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58화 (258/275)

제258화

“수도에 있는 놈들, 그리고 곳곳에 퍼진 육지 놈들이 우리가 피해자라고 하면 누가 들고 일어나겠냐.”

나는 아마도 평화롭게 지낼, 매드럼에서 있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을 육지 동물 수인들을 떠올렸다.

“이 끔찍한 연구는 사실 황실이 지시한 것이다. 증거가 범고래의 손에 들어갔다.”

황실은 대단한 권력을 가졌지만, 실상 그들의 일신상 강함 외에도.

이 넓은 제국에서 지주나 다름없는 가문들이 황실을 향해 굳건한 믿음을 보이기에 유지할 수 있는 권력이기도 했다.

실제로 벨루스와 아틀란, 리리벨과 레바이는 연구소에 들어가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자료를 챙겨 왔다.

황실과의 연결 고리라거나 끔찍한 실험의 증거가 될 자료들을.

‘레바이가 그중에서 엄청난 공을 세웠댔나.’

누가 우리 측에서 자료 취급하는 놈 아니랄까 봐 샅샅이 뒤지더니 중요한 걸로만 챙겨 왔단다.

하우저 다음으로 봤던 놈이 레바이였는데, 혹시나 PTSD라도 왔을까 걱정했더니.

멀쩡해서 다행인 한편 기운이 빠졌던 기억이 난다.

“로레일 측에도 원조를 요청해.”

구출해 온 수인들은 정말이지 다양한 동물이 섞여 있었기에.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소문은 퍼져 나갈 거다.

‘다만 내가 참여하면 절대 헛소문으로 취급하지 못할 영향력을 보이겠지.’

“2차 지원 부대 오고 있댔지? 그쪽에도 전달해 둬.”

“……그래.”

“로레일에게 준 것처럼 자료 사본도 만들어서 각 영지에 보내 버리라고 해.”

“오, 좋은 생각인데?”

아틀란과 벨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래 전투보다도 전투 뒤의 수습이 더 어려운 법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현재 내 부재를 채우느라 바쁜 상황이었다.

“야, 나랑 벨루스가 거의 끝이지?”

“넌 아직도 형이라고 안 하냐?”

“누가 형이래?”

“그러다 얻어맞지.”

나는 쯧 혀를 찼다. 아틀란은 발끈하려다 말고 은근히 벨루스의 눈치를 보았다.

보아하니 형으로 충분히 인정하는 모양인데, 지난 생에서나 이번 생에서나 워낙 사이가 좋지 않았다 보니 영 부르기 어려운 듯했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야, 가주님.”

아틀란이 나를 불러 놓고 뜸을 들였다.

“뭐야, 불러 놓고 왜 말이 없어?”

“그…….”

아틀란이 뒤통수만 벅벅 긁어 대자 보다 못한 벨루스가 나섰다.

“용 공작은 언제 만날 거야?”

“…….”

“-라고 물어보고 싶은 것 같은데. 저놈은.”

“어어, 그래! 맞다!”

아틀란은 어영부영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았으면 벨루스의 참견을 탐탁지 않아 했을 텐데.

많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너 말이야, 그렇게 끼고돌던 건 언제고, 어떻게 다른 놈들 다 돌 때까지 한 번을 안 부르냐?”

“…….”

“그러면 안 돼, 어쨌든 간에 너 때문에 그 뭐냐, 도시도 하나 날려 버린…….”

“푸흡,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어?”

“뭐?”

“아니, 필사적으로 편을 들어주려는 게 신기해서. 폭주를 너와 하우저, 첫째가 열심히 막았다던데. 그런데도 편을 들고 있잖아.”

고생했을 텐데.

“너 때문에 그 도시를 날려 버렸는데, 네가 만나 주지 않으니까. 그래, 신경 쓰였다. 됐냐?”

“…….”

“이러니저러니 해도 네가 새우만 할 때 데려와서 억지로 계속 보게 했잖아. 짜증 나는데 미운 정이니 뭐니 들었다. 왜? 젠장, 다 너 때문이야!”

“……억지는.”

내 말에 아틀란은 씩씩대며 등을 돌렸다. ‘역시 괜히 말했다’는 불평불만과 함께.

나는 그런 아틀란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가면서 에키온을 여기로 불러 줘.”

아틀란이 움찔하며 돌아보았다.

‘이것 보게?’ 하는 표정이었지만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인 채 다시 돌아섰다.

방에서 얼마 기다리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렸다.

“잠깐, 밀지…….”

“뭐 해, 빨리빨리 들어가라고.”

아틀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발로 차이는 소리와 함께 문 앞으로 누군가 힘없이 쓰러지더니…….

동시에 문이 달칵하고 닫혔다.

“…….”

바닥에 힘없이 쓰러진 사람은 당연하게도 에키온이었고, 문틈 사이로 보였던 에키온을 걷어찬 발은 아틀란의 것이었다.

‘이 미친놈이…….’

어처구니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짚어야 하는 거야.

에키온이 아틀란이 발로 찬다고 어디 순순히 당해 줄 사람이던가.

아틀란은 또 언제부터 에키온을 챙겼다고 애틋하게 걷어차 주길 한단 말인가?

‘내가 사실 한 1년쯤 기절했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에키온.”

조심스럽게 에키온을 불렀다가 흠칫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상해 있었으니까. 핼쑥한 낯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처럼.

그럼에도 빛이 날 만큼 아름다운 미모는 여전했지만 영 시들시들한 것이, 흡사 죽기 직전의 식물 같았다.

이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비틀거렸다.

“윽…….”

“칼립소!”

분명 문 앞에 쓰러져 있던 에키온이 어느새 나를 붙잡고 있었다.

나는 에키온의 품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 역시 말랐어.

내가 그리 오래 기절하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설마 한 끼도 먹지 않은 걸까?

내 방에 들어왔던 누구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기에, 섣불리 물을 수 없었다.

그보다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었으므로.

“미안해.”

“…….”

“널 부르지 않은 건 네가 싫어서가 아니야.”

좀 더 차분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조금 다급하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에키온이 내 손을 꼬옥 잡았다.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았어.”

“에키온.”

“……불러 줄 거라 생각했으니까.”

“…….”

에키온의 힘에 떠밀려 그대로 푹 안겼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큰 몸이 잘게 떨렸다.

“내가 두려운 건 더는 너를 보지 못하게 되는 거야, 칼립소.”

아.

나는 얼른 손을 둘렀다. 에키온이 안심하고 울 수 있도록.

가슴이 술렁거렸다.

“이때까지, 네 곁에 아무도 남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어.”

에키온은 울지 않았다. 대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괴로운 얼굴로 숨소리를 참으며 말했다.

“때로는 내가 힘을 써서라도, 그리하여 네 주변에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만족할 것 같은, 집착에 시달렸어.”

결코 가볍지 않은 고백에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에키온은 바란다면 폭주라는 수단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다.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의 고백 앞에 압도되었다.

“이번에 깨달았어. 이번에 네가 죽었다면, 죽어서 다시 생을 살아 보게 되어도, 똑같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에키온의 한마디는 내가 레바이와 하우저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의미였다.

“칼립소, 내가 잘못했어. 이제 싫어하지, 않을게. 누구든 곁에 둬도 좋아.”

사실 내가 누굴 곁에 두든 그건 누구의 허락도 받을 일이 아니었다.

“네가 과거의 사람들에게 끌리더라도 괜찮아. 나는.”

그럼에도 나는 에키온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 사람들 사이에, 나도 곁에 두기만 하면 돼. 그걸로 만족할게…….”

에키온의 고백을 처음 듣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네가 내게 한 고백 중 어떤 고백보다 절절하게 들렸다.

에키온을 좋아한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하우저가 등장하고, 레바이의 진실을 듣고, 더욱 많은 수하가 생기고…….

한편으로 차츰 깨달았다. 나는 한 사람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다수의 이성을 좋아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에키온이 나를 보듯이 나는 에키온 하나만을 인생의 목표처럼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 어깨엔 너무나 많은 것이 매달려 있었고, 나는 욕심이 많아 단 하나도 버릴 생각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거다.

이 애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평생 차이가 나는 사랑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는 줄곧 에키온이 이걸 견디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괴롭고, 네게 독이 될 거라고.

“……내가, 집착 버릴게. 그러니까 함께 있고 싶어.”

“……내가 널 버린 것처럼 이야기하지 마.”

“응, 응…….”

나는 에키온의 가슴에 기대 에키온의 여윈 몸통을 꾹 끌어안았다.

이상하게도 나를 위해 나를 향한 집착을 포기한다는 말이, 에키온을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게 했다.

“정말 욕심 안 낼 수 있어?”

“응.”

나는 작게 웃었다.

“내가 다친 걸 보고 도시 하나도 날린 용이 나를 좋아해 준다니까 참 기분이 좋네. 이상한가?”

에키온의 품에서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욕심 더 내도 괜찮아. 물론 가족이나 내 수하를 없애 버리는 건 너무하지만.”

“…….”

“나도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에키온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여윈 얼굴임에도 귀엽게만 보였다.

“널 제일 먼저 보면 떨어지기 싫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어.”

“…….”

“그러니까 서운해하지 마.”

에키온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 내 뺨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어린아이 같은 애정 표현이었지만 이걸로도 좋았다.

“나, 반성했어.”

“응. 에키온.”

뭘 어떻게 반성했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장단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다른, 다른 남편을 만들어도 괜찮아…….”

에키온이 이런 경악할 소릴 하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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