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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261화 (261/275)

제261화

그리고 올 것이 왔다는 양, 아빠가 은근하게 질문했다.

나는 어느새 매서워진 눈매를 보며 아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아빠가 그간 내 주변의 이성들을 얼마나 경계해 왔는지 잘 아는지라 이제 어떤 반응이 나올지 익히 예상이 됐다.

‘에키온, 물대포라도 맞는 거 아니야?’

장난스럽게 상상했지만 사실 물대포로 끝나면 다행인 일이었다.

“음, 아빠.”

“듣고 있다.”

“그, 하하, 이렇게 됐어.”

아빠는 턱을 괴더니 느슨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언제부터 그런 관계가 되었느냐는 질문의 답이 아닌 것 같다만.”

이런, 변명은 씨알도 안 먹힐 테니 알아서 하란 소리군.

나는 깔끔히 항복하고 양손을 들어 올렸다.

“얼마 안 됐어.”

“얼마나 말인가?”

결국 나는 아빠에게 그간 에키온과 있었던 일을 모두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아빠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들었지만, 그 어떤 때보다 경청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무튼 이렇게 되었거든.”

아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뺨을 긁적이며 슬쩍 눈치를 보았다.

“아빠, 부탁이 있는데…… 에키온 때리지 말고.”

“정당한 결투 신청을 통해 진행하라는 건가?”

“결투를 왜 하는 건데. 그보다 그건 누구 하나 죽어야 끝나잖아?”

“세상엔 나와 양립할 수 없는 인간이 있지.”

“그게 에키온이라고?”

“아니.”

아빠는 턱을 괸 손을 떼어 내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네 남편.”

“……결혼하지 말란 말을 아주 신기하게 하네. 우리 아빠는.”

나는 웃었다.

“그러다 누구 하나 묻어 버리겠어.”

물론 저런 얼굴을 해도 이성적이고 냉철한 아빠가 정말 사람 하나 슥삭 하진 않겠지만.

“묻는 곳이 심해여도 괜찮다면야.”

……이성적인 거 맞겠지?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에키온을 바다에 넣지 말라’는 말을 굳이 하자, 아빠가 피식 웃었다.

“용 공작 그놈만?”

“응?”

“따지고 보면 심해에 들어갈 놈들이 꽤 많던데.”

아빠의 입에서 돌고래, 흰수염고래, 이윽고 하우저 얘기까지 흘러나왔다.

“아콰시아델의 공동묘지 터는 꽤 넓은 편이니 여럿 들어가도 티도 나지 않을 거다.”

“그런 소릴 진지한 표정으로 하지 마. 진짜 같잖아.”

“…….”

“침묵하지도 말고.”

아빠랑 마주 보다 말고 어느 순간 거짓말같이 함께 웃었다.

아빠는 언제 딱딱한 표정을 지었나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낯이었다.

“사실, 네 엄마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정말 누구 하나쯤은 네 몰래 어떻게든 했을지도 모르겠군.”

무뚝뚝한 목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다정한 손이 올라왔다.

나는 문득 아빠가 말한 ‘어떻게’가 참 궁금해졌지만 아빠의 얼굴을 보며 넘어갔다.

“시저, 아니, 엄마가 아빠한테 뭐라고 했는데?”

“별말은 안 했다.”

거짓말. 하지만 나는 추궁하는 대신 아빠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저 그런 존재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인생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달라지는 기분을 알게 되었을 뿐.”

평소보다 조금 높고 감정 가득한 아빠의 음색에서,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있다는 걸 알았을 때의 기분을 약간이나마 알 수 있었다.

“네게도 그런 사람이 생겼다면, 그때부터는 아비인 내가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

“……그럴 거면서 왜 묻느니 마니, 심해 같은 이야길 꺼낸 건데?”

“이성과 감정은 다른 법이니까.”

아무래도 이 방을 나서서도 안심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에키온은 물론 레바이나 하우저, 웨일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아빠를 의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네 엄마가 그러더군.”

“…….”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고.”

아빠가 쓰다듬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러더니, 곧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아빠의 물줄기에 들려 그대로 아빠의 품에 꼬옥 안겼다.

“그 말 또한 네가 있었기 때문에 들을 수 있었다.”

“…….”

“가족이 모두 모일 수 있는 것도 네 덕분이지.”

포근하고 아늑한 품. 이제는 내가 잃을 일 없는 품이다.

눈앞의 아빠라면 직접 낳은 딸이 생겨서 나를 잊을 거란 걱정도, 언젠가 나 아닌 자식이 생길 거란 염려도 하지 않아도 된다.

해묵은 걱정이 머릿속을 스쳤다가 사라진다.

커다란 싸움을,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싸움을 앞둔 지금 가장 평화롭고 따뜻한 품이었다.

“……나이 먹고 이러니까 조금 쑥스러운데.”

“뭐 어떤가. 아무도 보지 않는데.”

아빠가 나를 안은 채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내겐 언제나 조그맣고 어린 딸인 것을.”

왜일까, 저 먼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우리 시은이, 언제나 행복해야 해.”

다정하고 또 다정하던 다른 세상의 아빠의 목소리가. 아마도 착각일 게 틀림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떠올렸기에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이리라. 나는 이제 이 목소리를 편안하게 보내 줄 수 있다.

나는 키득거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래, 그럼 조금만 이렇게 있자, 아빠.”

* * *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다.”

아빠가 이렇게 말했다.

이런 말을 듣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커다란 회의실에서 아빠가 말했던 손님들을 보게 되었다.

거대한 덩치의 여성과 남성이었다. 각각 연한 회색 머리와 엄청 진한, 진회색 머리를 가진 남녀였다.

이렇게 말하면 남매 같은 느낌이 들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생김새였다.

남들보다 입술이 배로 두껍고 커 보이는 남성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이쪽이 범고래 가문 수장님인가?”

격 없는 목소리였다.

무례하고 거친 느낌이 났지만, 신기하게도 몸에 잘 어울리는 듯해 불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마 가문에서 온 암필라 히포네스다. 가주의 명을 받아 그대들과 협력하고자 한다.”

입이 큰 대신 귀가 유독 작아 보이는 남자는 자신을 하마 가문의 2인자라 소개했다.

모르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저 이전 회차에선 적으로 만나 성가시던 상대를 이렇게 봐서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을 뿐.

나는 손을 뻗었다.

“반가워. 당신 말대로 내가 여기 대장.”

그에게 맞춘 가벼운 대꾸에 암필라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러다 곧 얼굴이 사색이 됐다.

‘하마들은 하나같이 으스대기 좋아하는 성격이란 말이지.’

동시에 서열이 확실했다.

타인이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것만 보여 주면 금방 고개를 숙인단 소리다.

곧이어 암필라가 크흠크흠 헛기침하더니 자세를 고쳤다.

훨씬 겸손한 자세였다.

자연에서는 경쟁에서 진 수컷을 쫓아내거나 죽이는 걸로 모자라 패배한 수컷의 새끼들도 모조리 죽일 만큼 보복이 확실한 동물답게 서열에 매우 예민한 수인이었다.

“이제 제 차례인가요?”

그간 옆에서 차분하게 서 있던 여성이 입을 열었다.

침착하고 온화한 얼굴이었다.

얼핏 온순하게까지 보였지만, 나는 이 여성이 누군지 이미 알아차린 뒤였다.

“이 오만한 하마 족속을 한 손으로 제압하는 솜씨라니, 인상 깊게 봤네요.”

하마 수인과는 다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너무 과하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인사였다.

“코끼리 수인들의 수장 다나 리펀트예요.”

암필라와 마찬가지로 3회차에서 적으로 보았던 코끼리 수인이었다.

가장 어려운 전투 중의 하나였던 들판 지대 전투의 주역들과 손을 잡다니.

역시나 생경한 기분이었다.

“칼립소 아콰시아델. 말했듯 범고래 수인들의 수장이야.”

“그리고 수중 동물들의 수장이기도 하죠. 잘 알아요.”

그들이 먼저 협력을 위해 직접 손을 내밀었으니까.

나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코끼리들의 수장을 보았다.

“수장이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오지 않을 수가 있나요?”

다나가 입을 가리며 살풋 웃었다. 코끼리들은 하나같이 온화하고 다정한 인상이었지만.

“우릴 도와준 건 당신들이 먼저인걸요. 은혜를 갚으러 왔습니다.”

한번 전투에 들어가면 미친 사람처럼 날뛰는 족속이기도 했다.

게다가 카뮬라 못지않게 맷집이 좋아, 제아무리 근접 전투에 능한 범고래들이라도 정말 애를 먹었던 상대기도 했다.

“매드럼에 잡혀갔던 우리 일족을 무사히 돌려보내 줘서 고마워요.”

다나가 처음이랑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를 본 암필라가 놀라더니 허둥지둥 함께 허릴 숙였다.

“크흠, 저도 하마 수인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 입니다.”

급 정중해진 목소리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으나, 꾹 참았다.

“인사는 서신으로 충분히 받았어. 그대들이 온 건, 직접 참여하겠다는 의지인가?”

“우리 일족은, 일족을 건드린 이는 지상 끝까지 쫓아서라도 복수를 진행해요.”

다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황실로 가는 길에 함께하겠노라고.

암필라 또한 똑같은 말을 건넸다.

하마와 코끼리 수인들은 매드럼에서 일어난 일을 까맣게 몰랐던 수인 중 하나였고.

초식동물 수인들과 더불어 꽤 많은 수인들이 희생된 축에 속했다.

그들은 황실에 여러 차례 항의 서한을 보냈지만, 만족할 대답을 듣지 못했고 돌아온 건 우리가 보낸 끔찍한 실험의 증거들이었다.

그들은 기어이 직접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피에는 피로.

“희생된 수인 중에는 제 남동생도 있었지요. 그 애는 호기심이 많은 외교관이었지만 동시에 한 가정의 가장이었답니다.”

“…….”

유감을 표하자, 다나는 아니라며 살짝 웃었다. 그 얼굴에서 결연함이 보였다.

“그나저나 칼립소, 당신도 들었나요?”

“뭘?”

“아, 아직 여기까지 전해지진 않았나요? 당신의 부친은 알고 있던데.”

자연스럽게 함께 있던 아빠를 응시했다. 무슨 소리지?

“황실에서 우리에게 대대적인 소환 명령을 내렸어요.”

다나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직접 와서 전말을 들으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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