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53화 (253/275)

제253화

* * *

웨일은 자신의 치료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는 아콰시아델과 칼립소의 전폭적인 지원 덕택이었고.

가장 큰 요소는 웨일이 뼈를 깎는 노력과 연구를 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능력으로 카뮬라의 못 쓰는 다리를 손쉽게 치료해 냈다.

7년 넘도록 쓰지 못할 만큼 장애가 남은 다리였지만, 치료하기에 그리 어려운 타입은 아니었다.

‘애초에 치료를 제때 못해서 장애가 남은 부상은 그리 어렵지 않은 축에 속하니까.’

웨일은 볼펜을 쥔 채 고민했다.

오히려 독을 먹거나 내상이 심한 상처가 치료하기 어려웠다.

진단에서 많은 판단과 생각을 요하기 때문이었다.

웨일은 고민을 끝내고 고개를 들었다. 제 옆에는 칼립소가 앉아 있었다.

분명 원하는 대로 카뮬라를 치료했건만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오히려 일행이 다쳤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딱 저런 얼굴일 것 같았다.

‘내가 다쳐도 저런 표정 해 주려나?’

웨일은 턱을 괴고 어여쁜 제 사랑을 더 시야에 담고 싶었지만. 욕심을 채우는 대신 입을 떼었다.

“무슨 일 있어?”

“어? 아……. 아니, 없어.”

웨일은 이에 어떤 대답을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나가기로 했다.

“카뮬라라는 사람, 치료하지 않는 게 나았어?”

“응? 아냐. 아냐. 그런 거. 그냥…… 마음에 좀 걸리는 일이 있어서.”

“왜? 그 사람도 과거를 기억해?”

“…….”

그 말에 칼립소는 입을 꾹 다물었다. 놀란 얼굴이었지만 이는 잠시뿐이었다. 칼립소에게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칼립소는 위기와 돌발상황에 능했다.

‘허 참, 이거야말로 이제 회귀를 알게 되는 게 흔해지는 느낌이네.’

칼립소 자신이 접했던 매체에선 주인공들이 이런 사실을 꽁꽁 숨기기에 바쁘던데 말이다.

“어떻게 알았냐고 안 물어?”

“궁금하긴 한데, 대충 짐작은 가. 레바이를 보고 맞춘 거 아니야?”

“비슷해.”

웨일이 잠시 문을 향했다.

이 방엔 자신과 칼립소뿐이었다.

“알게 된 뒤에 내 기분은 혹시 안 궁금해? 항상 질투 났는데.”

“…….”

“내가 모르는 시간이 있다는 것.”

웨일은 턱을 괬다. 그윽한 시선이 칼립소를 담았다.

“네가 나보다 에키온을 먼저 만난 것만으로 질투가 나는데. 이제는 이전 생이라니. 아득해서 더 질투가 났어.”

“……그랬어?”

칼립소가 살짝 웃었다.

“난 네가 왜 이렇게까지 날 좋아 해 주는지 모르겠어. 그렇게까지 좋아할 만한 사람은 아닌데 말이야.”

“섭섭한데. 그건 내가 판단할 거야. 아무리 너라도 널 낮잡게 보는 건 용납 못 해.”

“그래?”

웨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칼립소 옆자리에 앉았다. 커다란 그림자가 칼립소를 살짝 덮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 건데?”

“문제까진 아니야. 그저 잠시 고민이 됐어.”

칼립소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야기를 이었다.

웨일이 짐작한 대로 카뮬라도 과거 칼립소의 소중한 부하였으며, 이번에 기억을 떠올리게 됐다는 걸.

“하지만 나는 딱히 원하지 않았어.”

“왜?”

“나는 지난 생과 이번 생을 더는 혼동하고 싶지 않거든.”

“그럼 혼동하지 않으면 되잖아.”

“나는 혼동하지 않아.”

가까이서 마주한 칼립소의 눈에 혼란은 없었다.

깨끗하고 맑았다.

신념이 담긴 눈동자는 늘 이렇게 아름다웠다. 매번 속절없이 빠져들게끔 말이다.

“내가 혼동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심정을 알아서 섣불리 말을 못 하겠네.”

칼립소는 기억이 돌아온 카뮬라를 붙잡고 포옹했다.

카뮬라는 칼립소의 어깨를 적셨지만, 칼립소는 울지 않았다.

“그럼 너는 이번 생을 쭉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는 거지?”

“맞아.”

“그럼 날 받아들여, 칼립소.”

“…….”

칼립소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붙잡힌 손을 빼내려는 기색을 보였다.

웨일은 당황하지 않고 칼립소의 손을 꼭 붙잡았다.

“칼립소, 나만 옆에 두란 소리가 아니야. 나랑 에키온. 이렇게 두 사람이 네겐 과거랑 구분 짓게 만드는 사람들인 거지?”

색이 다른 두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닿았다.

웨일은 이미 스스로가 칼립소의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찾았다.

자신은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왜 손이 두 개라고 생각해?”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각기 한 손에 하나씩 잡을 수 있게 만들어진 거야. 그러니까 여기.”

웨일이 칼립소의 오른손을 한 번, 다음으로 왼손을 한 번 가볍게 꾹 눌렀다. 아프지 않게.

“오른쪽과 왼쪽에 우릴 놔.”

웨일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밀어를 속삭이듯 낮고 부드럽기까지 했다.

“양손이 가득 차 버리면, 이제 누구도 들어설 곳이 없잖아.”

그럼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다.

웨일의 말에, 칼립소가 어처구니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넌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을 꼬시는 능력이 출중했어?”

“이 한순간을 위해 무수히 연습했다고 할까?”

“넌 참 다정해.”

“아냐, 이기적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어. 늘 호시탐탐 네 옆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칼립소는 웨일의 낯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손을 자연스럽게 빼냈다.

그대로 웨일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부스스한 은발에 닿기 직전 웨일이 칼립소의 손목을 잡았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과거에 널 빼앗기느니, 차라리 에키온이 낫겠어.”

“…….”

“하지만 네가 네 손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알아주면 더 좋겠어. 나는 평생 네 치유사로 살아도 좋거든.”

칼립소가 손을 빼내려 하자, 웨일은 더는 붙잡지 않고 미련 없이 놓아주었다.

칼립소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비밀인데…….”

웨일이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오싹하도록 낮은 목소리와 함께.

“네가 날 정부로 삼았더라도 난 망설임 없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 거야.”

“……너 나한테 욕 좀 들어 볼래?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그는 칼립소의 얼굴이 조금 후련해진 걸 놓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널 과거에 빼앗길 일은 없겠지.

웨일이 웃었다.

뭉쳐 둔 집착을 가슴속 깊이 밀어 넣으며.

* * *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아콰시아델 영지는 기후 변화가 심하지 않아, 1년 중 대부분 이런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매드럼은 여러 공장 지대가 있는 탓에 1년 중 대부분의 날이 흐리다고 했나.

이렇게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게 드물다는 소리다.

나는 지붕에 선 채 아래를 보았다.

거대한 연구실 건물 앞은 두꺼운 벽이 처져 있었다.

출입구는 철로 만들어진 문뿐이었고. 문을 만든 철은 어마어마하게 두꺼웠다.

웬만한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문 근처에 어슬렁 걸어 다니는 병사들이 보였다.

현재 물의 힘으로 모습을 숨겼으니, 고개를 들어도 내 모습은 보이지 않을 터다.

그리고 철문 앞으로 우직하게 걸어가는 여성이 보였다.

카뮬라였다.

마찬가지로 내 힘으로 모습을 숨긴 카뮬라는 일정 거리를 두고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시작해?’

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씩 웃었다.

징 박힌 장갑을 쓴 주먹을 탕탕! 부딪치더니. 이내 앞으로 달려갔다.

콰아앙!

카뮬라가 힘을 쓴 순간 모습이 드러났다. 갑작스러운 침입자의 등장에 경비들이 나서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나마 빠르게 움직인 이들은 잽싸게 철문 앞을 가로막았지만.

애석하게도 카뮬라의 대상은 철문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벽이었으니.

쿠웅! 콘크리트같이 아주 단단한 재질의 돌은 하릴없이 금이 갔다.

카뮬라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몸을 부딪힌 순간.

“피해! 무너진다!”

“벽이다! 동쪽 벽이야!”

거대한 벽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왕년의 실력 어디 안 갔네.”

하지만 상대는 벽이 무너진 것만으로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다음을 대응했다.

언제 준비한 것인지, 거대한 쇠뇌 화살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빤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곧 수많은 화살이 거대한 강줄기에 휘감겼다.

동쪽 지붕 쪽에서 누군가 로브를 벗었다. 생긋, 우아하게 웃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리리벨이었다.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잘됐네?”

둥실 떠오른 화살의 화살촉이 반 바퀴 돌았다. 이뿐 아니라 물이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화살을 토해냈다.

아니, 화살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 봐도 좋을 터였다.

덕분에 막 몰려들기 시작한 병력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기 바빴다.

혼잡한 틈, 숨는다고 안전하지만은 않았다. 이미 혼란은 틈타 스며든 이들이 하나씩 뒤를 점거하고 있었기에.

“부, 부대장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컥, 커헉!”

“으악, 여, 여기도 적이 있다! 적의 급습이다!!”

나는 벨루스와 하우저가 지휘관이나 맹수들만 잡고 쓰러트리는 걸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아게노르도 있다면 좋았을걸.’

걔가 이런 암살엔 딱인데.

뭐 어쩌겠나.

나는 로브 모자를 벗어 던졌다.

어찌 됐든 이 연구소는 오늘 폐쇄될 것이다.

“에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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