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55화 (255/275)

제255화

나는 로레일이 설명했던 이곳의 핵심 장치 ‘테라’로 갈 예정이었다.

그것만 망가지면 이 연구소의 모든 시설이 망가지므로.

‘거대한 힘이 느껴져.’

‘테라’가 있다는 지하로 내려온 지금.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용이 폭주할 때 뿜어져 나온 힘을 닮은 에너지였다.

하지만 뭐랄까. 표현하자면 주인을 잃고 미쳐 날뛰는 힘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마치 용을 죽여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이 새끼들, 도대체 윤리와 도덕을 어디까지 팔아먹은 걸까.’

오래전부터 용은 그 자체로 신성시된 존재였다. 용이 정확히 이 세계에 무슨 역할을 하는지, 어떤 존재인지 뚜렷하게 알지 못하는 이들도.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신성한 존재로 받아들였다.

황태자는 하얀 눈밭 같던 성지를 흙발로 짓이긴 배교자이며 잔악한 침입자임에 틀림없었다.

‘에키온 이전의 용이 황실 손에 죽은 거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찝찝한 입맛을 느끼며 발을 박찼다.

망치로 내려친 공격은 거대한 구멍을 만들었고, 동시에 망치에서 흘러나간 물이 여기를 한번 싹 쓸어 넘긴 뒤였다.

여기저기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기기 장치에 물이 들어가면 망가지는 건 상식이다.

여기 있는 복합 장치도 다르지 않았다. 이미 내 공격으로 한차례 엉망이 된 공간. 걷는 내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도망간 것이다.

‘뭐, 그 도망의 끝이 유쾌하진 않을 테지만 말이야.’

목표는 테라. 하지만 테라를 끝장내고 난 다음 대상은 실험실의 연구원들이었다.

마침내 나는 ‘테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거대한 원통 관이 있었다. 그 안에는 새빨간 에너지 덩어리가 일렁거리며 자리해 있었다.

자세히 보면 붉은색이되 여러 색으로 산란하는 색이었다.

“히, 히이익!”

이들은 이것만은 포기하지 못한 건지, 테라 주변에는 미처 도망가지 않은 원숭이 수인들이 보였다.

“여기까지 맹수를 데려오긴 두려웠나 봐?”

맹수 수인들과 원숭이 수인들의 관계는 복잡했다.

원숭이 수인들은 강력한 무력을 보유하지 못했지만, 지력과 연구 결과로 권력의 우위를 차지하여, 우월감에 취한 놈들이었다.

때로는 맹수들마저 무시하곤 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큰 권력을 안겨 주었던 에너지원 ‘테라’를 맹수들에게 공개하는 걸 꺼렸을 터다.

그러니 이런 깊은 지하에 처박아 두고, 자신들만 드나들었겠지.

안 봐도 뻔했다.

그리고 이렇게 침입자가 나타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오호라.’

나는 덜덜 떨며 서 있는 원숭이 수인들 사이에서 홀로 고요한 이를 보았다.

몸에 이것저것 장치를 잔뜩 달고서 나를 노려보는 사람. 얼굴이 익숙하다.

‘로랜드.’

원숭이들의 수장, 그리고 이 연구소의 총괄 소장이었다.

“네가 칼립소 아콰시아델인가?”

안경을 낀 남자가 털이 수북한 팔로 안경을 추어올렸다.

“비린내 나는 범고래.”

픽 웃음이 나왔다.

“……웃어?”

“아아, 정말 오랜만에 듣는 헛소리라. 이것도 반갑네?”

“…….”

잠시 로랜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경멸과 분노로 가득했다.

“여기서 멈춘다면 편안한 죽음으로 끝내 주지.”

나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나 그거 알아. 너넨 꼭 궁지에 몰리면 허세 가득한 소릴 하더라?”

키득거리는 내 목소리에 로랜드가 움찔했다. 저놈의 손에 만들어진 연구 결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동료를 잃어야 했던가.

지나간 원한이었고 해묵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기어이 이번 생에서도 나를 분노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네가 지금 걸친 뼈 갑옷, 거기엔 내 동지들이 얼마나 들어갔냐?”

로랜드가 걸친 기기들은 고래의 뼈로 만들어진 물건, 저들은 ‘뼈갑옷’이라 부르는 물건이다.

자연에서 수압이 높은 심해까지 들어갈 수 있는 고래의 뼈는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특성을 물려받아, 고래 수인들의 뼈 또한 단단했다.

원숭이들은 이런 점을 노려 수중 동물 수인들을 납치해, 처음에는 다양한 실험 대상으로.

그리고 죽은 뒤에는 뼈를 이딴 식으로 사용했다.

사실 납치되었던 카뮬라 또한 로레일이 아니었다면 죽은 뒤에 또 어떤 모욕을 당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분노로 손이 떨렸다.

“……우리의 위대한 연구물을 알고 있었나?”

“인체 실험이나 하는 새끼들이 위대함은 무슨. 너흰 그냥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말종 새끼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나는 흘끗 ‘테라’를 보았다.

내 시선이 옮겨 가자, 로랜드의 표정으로 불안이 스쳐 갔다.

나는 키득 웃었다.

“나는 하나고, 너흰 다수인데. 게다가…… 뼈 갑옷까지 걸친 상태로도 날 두려워하는구나?”

“누가……!”

로랜드가 이를 갈았다. 마치 하등한 존재에게 두려움을 가진 것이 치욕스럽다는 듯.

“황태자 전하께서 네 힘을 경계하셨기에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뿐이다.”

“아아, 내 손에 초전박살 난 거?”

“…….”

몰려 있는 원숭이 수인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다가, 손에 힘을 모았다.

“함부로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후회하는 쪽은 분명 네가 될 테니까, 물고기.”

“뭐라고? 무식한 원숭이 소리라서 못 알아듣겠네.”

“……!”

발에 살짝 힘을 주자, 순식간에 이동했다. 로랜드는 코앞으로 나타난 내 모습에 놀란 듯했지만 빠르게 손을 뻗었다.

로랜드는 원숭이 수인치고 전투를 할 줄 아는 인원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원숭이치고’의 수준이었다.

콰아앙!

뼈갑옷의 주먹과 내 주먹이 마주한 순간 갑옷에 금이 가더니 안쪽에서부터 부서졌다.

“크, 크아아아악!”

“나는 이 갑옷만 보면 부아가 치밀어. 아니, 구역질이 나.”

우리의 모든 것을 샅샅이 이용해 제 이득으로 취하려는 너희의 더러운 심보가 고스란히 나타나는 물건이었으니까.

“아직 일러. 이건 죽은 내 수하들의 몫.”

나는 표정 없이 주먹을 다시 들었다. 쾅! 콰앙! 두 방의 주먹이 복부에 제대로 들어갔다.

로랜드가 피를 토했다.

“이건 죽은 내 가족들 몫.”

단 세 방 만에 바닥에 쓰러진 원숭이들의 수장이 쿨럭거렸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지 핏발 선 눈으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 손이 곧 내 발에 짓밟혔다.

“걱정 마. 많이 모자라지? 네 죽음은 절대 평안하지 못할 테니까 기대해.”

“……읍! 흡, 흐읍!”

로랜드의 남은 손도 짓이긴 끝에 앞으로 저벅저벅 나섰다.

“내 몫은 너 말고 테라에 박아 줄게. 좋아해도 좋아.”

“……!”

조잡한 몽둥이 따윌 들고 있던 원숭이 수인들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내 주먹으로 다시 한번 물의 힘이 몰려들었다. 이번엔 조금 전 망치로 연구소를 박살 낼 때보다 더욱 크게.

온 힘을 다 해서.

‘자, 이건 몇 방이나 버티려나?’

콰아아앙!

한 방.

쾅!

두 방.

나는 표정 없이 금이 가기 시작한 테라의 원통을 보았다.

“그, 그걸 부수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그만둬!”

뒤에서 들려오는 패배자들의 소리 따위 무시했다.

콰아앙!

세 번째 주먹이 내리꽂혔을 때, 우지끈 소리가 들렸다.

작은 유리 조각이 튀어나와 뺨을 베었다.

‘한 방만 더 먹이면 부서지겠는데.’

냉정하게 판단하여 주먹을 들어 올렸다.

원숭이들이 겁을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로레일을 통해 이것을 부수면 어떻게 되는지 들었기 때문이었다.

“용이란 존재에게서 가져온 힘입니다. 깨지는 순간 자연으로 흩어질 겁니다……!”

에키온도 비슷한 이야길 했다.

죽은 용의 힘은 결코 고여 있을 수 없다고.

그러니까.

쾅!!!

마지막 주먹을 내려치는 순간 와장창 소리와 함께 테라를 가두었던 원통이 산산조각 났다.

안쪽에 고여 있던 붉은 에너지원이 폭풍처럼 사납게 터져 나왔다.

머리카락이 거칠게 흩날렸다.

“으아아악!”

잘못 느낀 게 아니라는 듯 용 공작이 폭주할 때처럼 주변의 기기들을, 사람들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게는 전혀 해를 끼치지 않았다. 마치 그간 자신을 가둔 자들에게 응징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무표정하게 빠져나오는 힘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곧, 에키온과 애들이 올 때가 되었는데.’

내가 에키온과 아틀란에게 미리 주었던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이미 1차로 진입한 이들은 로레일이 말해 준 탈출로로 빠졌을 터.

나는 2차 진입 인원과 일행, 그리고 일행이 구출한 이들을 데리고서 나가면 그만이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저 멀리서 뛰어오는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곧 얼굴이 보일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허억, 허억……. 테라는 절대, 절대, 포기할 수 없었지만……!”

“…….”

“전하의 말, 대로다. 너는 살아, 사, 살아 있으면 안 돼…….”

바닥에서 금빛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발악인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가소롭게 여기며 힘을 일으키려는 순간, 거대한 충격이 몸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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