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3화
“그게 아니더라도 생각이 있지.”
나는 미소를 지운 채 진지한 낯으로 모두를 보았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에키온을 보았다.
신기하게도, 나도 모르게 표정이 누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모든 수인이 모인다고 한들 우리만큼 원한이 깊은 수인이 더 있을까?”
실험 대상 중에 압도적인 수를 자랑하던 수중 동물 수인의 숫자를 떠올린다.
“몇 번을 싸워도 똑같다는 걸 알려 줘야지.”
나는 분노를 미미하게 품은 채, 굳은 얼굴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한번 패배한 새끼는, 무슨 짓을 해도 패배자일 뿐이란 걸 직접 보여 주자고.”
어떤 선언은 힘주어 말하지 않더라도 거대한 웅변보다 큰 공감을 이끌어낸다.
숨 막히게 가라앉은 정적 속에서 적대감을 읽는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아도 이미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 * *
“흐아암.”
아콰시아델의 저택에서는 방의 위치에 따라 눈을 뜨면 바다가 보이는 방이 있다.
귀를 기울이면 파도 소리가 들린다.
물론 나처럼 물의 힘을 깨우칠 정도로 육체 능력이 탁월한 이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나는 파도 소리에 눈을 뜨는 아침을 아주 좋아했다.
아콰시아델 땅을 떠난 탓에 한동안 그 소리를 듣지 못해 아쉽다.
이를 대신하듯 이곳에선 희미한 새소리가 들렸다. 신기했다.
매드럼은 황폐한 땅 위에 세워진 거대한 연구소 도시였으므로, 새가 살 만한 동네가 아닐 텐데.
어디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걸까?
‘아, 맞다.’
나는 그제야 여기가 매드럼, 아니. 매드럼이었던 땅이 아니란 사실을 떠올렸다.
며칠 전 우리 일행은 황실로 출발했으니까.
이동하다 말고 나타난 마을에서 짐을 풀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와, 이렇게 깊이 잔 건 오랜만이네.’
너무 깊이 잔 탓에 아주 잠시, 여기가 어딘지 잊고 말았다.
이토록 안심하고 잘 수 있는 건 아마도 이젠 일행에 아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틀란도 벨루스도 믿음직스럽지만, 만약 내가 전투 불능에 빠졌을 때. 그대로 안심하고 완벽히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아빠밖에 없는 듯했다.
무의식이 이를 증명한 것 아닐까.
‘나도 참, 능력주의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말고 누운 채 몸을 돌렸다. 모처럼 깊이 잔 김에 아주 약간만 뒹굴어 볼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
나는 누운 그대로 눈을 크게 떴다.
“깜짝이야.”
너무 놀란 나머지 물의 힘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오려는 걸 황급히 참았다.
“에키온? 너 왜…… 그러고 있어?”
침대 앞에 쪼그리고 앉은 에키온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다리가 짧은 강아지가 침대에 오르지 못해 앞발만 올린 모습을 본 기분이라고 할까.
에키온이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손만 올린 채로 바라보는 모습이 딱 그러했다.
에키온은 내가 쳐다보기 무섭게 눈을 여러 곳으로 굴리다가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렸다.
눈치를 보는 모습이 역력했다.
‘뭐야, 내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고?’
나는 누운 채로 눈만 끔뻑였다.
그 사이 에키온은 계속 눈치를 보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응? 뭐가?”
“기척을 죽이긴 했지만……. 일어날 줄 알았어.”
축 처진 목소리에 어쩔 줄 모르는 모습. 나는 곧 웃으며 누운 채로 손을 뻗었다.
에키온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냐. 그냥 놀랐을 뿐이야.”
이런 상황이 매우 신선하게 느껴지네.
“기척을 죽였다고?”
나는 곧 에키온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에키온이 기척을 잘 죽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기척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능력은, 본능에서 나오는 것.
상대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존재라면 어떻겠는가.
그러니까, 에키온을 깊이 신뢰하기에 내 몸도 반응을 하지 않았단 소리였다.
“……신기하네.”
3회차에서도 겪지 못했던 일이라 그저 신기했다.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지.
“앞머리가 많이 자랐네.”
에키온의 머리카락은 성인 남자의 것이라기엔 몹시도 부드러웠다.
따로 관리도 하지 않는데, 어쩜 이렇게 보드라운지 모를 일이었다.
“수중 동물 수인들은 대체로 머릿결이 좋은데, 넌 수중 동물도 아닌데 우리보다 더 좋은 것 같아.”
“……칼립소가 원한다면, 앞으로 더 열심히 가꿔 볼게.”
나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어.”
손가락에 파란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스치는 느낌이 좋았다.
눈을 감으면 마치 파도를 건드리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바다가 너무 좋아.”
“응.”
“네 머리 색이 바다색이라 좋아해.”
“……응.”
나는 누운 채로 에키온과 시선을 마주했다. 희미한 새소리가 들린다.
이불에서는 잘 말린 햇볕 냄새가 났고, 에키온에서는 청량한 향기가 넘어왔다.
“너랑 결혼하면 매일 아침이 이럴까?”
“……으, 응?”
성인이 된 뒤로는 어린 시절보다 조금 더 말수가 늘었던 에키온이지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키온의 귀와 뺨이 발긋 달아올랐고,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뻐끔뻐끔. 예쁜 모양을 그리는 입술이 한참을 소리 없이 움직였다.
나는 그런 에키온을 보다 상체를 들어 그대로 에키온에게 기울였다.
쪽. 귀여운 소리라고 생각했다.
입술이 떨어지자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에키온이 보였다.
“너무 눈치 보지 않아도 돼.”
아빠가 합류한 뒤로 에키온과 둘만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예전처럼 함께 방을 쓸 수도 없었다. 사실 지금도 어떻게 들어온 건지 모르겠지만.
에키온은 이를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날 향한 집착을 버리겠다고 절절한 고백을 한 뒤로 쭉 한결같았다.
“책에서 보니까 용은 외골수라던데.”
에키온도 그렇다.
자기가 고집하는 건 어떻게든 고수하려 든다.
“너도 그렇네.”
고개를 기울여 웃자, 내 머리카락이 사르르 어깨로 흩어졌다.
에키온은 입술을 살짝 감쳐물더니 이내 팔을 펼쳤다.
“……안아도 돼?”
“응. 허락받지 않아도 돼.”
곧이어 길고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에키온이 침대 아래에 앉은 채 끌어안은 탓에 자연스럽게 에키온의 머리가 내 허리에 위치했다.
툭, 에키온이 내게 고개를 기댔다. 배에서 따뜻한 숨결이 느껴진다.
“그럼……. 내가 첫 번째 남편이야?”
“……아직도 그 얘기야?”
황당한 기분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가마마저 예쁜 정수리에서 고집스러움이 느껴졌다.
이거, 반드시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로 보이는데.
“……그래, 첫 번째야. 과연 두 번째나 세 번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자 나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허리에서 기분 좋은 허밍이 들려 왔다.
그렇게 좋을까?
아니, 두 번째, 세 번째를 가정하면서도 ‘첫 번째’라는 말에 진심으로 만족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생길 거야.”
“…….”
“그래도 괜찮아.”
에키온이 평화롭게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칼립소는 내가 첫 번째라고 했으니까.”
그 얼굴에서, 말에서도 진심이 느껴져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미래라도 본 것처럼 이리 단호하게 말을 하니……. 그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속으로 항복하듯 양손을 들었다.
그저 손을 들어 에키온의 머리를 가만히 만져 주었다.
확실히, 모든 것이 끝난 뒤에 이런 평화만 찾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네에?! 옷이 하나도 없으시다구요?!!”
아빠와 함께 온 인원 전부가 전투를 위한 사람은 아니었다.
본디 전쟁이란 전투 외에도 지원, 보급, 의료 등 다양한 분야의 인원이 필요했다.
게다가 내륙에서 전투를 하게 될 경우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수원지를 찾는 능력’이었다.
수중 동물 수인은 물이 가까이 있을 때 특기를 더욱 잘 쓸 수 있으니 말이다.
미사는 수원지를 찾는 특기를 가진 지원 인력으로 참여했다.
비슷한 특기를 가진 이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는데, 만난 지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시작은 경악이었다.
“레바이 님께 들었어요, 황성으로 가신다면서요? 황성에서 개최하는 그, 연회에도 나가신다고 들었는데.”
“응, 맞아.”
“그런데, 전투복을 입고 가신다고요?”
“뭐가 잘못됐어?”
“당연히 잘못됐죠!”
미사는 에이야를 비롯해 시녀들이 있었다면 기함했을 거라며 흥분한 얼굴이었다.
“예복은 가문의 얼굴이나 다름없어요! 그런데 모든 수인이 모이는 자리에 전투복이라니요!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음, 미사. 어차피 황실에게 잘 보일 이유가 하등 없는 자리야.”
놀러 가는 자리가 아니다. 굳이 내 가주 계승식 때처럼 차려입을 필요가 없다.
미사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혹시 레바이 님께도 이렇게 말씀하셨나요?”
“응, 그런데?”
“……그래서 저를 찾아오셨구나.”
“응?”
미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외부로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