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웨일은 내가 내뱉은 이름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불러 주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어지럼증은 적어도 오늘 하루는 쭉 계속될 거라는 이야기와 함께.
홀로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으려니, 곧 문이 열리고 하우저가 들어왔다.
“뭐 해?”
움찔.
“이쪽으로 와.”
이렇게 말했지만 추욱 처진 어깨는 도무지 되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쪽으로 다가올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저 모습을 잘 안다.
오늘따라 더욱 눈을 가린 저 머리 아래에서 저놈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도.
그럴 수밖에, 3회차 내가 부상을 입었을 때마다 보았던 모습이니까.
“내가 가? 참고로 나 아직 몸 불편한데.”
“제가 가겠습니다.”
냉큼 걸어오는 놈을 어처구니없이 보았다.
“올 거면서 왜 고집을 부려. 너 나랑 밀당하냐?”
“밀고 당기는 거 말입니까? 그런 게 가능한 주제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우저가 웃었다. 그러나 이건 온전한 웃음이 아니었다.
괴로움, 슬픔, 절망 모든 것이 담긴 웃음이었다.
“……다시는 가주님의 이런 모습을 보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
“아니, 이런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반평생을 살아왔는데…….”
하우저가 제 눈을 꾹 눌렀다.
나는 놈을 보면서 속으로 숨을 꾹 눌러 참았다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일단 좀 여기 앉아. 목 아프다.”
하우저는 순순히 앉았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려 놈의 눈을 가린 앞머리를 거둬 냈다.
눈물범벅이 되다 못해 핏발이 선 눈이 나를 향했다.
진득한 집착.
과거에나 지금이나 여전한 시선이었다.
“잘 봐. 난 살아 있어.”
“…….”
“그리고 멀쩡하게 나았어. 직접 확인해도 좋아.”
“……예.”
하우저가 울 듯이 웃었다. 비릿한 미소였다.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십니다. 그래서 덕분에 알겠더군요…….”
“…….”
“가주님의 옆이 달라졌다는 걸.”
과거 우리에겐 치유 능력자가 없었다. 따라서 부상은 위험을 불러왔다.
특히나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는 전쟁에서 깨끗한 붕대와 천, 약이 떨어지던 극한의 상황에서는.
평소라면 나을 수 있던 부상으로 죽어 가는 이도 수두룩했더랬다.
그러니 하우저에게 있어 중상은 사형선고처럼 느껴졌을 터다.
“잘 알겠습니다……. 과거와 다르다는 것을.”
하우저가 이를 꽉 물고 있었다.
레바이에 이어서 한 번은 이야기해 주고 싶었던, 우리는 과거와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는 말.
하우저는 이번 일로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은 듯했다.
잔인한 깨달음인 것을 알면서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곁에 두는 자들이 달라졌으니, 가주님도 달라지셨겠지요.”
그래,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저희를 찾지 않으신 겁니까?”
마치 피와 같이 처절한 눈물이 하우저의 뺨을 가르고 흘러내렸다.
나는 손을 뻗어 엄지로 슥슥 눈물을 닦아 주었다.
“설마 그렇겠어.”
평온하게 입을 열면서.
“내가 지금처럼 다시 한번 황실로 쳐들어갈 걸 아는데, 너흴 어떻게 불러.”
너희가 이번 생에는 평화로운 삶을 살길 바랐지.
내 말에 하우저가 울컥한 얼굴을 했다.
“……돌고래는, 곁에 두셨습니다.”
“아, 그놈은 좀 특별한 사유고.”
“…….”
“정말이야. 왜 그 지옥을 보고서 너희를 또 데려오고 싶겠어. 그냥, 평화로이 잘 살길 바랐지.”
나는 무뚝뚝하게 하우저의 뺨을 연신 닦아 주었다. 확실히 3회차의 나는 이렇게 조금은 무심했고 무정했다.
“하우저, 넌 말이야. 날 너무 미화해서 생각해.”
“……그런 적 없습니다.”
“아닐걸. 너만큼 날 신격화하는 놈이 어딨어.”
“……그런 적, 없습니다.”
지독하리만큼 고집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래서 너는 지난 생과 다른 내 모습을 용납할 수 없는 거야.”
잠깐이지만 깊디깊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집착으로 이지러진 눈에 작은 혼란이 어렸다.
“하지만 넌 이미 알고 있었어. 아니, 느꼈을 거야. 내가 전과는 다르다는걸.”
“……아닙니다.”
“그래서 자꾸만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집착한 거지? 카뮬라의 기억을 되살리는 걸 직접 보여 주면서까지.”
“……아닙, 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려는 남자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시선이 마주했다.
“현실을 봐. 네 가주가 언제부터 꿈에서 살라고 가르치던?”
“……가주, 님.”
아이처럼 흔들리는 눈동자 앞에서 나는 냉정했다.
“하우저. 과거에도 지금에도 나는 네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어.”
“그건 상관없습니다……!”
“네가 바라는 그 모습도 이제는 되어 줄 수 없어.”
하우저의 얼굴이 서럽게 일그러졌다.
“과거는 과거대로 지나가도록 내버려 둬.”
입을 꾹 다문 낯엔 버리지 못한 고집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하우저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아집을 부리고 있단 사실을.
나는 하우저의 얼굴을 놓고 양팔을 펼쳤다.
“이리 와, 하우저.”
하우저가 흠칫 놀랐다.
“어서.”
곧이어 커다란 몸이 내 품에 들어왔다. 나는 너른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다가 등을 쓸어 주었다.
토닥토닥. 아이에게 하듯이.
3회차, 하우저를 처음 만난 장소는 아콰시아델 영지 안에서도 사람이 드문 곳이었다.
놈은 혹등고래 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한 돌연변이였다.
“나랑 비슷하네?”
“…….”
“원하면 따라오든가.”
내 손으로 데려온 놈들과의 기억은 빠짐없이 기억한다. 그만큼 나는.
“널 아껴.”
꼭 이성 간의 사랑만이 가장 좋은 감정일 리 없지 않은가.
가족을 사랑하고 동료를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내게 수하가 전부였던 생이 있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끼던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수하를 아끼던 마음에 소중한 것이 더 많이 늘어난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네가 죽음으로 끝난 과거 대신에 이제 현재를 살았으면 좋겠어.”
“…….”
“나랑.”
하우저는 부드러운 내 거절에 한동안 내 옷자락을 적셨다.
이윽고, 조심스러운 손이 내 등을 감싸 안았다.
“……네. 존경하는 가주님.”
하우저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지금의, 당신을 평생 따르겠습니다.”
나는 말없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 * *
“이렇게 됐어.”
“허어.”
아틀란이 과일을 으적으적 씹었다. 영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정리하자면 그거네. 하우저 그 고래 새끼가 고백했는데, 차 버렸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하우저는 과거의 나를 사랑한 거지.”
“근데 뭐가 다른 거냐? 지난 생의 너도 너고 지금 생의 너도 너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틀란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이내 잘생긴 미간을 좁혔다.
“뭐…… 넌 지난 생과는 좀 다르긴 하지. 그땐 좀, 냉정했잖냐?”
“무심했지.”
아틀란 옆에 앉아 있던 첫째 벨루스가 조용히 말을 얹었다.
“뭐야, 그 정도 소릴 들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냥 주변에 좀 무관심했던 거지.”
“같은 말 아닌가?”
“…….”
더 말해 봤자 내게 불리한 이야기만 잔뜩일 거다.
나는 양손을 들어 올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간에 하우저한테 앞으로 나를 과거의 모습으로 돌리려는 노력을 한다거나, 과거 수하들의 기억을 되살릴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받았어.”
“그건 잘된 일이네.”
아틀란이 툭 대답했다.
“기억하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니.”
아틀란은 조금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카뮬라를 본 뒤로 내내 이랬으므로 둘 사이에 어쩌면 나와 레바이처럼.
그때는 알지 못했던 일이 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너흰 컨디션이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
내 말에 아틀란과 벨루스가 서로를 한 번 응시했다.
“너…… 왜 사람을 이렇게 차례대로 부르는 거냐? 그냥 다 모여서 만나면 되지.”
“에이, 정이 없잖아. 정이. 그렇게 되면 대화 못 하는 사람도 생길 텐데. 걱정해 준 건 모두가 같았을 거 아냐.”
“……쓸데없는 곳에서 가주답기는.”
“좋으면서 그런다.”
나는 키득, 소리 내서 웃었다.
벨루스와 아틀란을 통해서 바깥 상황이 연구소가 사라진 뒤 어떻게 되었는지 대충 들었다.
“이제 어떡할 거지?”
“음…….”
벨루스는 침상에 있는 나를 대신해서 우리 일행을 대표하고 있었다. 혹은 로레일에게 내 의사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하자.”
매드럼이라는 도시는 사라졌다.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두고 황실은 발칵 뒤집어졌겠지.
생각만 해도 짜릿한 일이었다.
“황실이 정보를 통제하거나 차단할 확률은 얼마나 될 것 같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지.”
“그래, 그 점을 노리자.”
나는 중지와 엄지를 소리 내어 딱 부딪쳤다.
“우린 앞으로 여기 한동안 머무른다. 대신 사람을 풀든, 사람을 사든 어떻게든 이 소문을 널리 퍼트려.”
매드럼은 황실 측의 책사인 동시에 전투 인원을 보조하는 데 없어선 안 될 세력이었다.
과장하자면 두뇌 한쪽이 날아간 셈이다.
“범고래가 매드럼의 행태에 분노하여 연구소에 쳐들어갔더니. 무수히 많은 수인이 실험 대상이 되어 고통받고 있었다.”
“…….”
“육지 동물, 수중 동물 수인 할 것 없이.”
“……뭐야, 사실이잖아?”
“그런데, 동족은 물론 육지 동물, 맹수 수인까지 실험에 이용했으며 사실 까 보니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호?”
나는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