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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262화 (262/275)

제262화

무슨 말인가 고민하기도 잠시, 금세 상황 파악이 됐다.

황태자이자 원작 남자주인공 케일은 겉보기엔 이상적인 황태자이지만.

실상 파헤쳐 보면 약간의 허세와 완벽주의 기질이 다분했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엄격한 것만큼 타인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들이댔다.

원작으로 볼 때는 주인공인 릴리를 보호하는 일에 철저한 사람으로 나오지만.

내가 직접 본 모습으로 판단하건대, 그건 보호가 아니라 과한 통제와 감시였다.

릴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삶을 억압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 이것도 먼 옛날. 1회차에 그놈을 한번 꼬셔 보겠답시고 행동했다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러니 현재 상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놈은 내가 만든 이 상황이 정말 마음에 안 들 테지.’

사자로 태어나 평생 떠받들어진 인간이다.

자비로운 척하지만 육지 맹수 우월주의에 빠진 전형적인 차별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등하다고 생각하는 데다가, 한 번 패배까지 당한 대상이었던 내게.

이토록 크게 한 방 먹었다?

마음에 들지 않다 못해 분노로 미쳐 날뛸 것이다.

보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라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어쩌면 그놈의 가족보다도 놈을 잘 알고 있을 터다.

웃기지도 않은 농을 떠올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코끼리 수인의 수장 다나와 하마 수인 암필라가 내게 황태자의 소환 명령이 적힌 서신을 직접 보여 주었다.

이후 우리 일행은 물론, 남은 원숭이들의 수장이자 새로운 도시의 공동체 영주가 된 로레일까지 모여 회의를 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집무실에 앉아 책상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참, 다시 봐도 감탄스럽네. 어쩜 이렇게 핵심만 빼돌렸냐…….”

내가 보고 있는 건 매드럼 연구소에서 레바이가 가져온 연구 자료 원본이었다.

이미 한번 본 자료이지만 재확인 차 보는 중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니까요.”

“네 똑똑함을 티 나지 않게 어필하는 그 모습도 늘 감탄스럽다.”

“칭찬 감사합니다. 기왕 해 주시는 칭찬 다음에 보상이라도 내려주시면 감사하겠군요.”

나는 잠깐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레바이를 보았다.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나 보네?”

“예. 말하면 들어주십니까? 일단 이야기는 해 보겠습니다.”

“해 봐.”

“저랑 산책 한번 가 주십시오. 피크닉도 좋습니다.”

나는 잠시 감탄했다.

“……이 인원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너도 참 대단하구나.”

저 한마디로 이 집무실의 온도가 체감상 십 도쯤 내려간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내가 앉아 있는 바로 옆자리에는 에키온이 있었고.

하우저가 저기 서 있었으며, 웨일이 싱글 웃으며 벽에 기대선 상태였다.

그뿐일까.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아틀란과 뜻밖에도 싸늘한 표정의 벨루스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내 맞은편에 고요하게 앉아 있는 아빠가 있었다.

“저는 누구누구처럼 음흉하게 속이는 짓은 더는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사람이 진솔한 매력이 있어야지요.”

……모두가 저를 쳐다보거나 노려보는 한복판에서 무표정하게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재주였다.

“가주님, 제가 돌고래 역할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 있다면 저놈은 사라져도 상관없으십니까?”

하우저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웨일이 다정하게 웃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찬성한다나.

너희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 아니었니.

“이제 형이 다치면 죽지 않을 정도만 살려 줄게. 하하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웨일의 말을 듣다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옆에 앉아 있는 에키온의 손을 조용히 토닥여 주었다.

“아빠, 미안한데 물의 힘은 좀 가라앉혀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쓰진 않았다만.”

“……목에 가져다 댄 게 위협이 아니면 뭔데.”

그러자 아빠가 조용히 레바이 주변에 일렁거리던 물줄기를 치웠다.

사실 이 자리엔 지난 생의 기억이 있거나, 혹은 내가 그 기억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만 모이게 했다.

황태자에 대해 논의할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생과 이번 생은 분명 구분되어야 하지만, 황태자 그놈의 과거 행적을 다각도로 재검토했을 때 놈의 이번 생에 꾸민 모략이라거나.

혹은 나 혼자서는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이 나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일행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여기에 자리했다.

바로 하우저가 기억을 되찾아준 카뮬라였다.

“이야, 신기하네요. 정말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라…… 감격해야 할지 경악해야 할지.”

카뮬라는 아빠가 있는 소파 뒤에 선 채 한 손에는 과자가 담긴 접시를 들고 있었다.

하얀 과자를 열심히 먹는 모습이 흡사 팝콘을 먹으며 흥미진진한 영화에 빠진 관객처럼 보이는데, 착각은 아니겠지?

“우리 가주님을 두고 치정이라니.”

“카뮬라, 넌 또 표현 선택이 왜 그래?”

“아, 제가 실수했네요. 그러고 보니 범고래도 다수의 배우자를 두는 게 가능했죠?”

카뮬라가 잊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지난 생엔 가주님이 하도 이성에 관심이 없어서 깜빡 잊고 있었지 뭐예요. 다들 가주님은 평생 혼자 늙어 죽을 줄 알았다니까요? 아니면 책사랑 어느 날 갑자기 혼…… 크흠. 크흠.”

카뮬라가 흉흉해지는 분위기를 느끼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나는 짧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서류를 들어 올렸다.

“황태자의 행보는 사실 지난 생과는 꽤 다르긴 하지만.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본론에 들어가자 다들 조금 전까지의 감정적인 낯은 잊고 경청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놈은 지난 생에 우리에게 한번 패배했다. 심지어 제 모든 세력을 끌어들여서 총 전력을 다했음에도 그랬지.”

물론 그 결과, 애꿎은 용 공작을 폭주시키는 바람에 다 같이 멸망 엔딩을 맞이했지만.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애석하게도 멍청한 새끼는 아니라 학습 능력이 출중했던 모양이야. 게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지난 생을 기억하는 모양이고.”

카뮬라가 움찔했다.

한쪽 다리만 더욱 떠는 걸 봐서는, 다리를 절었을 때의 경험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나는 손에 있던 서류를 툭툭 쳤다.

“이번 생에서 그놈이 주목한 건 ‘용’이다.”

이미 어린 에키온을 만나면서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황실은 용을 통제하고 제 손아귀에서 주무르려 했다. 그때는 단순히 이렇게만 생각했지만.

“현세대의 어린 용 공작을 감금, 세뇌시키려던 건 물론.”

뱀 수인의 정글에서 보았던 용의 무덤 앞 전투라거나.

“오래전 용 공작의 작위를 벗어나 방랑하던 용의 무덤을 찾아다녔고. 그 결과 용의 사체를 모았다고 하지.”

매드럼 연구소에 설치되어 있던 ‘테라’란 이름의 용의 힘을 닮은 에너지 덩어리라거나.

끝으로 매드럼에서 가져온 서류를 보았을 때. 그저 단순하게 볼 수 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이미 땅의 힘은 한차례 우리 쪽이 가진 물의 힘에 패배했다. 놈은 이번엔 용의 힘을 끌어들여서라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싶은 거겠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나는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매드럼으로 가게 된 건 뱀 영지에서의 일이 촉발제가 된 덕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조금 더 신중하게 갔으리라.

그리고 그랬다면, 이곳에서 실험 대상이 된 수인은 더 오랜 시간 고통을 받았겠지. 혹은 죽었거나.

종이 귀퉁이가 와그작 구겨졌다.

“매드럼에는 놈들이 사용하던 ‘테라’ 외에는 용의 사체나 용의 힘이 더는 없었어.”

이건 같은 용 공작인 에키온이 말해 준 사실이었다.

“나는 확신해. 놈이 끌어모은 나머지 용의 사체가 분명 황실에 있을 거야.”

애초에 중요한 걸 남에게 맡길 줄 모르는 인간이다.

한번 실패를 겪은 탓에 완벽주의 성향은 더욱 집착적으로 변했을 게 분명했다.

매번 스스로 더럽고 하등하다고 외치던 아콰시아델 영지에 와서, 상어들의 반란을 도와 우릴 방해하려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지 않아도 될 것을 해야 할 정도로 강박적인 상태란 거다.

“그리고 우리가 황성으로 간다면 분명 뭐든 간에 함정을 준비한 채 끌어들이려 들겠지.”

우습게도 한발 늦게 우리 쪽에도 황실의 소환 명령이 적힌 서신이 도착했다.

“여기에 응해 황실로 간다. 단, 모든 인원이 전부.”

아빠는 여차하면 전쟁이 나더라도 문제없이 치를 수 있게끔 대단위 인원과 함께 이곳에 도착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황태자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면, 이에 대한 대응책은 있으십니까?”

레바이의 질문에 나는 느릿하게 끄덕였다.

“완벽한 정답은 아니지만, 여기 적혀 있더라? 해결책.”

내 손에서 모서리가 구겨진 서류를 들어 보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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