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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252화 (252/275)

제252화

“아, 미안미안. 하지만 내가 이런 잔재주가 있거든.”

카뮬라가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용병으로 꽤 돌아다닌 탓에 사람 입 모양을 보고 대략 대화를 유추하는 능력을 얻게 됐다고.

지난 생과는 달랐다. 아콰시아델로 바로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아아, 빌어먹을 변수.’

나는 관자놀이를 다시 한번 꾹 눌렀다.

“미리 말하지 않고 엿본 건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나도 처음 보는 이들인데, 경계 정돈해야 하지 않겠어?”

“……같은 수중 동물 수인끼리 야박하네.”

“미안하지만, 그건 믿을 이유가 못 돼. 수중 동물 수인 중에도 제 가족을 직접 여기 파는 놈들도 있어서 말이야.”

나는 작게 한숨 쉬었다.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너희?”

그녀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알 수 있었다.

‘이래서야 치료도 제대로 받지 않을 기세네.’

어쩌면 로레일에게 우리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말할지도 몰랐다.

제압하거나 협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아. 대신에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면 얘기하지.”

“뭐야? 대체 무슨 꿍꿍이…….”

“터무니없어서 미친 소리로 들릴 게 분명해서 그래. 대신, 꿍꿍이 같다고 생각한다면 로레일에게 우리가 뭘 숨기고 있다고 말해도 좋아. 수상하다고 해도 좋고.”

카뮬라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좋아, 맹세하지.”

와, 저 얼굴 보게. 어떻게든 맹세의 빈틈을 노려서 로레일에게 말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하잖아?

상대를 너무 잘 아는 것도 좋지만은 않구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카뮬라, 그럼 물어볼게.”

“엉.”

“전생을 믿니?”

한껏 비장했던 카뮬라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마치 사이비 신도를 본 듯한 표정이었다.

“로레일이 이상한 놈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하게 만들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그래그래, 대답을 아직 안 했는데. 전생을 어떻게 생각해?”

“으엑, 설마 진짜 이상한 놈이야, 너희?”

“그러니까 경고했잖아. 넌 미친 소리로 생각할 게 분명한 말을 들을 거라고.”

“…….”

태연한 내 반응에 카뮬라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옛날이 다시 한번 생각나 조금 유쾌하기도 했다.

“나는 지난 생에서 너를 만난 적 있어. 그리고 그 생을 기억하고 있지.”

카뮬라가 잠시 침묵하더니 콧잔등을 찌푸렸다.

“와, 진짜 미친 소리네.”

“그렇지? 근데 아직 안 끝났어. 나랑 함께 있는 여기 이 꼬불머리 친구도, 나처럼 지난 생을 기억하거든.”

“…….”

카뮬라의 표정은 알만했다.

‘당장 돌아가서 로레일에게 우리가 미쳤다고 보고하고 싶은 얼굴이네.’

여기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믿고 따른다는 게 확 티가 났다. 그 부분이 조금 서운하다고 생각하면 욕심이겠지.

‘뭐, 지나간 생은 지나간 생이니까.’

나는 카뮬라가 절대 하우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우린 당신이 ‘누르기’를 쓸 줄 알길 바라고, 이걸 써서 이번 작전을 도와줬으면 좋겠어.”

“이해했어. 그런데 전생 운운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우리가 그 기술을 가르칠 방법은 없지만, 전생의 당신은 쓸 줄 알았거든. 여기 있는 내 부하는 당신의 기억을 떠올리도록 만들면 쓸 줄 알게 된다고 생각해.”

카뮬라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산뜻하게 말했다.

“뭐야, 그런 거야? 그럼 해 줘.”

“……뭐?”

카뮬라가 말을 더 잇기 전에 서둘러 손을 뻗었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잠시만, 잠시만. 당신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건 신중해야 할 문제야.”

“음?”

“기억을 되살린다는 건 당신 입장에선 살지도 않는 삶을 기억하는 거라고. 끔찍한 죽음까지!”

“……흐음,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내가 뭐, 끔찍하게 죽기라도 했나 보지?”

“…….”

“괜찮아. 이미 나는 저 연구소에서 볼 장 다 봤거든.”

“…….”

카뮬라는 언젠가 보여 줬던 그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걸 기억한다고 해서 지금 내 삶이 의미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나는 우리 애들에게, 내 동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뭐든 하고 싶어.”

카뮬라가 자신의 불편한 다리를 툭툭 쳤다.

“이런 몸임에도 불구하고 도와줬던 사람들이거든.”

나는 그 후로 몇 번을 더 설득했지만 카뮬라는 요지부동이었다.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결국 허락의 의미로 하우저에게 눈짓했다.

금방 고개를 돌린 채였다. 딱히 놈의 얼굴을 보고 싶진 않았다.

거봐요, 물어보자고 하지 않았느냐는 표정을 하고 있을까 봐.

‘……그래, 어디 보기나 하자.’

대체 어떻게 멀쩡한 사람의 전생을 되살린다는 건지.

하우저가 카뮬라에게 다가갔다.

나는 거리를 두고 뒤로 살짝 물러난 상태였다. 어깨로 체온이 느껴졌다.

“……칼립소, 괜찮아?”

에키온이었다.

이 방에 들어올 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만히 있어 달라는 부탁 때문인지.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 했던 에키온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곧 하우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부터 하는 건 최면과도 비슷합니다.”

“뭐? 진짜 사이비 종교 같네. 위험한 건 아니지……?”

“그렇게 보이면 후려쳐도 좋고. 주먹은 멀쩡해 보이는데요. 아니면 그 덩치로 겁먹었나?”

“……미안한데 그쪽은 원래 말투가 그렇게 싸가지가 없냐?”

잠시 투닥이는 것 같았지만, 곧 카뮬라가 하우저의 양손을 잡았다.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한번 해 보겠다는 태도였다.

“눈을 감으세요.”

곧 카뮬라가 눈을 감았다.

하우저가 쓰는 방법은 본인이 예고했던 대로 ‘최면’ 요법과 비슷했다.

먼저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키워드를 주며 상상하게 한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되살린다.

되살리는 장면은 다름 아닌…… 마지막 전투였다.

‘이거야 원, 영 듣고 싶은 말들은 아니란 말이지.’

새삼 다시 떠올린다고 정신적 타격을 받진 않지만, 씁쓸한 기억이긴 했다.

그때였다. 막 하우저의 이야기 속 전투의 마지막으로 들어간 순간, 카뮬라가 이상한 반응을 보인 건.

“아, 아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카뮬라의 뺨으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게 뭐야?

“실마리를 잡았네요. 나는 지금부터 당신에게 단 한마디를 할 겁니다. 당신은 찬찬히 생각해 보세요. 누가 이 말을 했었는지.”

“…….”

“‘잘 들어. 내 지루한 연설은 이게 마지막이니까.’”

나도 모르게 눈앞에 어른거리던 걸 콱 쥐었다. 에키온의 옷자락이란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그간 잔소리 듣느라 고생 많았다. 우리의 적은 상처 입은 채 지척에 있다.’”

익숙한 말투, 억양.

“‘한마디만 하겠다. 죽지 마라. 우린 살아서 모든 영광을 누리는 거다.’”

“…….”

“‘죽으면 지옥까지 쫓을 테니까, 다들 살아서 다시 보자.’”

내가 했던 말이었다.

“‘재차 말한다. 죽지 마라. 죽을 것 같으면 차라리 나를 불러. 대신 죽어 줄 테니까.’”

“…….”

“‘그러니 내가 죽는 꼴 보고 싶으면 더럽고 치사해도 살아남으란 소리다.’”

제발 죽지 말라는 소릴 이렇게 했었다. 나는 심호흡했다.

‘아냐, 말도 안 돼. 이걸 듣는다고 기억이 되살아날 리가 없잖아?’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죽지 마라. 살아라’.”

하지만 그럼에도 만약, 너희가 고작해야 이 말 한마디에 다시 기억을 떠올린다면.

“아아…….”

너희는 대체 얼마나 억울한 마음으로 죽어 갔던 것일까.

입술을 깨물었다.

천천히 카뮬라가 눈을 떴다. 짙은 색의 눈동자가 더욱 어두운 빛을 띤 것 같았다.

눈동자가 굴러 시선을 마주했을 때. 카뮬라가 눈을 휘며 웃었다.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대장.”

나는 네가 부르는 그 호칭이 정겨워서 늘 좋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오랜만이에요.”

“…….”

“내가 못 알아봤네. 우리 대장님의 멋진 얼굴을 말이야.”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이지, 고작해야 내가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하는 것만으로 너희가 지난 생을 기억하는 거라면.

나더러 어떡하라는 건지.

“……그래. 오랜만이네. 카뮬라.”

하지만 지금은 그저 반가움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할 이야기가 많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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