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9화
* * *
“……그래서 살아남은 원숭이 놈들 중에서 반항하는 이들이 나와서 그대로 힘을 좀 썼는데.”
“…….”
“그중 하나가 황실과 연락을 주고받은 것 같아요. 역시 황실도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아니었던 거죠.”
“…….”
“가주님?”
나는 살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물론 속으로만 놀랐을 뿐 겉으로는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였다.
그러나 삐딱하게 서 있는 이는 이미 그런 나를 잘 안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린 채였다.
삐딱한 낯을 하고서도 우아하기 짝이 없는 내 사촌 리리벨이었다.
“들으시긴 한 거죠?”
나름 공식 석상이라 정중한 말씨였지만 안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해석하자면 ‘너 내 말 듣기는 했냐?’랄까.
“어어, 들었어.”
“듣기는 무슨.”
나는 목 뒤를 어루만지며 머쓱하게 웃었다.
“존대를 하든 반말을 하든 하나만 해.”
“대체 어디에 정신이 팔리신 거예요?”
‘이 중요한 시기에?’ 하는 말이 생략된 듯했다.
그러더니 리리벨이 홀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
“아니면…… 아직 몸이 좋지 않으신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미안한데 딴생각을 좀 했어.”
“……솔직하시니 참 좋네요.”
전혀 좋다는 말투가 아닌데. 리리벨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래요, 그 중요한 ‘황실’ 이야기에도 집중 못 할 만큼 가주님의 관심이 쏠린 문제가 뭔데요?”
음,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답을 하지 않았을 뿐 이야기는 들었다. 황실과 연락을 취한 원숭이 놈이 있다는 것.
‘이미 예상했던 바기도 하고.’
“관심 없던 건 아니야. 이미 레바이가 먼저 조치를 취했을걸.”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세요? 실제로 그 자리에 있으셨던 것처럼 말씀하시네.”
“뭐, 너희를 잘 아는 거지.”
그러자 리리벨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언뜻 보면 화난 얼굴 같았다.
참 안타깝게도 우리 범고래 친구들은 칭찬에 솔직하게 반응할 줄 모른다.
이게 어릴 때 교육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부모의 잘못이지.
나는 리리벨의 표정이 더욱 딱딱해지기 전에 턱을 괴던 손을 풀었다.
“리리벨, 넌 연애를 해 봤던가?”
“뭐? 콜록!”
답변하다 말고 사레들렸는지, 기침을 해 댔다. 간신히 진정한 리리벨이 목을 쓰다듬으며 사선으로 쳐다봤다.
“갑자기 그게 무슨 질문이에요?”
“별 이유는 없고, 중요한 보고는 끝났잖아?”
“뭐…… 우리 인생에 연애란 게 중요하긴 한가요?”
리리벨의 평생 목표는 후계자가 되고 다음으로는 가주가 되는 것이었으나, 내게 패배한 순간 바뀌었다고 했다.
“어릴 적에 약혼자 정도는 있었고, 후계자에서 떨어진 뒤에도 나름 없진 않은 것 같은데요?”
“배신자.”
“네?”
“내가 뼈 빠지게 가문을 바로 세울 동안에 넌 연애나 했다고?”
“무슨……. 어떻게 해석하면 그렇게 되는 건데요?”
우아한 얼굴에 찰나 경멸이 어렸다. 물론 농담이었으므로 나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들어 봐, 네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갑자기요? 네. 그래요.”
“네가 드디어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사람이 갑자기…….”
“갑자기요?”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심각하게 읊었다.
“자기 말고 다른 남편이 있어도 괜찮다고 하면 어떡할래?”
“완전 고맙죠? 횡재 아닌가.”
“…….”
“가주잖아요. 가주는 여러 남편을 두는 사람이고요. 가주님 얘기 아니에요?”
“누가 내 얘기래?”
“그럼 누구 얘긴데요? 가주님 친구 없으시잖아요?”
“왜 없어.”
졸지에 친구 없는 인간으로 만드네.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빤히 리리벨을 응시했다.
“너 있잖아. 너.”
“……!”
그러자 리리벨의 흰 뺨이 발긋 달아올랐다.
쟨 연애 얘기엔 단 한 톨의 변화가 없더니. ‘친구’ 한마디에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니 웃음이 피식 나왔다.
“저를, 그렇게, 음. 뭐 가주님 정도의 친구라면 되어 드리죠.”
“오냐. 그래서 말이야. 내가 지금 머리가 아프거든?”
“왜요?”
“아니, 고백했더니 상대가 다른 남편이 있어도 좋다고 했다니까?”
“……? 그럼 고맙다 하고 두면 되잖아요?”
“말이 되는 소릴 해. 어떻게 사람이 동시에 두 명, 세 명을 좋아해?”
“그렇죠. 애정엔 차등이 있는 법이에요. 그러니 남편을 여럿 두면서 차등을 주면 되잖아요?”
의논 상대가 잘못된 걸까. 그나마 또래 여자애니까 말이 통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이전에 범고래라는 사실을 먼저 떠올렸어야 했나 보다.
내가 말을 돌리기 위해 입을 열려는데, 리리벨이 더 빨랐다.
“일처다부제 가문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시는 거예요? 수중 동물 수인들 중에도 꽤 많은 것도 아실 텐데. 황후와 황비의 차이처럼 차등을 두세요. 한 사람의 자리를 확실하게 두되, 그 아래에 다른 이를 두는 건 상관없잖아요?”
“……아니.”
“용 공작이야말로 제가 보기엔 결코 쉽게 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고민하시는 거잖아요?”
“내가 에키온이라고 말을 안 해도 알 만큼 잘 보였니?”
“뻔하죠. 제가 아틀란 아콰시아델도 아니고 눈치가 없진 않답니다. 오히려 용 공작의 집착을 모르는 수인이 가주님 근처에 있기나 하겠어요?”
“…….”
“오히려 그 위험한 집착을 누르기 위해서라도 저는 다른 이들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영지를 위해서라면 더더욱 부군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호족 사회와 같은 수인들을 통합하는 데엔 혼인만큼 좋은 것이 없다. 리리벨은 정론을 내세웠다.
“그래, 의견 고마워.”
내가 뺨을 긁적이자 리리벨이 모양 좋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더니 한숨 쉬듯 말했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 당신은 지독히 외로워 보였어요. 어릴 때 이야기긴 하지만요.”
“…….”
“그러니 되도록 많은 사람을 옆에 두고 사랑받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고개를 돌리자 리리벨이 먼 곳을 바라본 채로 말을 잇고 있었다.
쑥스러운지 발긋 달아오른 귀가 보였다.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린 탐욕스러운 범고래고, 많을수록 좋은 거잖아요?”
* * *
쾅!
온통 붉은색으로 꾸며진 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방 안.
화려한 금발을 가진 미남자가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바닥에는 피가 낭자했고 쓰러진 이가 보였다.
머리 쪽에서는 둥글게 피 웅덩이가 그려져 있었으며, 뚝뚝 떨어지는 피가 파문을 그렸다.
“다시 한번 말해 봐. 뭐?”
“…….”
쓰러진 이는 다른 곳에서 온 사절의 소식을 전한 시종이었다.
마찬가지로 쓰러진 시종과 같이 왔던 가신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무려 하이에나의 수장 바로 다음가는 실력자였지만, 눈앞의 황태자가 내뿜는 기세엔 사자 앞 사슴처럼 졸아붙을 수밖에 없었다.
“묻고 있지 않나, 타스렌 공.”
타스렌 엔다이데. 하이에나 가문에서 온 그는 숨을 참았다.
“그, 그게……. 도, 동대륙과 북대륙에서 이번 일에 대한 명확한 해, 해명을 요구하며…… 황실의 입장 표명이 없다면, 앞으로 중앙의 일에 어떠한 협조도, 하지 않을 거라고…….”
동대륙에는 초식 동물 중에 제왕이라 할 수 있는 코끼리 수인이 살았다.
이뿐일까, 성질 더러운 하마 수인도 함께 제국의 동대륙을 양분하고 있었다.
그들은 황실과 대립은커녕, 황실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들에게 손해가 아닌 한 미온적으로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번 매드럼 멸망과 함께 끔찍한 소문이 전 제국에 퍼졌다.
범고래놈들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소문은 손을 쓸 틈도 없이 구석구석 퍼지고 말았다.
황실에서는 허겁지겁 매드럼과의 관계를 잘라 내며 결백을 표명했으나, 범고래들은 이를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 증거 자료를 꺼내 다시 한번 못 박아 버렸다.
‘황실이 끔찍한 인체 실험을 명령했다!’
매드럼이 한 모든 인체 실험에 황제의 인가 혹은 협조가 있었음이 만천하에 밝혀졌다.
영악하게도 각 수장들에게 복사본 자료까지 돌린 탓에 수습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로랜드, 마지막까지 도움이 안 되는군.’
이게 다 평소 지우라고 했던 자료조차 지우지 않고 멋대로 죽어 버린 로랜드 탓이었다.
로랜드는 극성 황태자 지지자로, 사이비 신자처럼 그를 따랐다.
황태자의 인장이 있는 종이를 어찌 제 손으로 태우겠냐며 고이 보관했던 것이 그들의 패인이었다.
구출된 실험 대상들 외에 지금까지 죽은 이들 중엔 다양한 수인이 있었다.
지금 들고 일어나거나 황실의 해명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가문의 일원들 말이다.
황태자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모두 모이라고 해.”
황태자가 어둠 속에서 눈을 빛냈다.
“예, 예?”
이번 매드럼 인체 실험 문서엔 정말 다양한 수인들이 동원된 탓에 황실의 아래엔 맹수들이나 본래부터 그들에게 충성하던 흑표범 정도나 남아 있었다.
“해명, 필요하다며?”
황태자가 얼굴을 가리고 큭큭대며 웃었다. 하이에나 타스렌은 등 뒤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직접 와서 들으라고 해. 그 해명.”
살아서 들을 수 있다면 말이지.
“당장 전령 보내.”
“네, 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