔 되어 있어요.”
미사가 손을 펼쳤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역시 가주님께서는 계승식 날 모든 남성들이 가주님을 어떤 눈으로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자각하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눈치가 없진 않아.”
“아뇨. 모르세요. 그러니 레바이 님께서도 설득을 시도조차 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
미사가 양손을 겹쳐 잡고 말했다.
“가주님, 제가 단 한 번이라도 가주님께 해가 되거나 불편하게 만드는 일을 한 적 있었나요?”
“…….”
없다.
“한 번만 제 의견을 들어주실 수 없을까요?”
굳이 고집을 부릴 일은 아니었다.
막말로 하이힐을 신어도 무력을 쓰는 데 문제가 없는 마당에.
정 불편하면 벗어던지는 방법도 있고.
“그래, 알겠어.”
미사의 얼굴로 화색이 돌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 생에서 엄마 같은 역할을 한 미사였으므로, 나는 이 의견을 웬만해선 철회하지 않기로 했다.
* * *
“미사. 일부러 보낸 거지?”
그날 오후.
정비를 위해 하루 정도 이 마을에 머무르기로 했으므로, 시간이 남았다.
이 마을은 규모는 작았지만 마을 조성을 참 잘해 두었고, 그중 근처 들판으로 가는 오솔길이 참 예뻤다.
‘릴리가 좋아할 것 같은 장소네.’
오래전 함께했던 여주인공을 떠올리다가 미소 지었다. 지금쯤 안전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겠지?
뱀 가문에서 애지중지하는 것 같았다.
“예, 맞습니다.”
자그마한 오솔길을 나 홀로 걷고 있진 않았다.
옆을 돌아보면 뻔뻔하게 대꾸하고 있는 레바이가 있을 테니까.
레바이가 받고 싶다던 보상이었다. 함께 산책하는 것 말이다.
이외에도 ‘피크닉’을 원했지만 가능한 상황이 아니라.
‘급한 대로 간단하게 먹을 건 들고 왔지만 말이지.’
나는 손에 덜렁덜렁 쥐고 있는 작은 바구니를 보았다. 아기자기했다.
내 인생에 이런 ‘뽀쨕’한 걸 들고 걷는 날이 올 줄이야.
말없이 걸었다. 오솔길 끝에 다다랐을 때, 내 입이 절로 벌어졌다.
“오…….”
드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새파란 하늘이 그림같이 펼쳐진 아래 한없이 뻗어 나간 들판이 저 끝에서 닿을 듯 쭉 뻗어 있었다.
‘장관이네.’
“장관이로군요.”
레바이 또한 감탄했는지, 내가 생각하던 말을 그대로 뱉었다.
“그러게 바다만큼은 아니지만 볼만하다. 난 이런 게 좋더라.”
“크고, 넓은 자연 말입니까?”
“비슷해.”
바람이 딱 기분 좋을 만큼만 불었다. 이렇게 편안하게 포근한 볕을 쬐는 게 얼마 만이더라.
아침에 기분 좋게 일어났듯이, 그때의 좋은 기분이 되살아난 듯 생긋 웃었다.
“이 정도면 피크닉 비슷한 건 되겠다. 그렇지?”
“…….”
나는 바구니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어쩔래? 더 갈래? 아니면 여기 앉을래.”
“……괜찮으시다면 조금 더 걷죠.”
“좋아.”
우리는 들판을 조금 더 걷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 잡았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미루나무 아래였다.
“꼭 동화 같네.”
“그림도 아니고 동화 말입니까?”
“응.”
바구니 안에는 간단하게 돗자리로 쓸 수 있는 귀여운 천이 있었다.
그 외에도 소풍용 찻잔이라거나 식사 대용 샌드위치와 간단한 디저트.
미사가 챙겨 준 것들이었다.
“내가 어릴 때 읽었던 동화엔 이런 그림이 그려져 있었거든.”
동화도 그렇고 애니메이션도 그렇고 말이야. 지구에서의 이야기였다.
내가 ‘시은’일 때의 이야기.
“신기하군요. 아콰시아델의 동화엔 전부 바다가 그려져 있을 텐데…….”
“그렇지.”
조금 전에 피크닉 비슷한 거라고 말했던가? 이렇게 보니 그냥 소풍이다.
‘소원은 제대로 이루어 준 셈이네.’
남몰래 뿌듯한 마음이 들어, 샌드위치 하나를 레바이에게 건네고 나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그 생각이 나네.”
“어떤 생각 말씀이십니까?”
“우리, 모든 게 끝나면 놀러 가기로 했잖아.”
레바이가 샌드위치를 든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곁눈질로 눈치챘지만 모른 척 앞을 보았다.
“우리, 전쟁이 끝나면 어디 놀러라도 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 그 시간에 전략 기획서나 한 번 더 보시죠.”
“왜, 우리가 이기고 나면 이제 어디든 가도 되잖아?”
“…….”
“산이든 들이든. 나 들판도 꽤 좋아해. 꽃밭도 좋아하고.”
3회차에 있던 어느 날이었다.
막 전쟁이 시작될 무렵, 하루하루 거세지는 싸움에 마음을 더욱 단단히 가다듬던 하루 중에 하나.
우린 그런 대화를 나눴었다.
“뻔하죠. 가주님께서는 모든 수하들과 함께 어디 좋은 곳이라도 가려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뭐 그런 생각이 없진 않았지.”
나는 한 손에 컵을 쥐었다. 차가 담긴 찻잔은 적당히 따끈했다.
언젠가 네가 내게 주었던 온기처럼.
“그땐 너랑 둘이 갈 생각으로 물어본 거였어.”
“…….”
“물론 넌 언제나처럼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말이지.”
잠시 우리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아래서 레바이의 눈동자가 찰나간 흔들렸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응. 넌 모두 기억할 것 같았어. 똑똑하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리고 네 말대로 전쟁이 평화롭게 끝났다면, 다 같이 이곳에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눈을 뜨면 잊고자 했던 얼굴들이 활짝 웃으며 서 있었다.
어떤 놈은 여기에 꽃이 폈다며 나를 불렀고. 어떤 놈들은 들판에서 아기 짐승처럼 몸싸움을 하며 힘을 겨뤘다.
저 멀리서 으하하하, 시원하게 웃는 카뮬라가 있었고.
귀찮아하면서도 동료들 사이에 억지로 끼어 이야기를 들어주는 하우저가 있었다.
그리고 아마 이렇게 되었다면 그때에도 내 옆엔 레바이가 있었을 것이다.
차차 부스러지는 나만의 신기루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요즘 모두가 내게 다수의 남편을 기대하더라. 난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데 말이야.”
“…….”
아빠가 데려온 인원들은 아콰시아델을 따르는 가신들과 그들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인사를 올릴 때에도, 이후 나를 볼 때도 한결같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제 아들을 은근히 추켜세우거나 대놓고 한번 만나 볼 생각 없냐고 물어 왔다.
3회차가 전쟁으로 바빴을 뿐,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면 그때에도 들었을 이야기였다.
새삼스럽게 위치를 자각했다.
“심지어 에키온마저 그런 얘기를 해. 자긴 첫 번째이기만 하면 만족한다고.”
“…….”
“레바이 난 말야, 평생 원하는 만큼 보답받지 못하느니, 그냥 가지지 않는 게 나은 것도 있다고 생각해.”
“어떤 사람은 보석을 가지기를 희망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그저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이도 있습니다.”
레바이의 목소리엔 고집이 어려 있었다.
“무수한 집안들이 웨일을 제 가문 일원으로 맞이하기 위해 혼담을 시도하는 이야기를 들으신 모양이군요. 예, 제게도 그런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사실 벌써 지겨울 정도입니다.”
“…….”
“아마, 아콰시아델로 곧 돌아올 돌고래 가문 일원들도 제게 이렇게 말할 테지요. 결혼해라.”
“…….”
“하지만 다들 이성적이니, 제게 다른 혼인을 강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섭지 않으십니까?”
미약한 미소마저 사라진 얼굴은 냉철한 책사의 낯이었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타산적으로 판단하던 그 얼굴.
“제가 누군가와 혼인한다면 저희는 좋든 싫든 정치적으로 많은 걸 신경 써야 할 겁니다.”
그 말이 맞다.
더는 예전 같을 수 없을 거다.
여러 부족을 통합하는 데엔 혼인만 한 게 없다. 그래서 아틀란은, 벨루스는, 그리고 리리벨은 다수의 남편을 두어 혼란을 막으라고 조언했다.
놀랍게도 아빠는 하나를 맞이할 거면 차라리 여럿을 가지라고 했다.
너마저도 여러 번 조언했다. 이성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어느 쪽이든 진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네가 나를 좋아할 만큼 좋아했으면 좋겠어. 질릴 만큼,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그러다 어느 날 시효가 다했을 때 모두 잊고 행복하길 바라. 이게 내가 너를 아끼는 방식이야.”
하지만 이미 과거를 뛰어넘어 나를 쫓아온 사람에게, 이전 생에 내가 좋아했던 사람에게 이런 말이 의미가 있을까.
“내가 널 다른 자리에 올리면 그때는 돌이킬 수도, 벗어날 수도 없을 거야.”
“그래도 좋다면.”
“…….”
“제게 지켜볼 수 있는 자리를 주시는 겁니까?”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번엔 황실과 제대로 끝장을 볼 거야. 더는 ‘다음’이 없는 세상을 만들지 않을 거고.”
“…….”
“전쟁이 끝나면 너와 내가 이렇게 더는 지금 같은 모습으로 보지 못할지도 몰라.”
가주는 가주답게. 레바이가 그 누구보다 잘 알 터였다.
“그래도 네가 괜찮다면.”
레바이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