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내 부름과 동시에 적들 사이에서 빛이 번쩍 터져 나왔다.
‘나타났나?’
로레일이 경고했던 공격.
어디선가 거대한 화마가 날아왔다. 바닥으로 떨어진 불은 신기하게도 벽과 자재는 전혀 태우지 않고, 사람만을 활활 태웠다.
진입한 우리 쪽 사람들은 다행히 불에 닿지 않고 문제없이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1차 목표 클리어.’
이미 대기하고 있던 벨루스와 아틀란이 물의 힘을 발휘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물의 힘으로도 저 불을 끌 수 없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보였다.
‘역시 평범한 불이 아니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면, 거대한 종탑이 보였다.
종이 있어야 할 자리엔 커다란 붉은 에너지 같은 것이 보였다.
‘저게 용의 힘인가?’
에키온이 추측하기로는 아마 붉은 용일 거라 하던데.
붉은 용이 불을 다룬다라, 그럼 에키온은 푸른 용이니 물을 다뤄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에키온이 물을 다루는 모습은 전혀 보지 못했다.
엉뚱한 생각은 뒤로 미뤄 두었다.
다시 한번 불이 날아오고 있었으므로.
아틀란과 벨루스가 있어 막았다지만 부상자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놀랍게도 저 불은 적들도 함께 태우고 있었으니까.
‘피아가 없는 공격이잖아?’
그래서 벽 너머로만 공격했던 모양인데……. 카뮬라가 벽을 부숴 버린 통에 적들도 함께 손실을 보고 있었다.
역시 카뮬라가 벽부터 쓰러트리도록 한 판단이 옳았다.
‘다음은…….’
로레일의 동료들이 부서진 벽 근처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두 번째 불이 온다! 산개하라!”
그들은 한두 번 싸워 본 것이 아닌지 꽤나 전략적으로 움직였다.
두 번째 날아온 불은 우리 인원이 몰려 있던 곳에서 살짝 빗겨 나갔다.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세 번째 불이 날아왔다.
“갈게.”
낮은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가 싶더니, 작은 바람이 느껴졌다.
에키온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싸움이 한창인 한복판에 서 있었다.
에키온의 정수리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투스는 어디로 간 걸까?’
에키온은 투스가 사라진 게 아니라고 했다. 그저 자신 안에 있을 뿐이라고.
나는 다음 모습에서 투스가 에키온 안에 있다는 소릴 온몸으로 실감했다.
에키온이 서 있는 뒤쪽으로 처음 보는 푸른빛이 일렁이더니 거대한 뱀이 나타났다.
‘아.’
투스를 처음 만나던 날, 물이 부족하다고 외치던 모습을 떠올렸다.
거대한 호수의 물을 반이나 해치워 버리던 모습 또한.
왜 잊고 있었을까.
투스가 이미 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건만.
날아온 불은 홀연히 사라졌다.
아니, 뱀이 집어삼켰고, 투명한 뱃속에서 꺼져 들어가는 불의 모습이 선연하게 보였다.
장관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에키온이 힘을 사용할 때마다, 또 언제 폭주할지 몰라 마음 한구석에서 늘 긴장했던 것 같다.
그러나 불을 삼키는 뱀을 본 우리 쪽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과거 폭주한 용 공작을 보며 울부짖던 사람들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환희에 찬 얼굴로 로브를 푹 뒤집어쓴 에키온을 바라보는 사람들.
용이 누군가에게 두렵지 않게 느껴질 수 있구나.
왜일까, 저 멀리 시커먼 종탑이 당황한 것처럼 보인 건 내 착각일까?
적들의 혼란은 바닥에서도 느껴졌다.
“수, 수상한 자다! 잡아! 얼른 잡아들여!”
“불을 삼키는 놈부터 처리해!”
이미 한차례 벽을 부쉈던 카뮬라는 전투에서도 활약 중이었다.
적들이 에키온 쪽으로 몰려들자 위치를 이동하여 카뮬라가 벽처럼 에키온을 호위했다.
카뮬라가 하는 행동을 본 다른 이들 또한 에키온을 둘러싸 보호하는 원의 형국이 그려졌다.
‘리리벨과 하우저는 레바이와 함께 들어간 것 같고.’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아래를 응시했다.
슬슬 등장할 때가 됐는데…….
크와아아아악!
곧이어 인간의 것이 아닌 존재의 소리가 들려 왔다.
내게는 익숙한 소리이자, 누군가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소리.
‘그래, 슬슬 나와 줘야지.’
매드럼. 이 도시의 원숭이들은 연구에 미쳤다.
연구의 결과물은 3회차 전쟁에 무지막지하게 쏟아졌다.
저기 갑자기 나타난 무식하게 생긴 괴물은 그들의 실험 결과 중 하나였다.
수인화를 못한 이들의 손과 발 혹은 몸 등을 이어 붙여 만든 괴물이었다.
수는 이십에서 삼십여 마리.
게다가 그 괴물 옆으로는 이쪽으로 몽땅 몰려온 많은 수의 맹수들이 보였다.
앞장서서 지휘하던 로레일도 당황한 눈치였다.
‘항상 저 불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좌절했다고 했으니, 그다음은 어찌 나올지 모를 일이라 했지.’
나는 그런 로레일에게 내가 아는 정보들을 공유했다.
그러니, 저 얼굴은 내가 말한 대로 되었다는 사실에 당황한 표정이리라.
“으쌰.”
나는 기지개를 켜며 치열한 전투가 재개된 아래를 응시했다.
“주인공은 조금 늦게 등장하는 법이지.”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내 손에 푸른 물이 뭉치기 시작했다.
“악당에겐 바닷물의 짠맛을 보여 줘야지.”
손을 펼치자 푸른 물은 넓게, 아주 넓게 펼쳐졌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져 거대한 파도를 만들었다.
콰앙!
내 할머니를 위협했던 해일이 맹수들과 괴물을 덮쳤다.
불로 어찌 못한다고 판단했을 때부터 원숭이들은 분명 자신의 최대 전력을 내보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가 쓸어버리고 있다면 섣불리 전력을 모두 내보내진 않을 터.
그리고 기다렸던 만큼 내 파도는 볼링볼이 되어 그들을 볼링핀처럼 날려 버렸다.
압력을 이기지 못한 이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넘어졌다.
개중에서 괴물은 제 편을 깔고 넘어졌다.
나는 버둥거리는 괴물을 바라보다, 괴물의 위쪽으로 푸르른 창을 만들어 냈다.
“……이번 생에도 이용당한 당신들의 명복을 빕니다.”
푸욱!
원숭이들이 자신 있게 내세운 괴물 수십 마리가 그대로 명을 달리했다.
저렇게 괴물이 되어 버린 이들은 다시는 일반 수인들로 돌아갈 수 없다.
원숭이들이 가장 악질이라 생각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소수의 맹수들은 아틀란과 벨루스, 그리고 로레일 동료 중에서도 전투가 특화된 이들이 도맡았다.
이것도 계획대로였다.
‘자, 그럼…… 다음은.’
파도가 솨아아 썰물을 만들었다. 적 맹수들의 다리를 붙들고 그대로 넘어트린다.
나는 회수한 물을 똘똘 뭉쳐 거대한 망치를 만들어 냈다.
훌쩍 바닥으로 뛰어들어 허공에서 물줄기를 타고 타다다닥 뛰어갔다.
목표는 연구소.
뛰면 뛸수록 망치는 더욱 커져 갔다.
마침내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망치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사실 예전에도 이리 했어야 했지.
도시가 먼저 망한 터라 못했지만. 3회차에 꼭 하고자 했던 이 도시의 몰락을, 오늘은 이룩하고자 한다.
같은 수인을, 수중 동물 수인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미친 새끼는 숨 쉴 가치가 없으니까.
물의 힘으로 만든 무기는 속성에 따라 물이 가진 수압을 발휘한다.
어마어마한 힘과 압력에 바닥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아래에도 지하 시설이 있다고 했던가.
파지지직. 실험 기구였던 것들이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히익, 이봐, 이봐! 정신 차리게!”
“다들 연구 결과를 사수해!”
“보고서 챙겨!”
지하 시설에서 도망가는 원숭이들이 보였다.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물의 힘이 스르륵 흘러나와 이번엔 주먹에 맺혔다.
‘그럼 뒤를 부탁해, 로레일 씨.’
혹시 몰라 벨루스를 이곳에 배치했으니, 돌발 상황은 알아서 판단할 터다.
난 일말의 고민 없이 구멍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가 착지하기 무섭게 옆으로 두 사람이 나란히 착지했다.
“에키온, 불을 뿜던 탑은 어떻게 됐어?”
“망가트렸어.”
한 사람은 에키온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아틀란.
놈은 내려서자마자 투덜대기 바빴다. 불쾌한 목소리였다.
“어우, 피 냄새. XX. 미친 새끼들. 거하게도 해 먹었네…….”
이를 가는 아틀란의 목소리와 함께 숨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돌리니 미처 피하지 못한 원숭이 수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낯으로 벽에 붙어 벌벌 떨고 있었다.
“……어떡할까. 저거 죽여?”
“계획대로 간다.”
나는 미련 없이 시선을 떼어 냈다.
“아틀란, 넌 예정대로 1차로 진입한 놈들이 구하지 못한 수인들을 데려와.”
에키온은 내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에키온, 넌 예정대로 구출하러 간 사람들을 찾아서 내가 있는 쪽으로 시간 내로 돌아와.”
“응.”
아틀란이 후욱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아, 가주님. 난 지리를 모르니까 저 새끼 하나 데려가도 되지?”
아틀란의 눈이 번들거렸다. 나는 겁에 질린 원숭이 수인 연구원을 보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움직이자.”
이 연구소의 몰락을 위해.
이는 분명 황실 세력 붕괴의 단초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