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화
아. 이건…….
정글 속에서 당했던 정신 공격이었다.
그러나 강도는 그때보다 수백 배는 강했던 터라, 타격이 없을 수 없었다.
충격에 황급히 입을 막았다.
앞에서는 비틀거리면서도 히죽히죽 웃는 로랜드가 보였다.
“감히, 물고기 따위가, 콜록, 날…… 무시해?”
흡사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럼에도 난 그에게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죽어, 우리의 연구에 보고서 한 줄이, 되어라……! 쿨럭!”
바닥에서 올라온 황금빛이 ‘테라’를 붙잡아 두고 있었다. 바닥에는 금빛이 그리는 익숙한 문양이 보였다.
황실, 정확히는 땅의 힘이 깃든 문양이었다.
‘이런.’
이건 황태자가 만들어 둔 함정이었다.
아쉽게도 더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입매를 비틀었다.
‘젠장, 한 방 먹었네?’
금빛은 지속적인 정신적 대미지를 안겼다. 눈앞으로 보고 싶지 않은 환상이 어른거렸다.
가까스로 피가 나도록 주먹을 쥐어 버티고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아, 오랜만에 힘들어 죽겠네. 정말…….’
힘들다니, 이런 감각을 느낀 게 얼마 만이었더라?
금빛이 내 정신을 갉아먹는 사이에도, 상대방은 쉬지 않았다. 붉은빛을 억지로 움직여 거대한 창을 만들었다.
“죽어라!”
날아오는 창을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지러워서 물의 힘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푸욱!
살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행이 이 광장에 도착하던 때와 정확히 맞물려, 불행하게도 거대한 창에 배가 꿰뚫린 나를 모두가 보았으리라.
‘괜찮다고, 말해, 줘야 하는데…….’
눈이 가물가물했다.
괜찮을 거다. 내 가족은, 내 수하들은 강하니까.
뒤를 맡길 정도로 강하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눈이 먼저 감겼다.
‘……괜찮아, 이번 생엔 웨일이 있는걸.’
모든 게 괜찮으리라 믿었다.
눈앞으로 모두가 죽은 폐허, 시체로 가득한 세상. 진짜 같은 환상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괜찮을 것이다.
……다 지나갈 거야.
* * *
눈을 다시 떴을 때, 간질거리는 감각이 들었다.
“으음…….”
“세상에! 여보, 여보! 우리 시은이가 눈을 떴어!”
“어머, 그러네.”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한때 너무나도 그리워하던 목소리였다.
엄마, 아빠.
목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어느새 터져 나온 울음에 막혀 나오지 못했다.
“우리 예쁜 딸, 뭐가 이리 서러워서 울어.”
그대로 몸이 들려 커다란 품에 안겼다. 당신들은 늘 이렇게 다정했다.
품에 안기노라면 늘 모든 것이 잘될 거라 믿을 수 있었다.
“괜찮아, 아가. 다 괜찮아.”
“…….”
이제는 다시 들을 수도, 다시 볼 수도 없는 사람이지만.
나를 정말 잊었는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거야.”
이 목소리가 환상인 걸 알면서도 언제나처럼 믿고 싶어졌다.
엄마, 아빠, 정말로 모든 게 다시 괜찮아질까요?
“우리 시은이, 어딜 가서도 사랑받을 거야.”
“그럼, 엄마 아빠 딸이니까.”
뺨으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을 떠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하얀빛이 점차 내 앞을 가렸다.
부모님이 멀어지는 게 아쉬웠으나, 예전처럼 찢어질 듯 가슴이 아프진 않았다.
……아마 그 이유는 이 빛 때문이리라.
하얀빛인 줄 알았던 이 빛이, 하얀색뿐만 아니라 푸른색과 찬란한 금색이 뒤섞인 색이었으며, 익숙한 색이었으니까.
나는 괜찮아.
이렇게 되새긴 순간 천천히 눈이 뜨였다.
* * *
“끄응…….”
“정신이 들어, 칼립소?”
시야가 가물가물했다.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
말을 하려 했지만 가뭄이 인 것처럼 건조한 목이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상대는 용케 내 입 모양으로 알아들었는지 대답했다.
“맞아, 나 웨일이야.”
곧이어 시야가 흐릿하게나마 돌아왔다. 선명하진 않지만 은빛 머리와 커다란 덩치. 분명 웨일이었다.
웃고 있는 것 같은데, 어쩐지 슬퍼 보였다.
하기야 대장인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났으니 이겨도 초상집 분위기였을 것이다.
‘웨일이 있어서 죽진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다행이다.
물론 일행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눈을 뜬 나를 보면 안심할 터였다.
‘일단 물부터 마시고 싶은데.’
물의 힘을 일으켜 볼까 싶었지만 어지럼증이 더 심해질 뿐 힘을 쓸 수 없었다.
“목말라?”
곧 몸이 일으켜지더니 입술로 물이 흘러들어 왔다. 나는 인사도 잊고 정신없이 꿀꺽꿀꺽 삼켰다.
‘상황은 어떻게 됐지?’
원초적인 해갈을 해결하고 나니 상황이 궁금했다.
내가 구출된 걸 보면 땅의 힘은 잘 해결한 것 같고.
로랜드도 죽어 가고 있었으니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 후의 일이야 로레일이 있으니 잘 처리하지 않았을까?
“상황…….”
어? 이제 목소리가 나온다. 어지럼증은 가시지 않았다. 다만, 참으려면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시야도 곧 완전히 회복되어, 웨일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얼른 상황을 재차 물어보려던 나는 그대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
“목은 더 마르지 않고?”
“…….”
이렇게 엉망이야, 너?
웨일은 전투 능력까지 보유한 재원이었다. 하지만 특기가 특기이다 보니, 후방에서 지원을 담당했다. 언제 생길지 모를 심각한 부상자를 대비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웨일의 얼굴과 목은 얼룩덜룩한 멍이 들어 있었고 물병을 쥔 손도 붕대로 둘둘 감긴 채였다.
한눈에 봐도 온몸이 성치 않았다.
‘후방에 있던 웨일이 싸워야 할 만큼 심각한 전투가 있었단 거야.’
하지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어야 이렇게 되는데?
‘황태자라도 왔나?’
아니, 그랬다면 내가 온전히 눈을 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초조해졌다.
“왜……. 얼굴. 왜 그래.”
“…….”
웨일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살짝 내렸다.
“배는 모두 말끔히 치료했어. 정말 다행이야. 심각한 부상이었거든. 방치했다면 과다출혈로 죽었을 거야. 나는 죽은 사람은 살리지 못하니까.”
창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는 소리였다. 내가 원한 대답이 아니었다.
“웨일.”
“정신 쪽은 특기가 아니라서 애를 먹었어. 그래서 도움을 받았는데, 네가 이렇게 눈을 떠서 정말 다행이야. 칼립소, 아슬아슬했어. 정신이 붕괴될 뻔했거든.”
이것도 대답이 아니었다. 내가 참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웨일. 다른 사람들은?”
“밖에 있어.”
“도시는?”
“도시?”
웨일의 다정한 미소에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광기 같은 것이 어렸다.
“어떤 도시를 말하는 거야?”
“그거야, 매드럼…….”
“아. 그 도시는 이제 이 세상에 없어, 칼립소.”
“뭐?”
“없어졌다고.”
웨일이 다시 한번 온유하게 웃었다.
웨일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놀랍다 못해 온몸을 딱딱하게 굳게 만들었다
에키온이 폭주했다.
내가 창에 찔려 눈을 감은 뒤 일어난 일이었다.
폭주를 막기 위해 하우저와 웨일, 아틀란이 나섰으며 그사이 남은 인원이 서둘러 나와 실험당했던 수인들을 빼냈다고.
참으로 놀랍게도 에키온의 폭주는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달랐다.
그에게서 뻗어 나온 힘이 거짓말처럼 매드럼 연구소와 관계된 이들만 싹 없애 버렸다고.
마치 천벌이라도 내리듯이.
처음에 필사적으로 폭주를 말리던 세 사람도 에키온이 점차 연구소만 쓸어버리는 쪽으로 움직인다는 걸 깨닫고 여파가 우리 편을 휩쓸지 않게끔 하는 데 애를 썼다고 했다.
그렇게 매드럼이란 도시가 사라졌다.
“완전히?”
“응. 완전히.”
얼떨떨했다.
‘그 새끼들 업보를 생각하면 사라져 마땅한 도시이긴 한데.’
실제로 나도 이 도시를 없애려는 생각까지 했으면서. 얼떨떨함은 가시질 않았다.
“그럼 네가 다친 건 에키온이?”
“아니, 정확하게는 힘의 여파를 막다가 생겨난 거.”
나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칼립소, 일단은 쉬어. 너 뇌에 치명적인 손상이 올 뻔했어.”
정신 공격의 후유증은 웨일의 치료로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웨일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칼립소, 나는 지난 며칠만큼 내 능력에 감사해 본 적이 없어.”
“…….”
웨일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다급히 웨일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괜찮아, 웨일.”
한 발짝 늦게 웨일의 손이 덜덜 떨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지럼증으로 인해 비틀거리며 손을 뻗어 웨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툭툭 두드려 준다.
“이제 다 괜찮을 거야.”
분명 눈감기 전에 현실처럼 생생하고 끔찍한 환상을 보았다.
한데 왜일까, 마지막엔 포근한 꿈을 꾼 것처럼 괴롭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다들, 잔뜩 기다리고 있지?”
어지럼증이 있고 물의 힘이 나오지 않을 뿐, 육체 능력이나 기감은 그대로였다.
잔뜩 서성이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들어오라고 해.”
웨일이 멈칫하더니 이내 손등으로 슥슥 제 눈을 감추었다.
“……누구부터?”
눈물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라 슬쩍 모른 척해 주었다.
대신 나는 문을 빤히 보다가 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하우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