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51화 (251/275)

제251화

모든 사람이 내게 주목하는 틈을 타 로레일에게 용건을 밝혔다.

“그리고, 당신들 중에서 몸이 불편한 사람들 있지? 그 사람들 목록을 추려서 이쪽으로 줘.”

“예? 그건 왜…….”

“치료할 수 있으니까?”

이 자리에 함께한 웨일을 한 번 보았다가 살짝 웃었다.

“한 번에 다는 힘드니까 중요한 순서를 정해 주면 더 좋고.”

전혀 생각도 못 했던 듯, 로레일이 얼빠진 표정을 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럼 내가 당신들을 기만하겠어?”

저쪽 사람들의 얼굴이 심각해진 한편, 그중에서 로레일은 눈에 띄게 신중한 표정을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형이 ‘치료 능력자’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레일이 양손을 깍지 낀 채 기도하듯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실험을 진행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습니다. 혹시…… 칼립소 님께서 데리고 계신 능력자가 그 실험 대상이었습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아니야.”

우린 황실도 모르는 능력자를 데리고 있으니까. 황태자 그놈도 웨일의 존재를 모를 터였다.

3회차에선 일찍 죽은 존재니까.

“하지만 누가 실험 대상이었는지는 알지.”

이 자리에 함께 앉은 뱀 가문 수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궁금한 건 정리해서 가져와.”

“잠시만요, 칼립소 님……!”

“왜? 중요한 이야기는 끝난 것 같은데.”

로레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저희를 도와주신다고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생각 이상의 도움에 큰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래. 우리도 필요한 도움을 얻는 셈이니까 지나치게 눈치 볼 필요는 없어.”

“…….”

나는 로레일을 빤히 응시했다.

“나도, 실험에 반대하는 원숭이 수인이 있다는 것에 좀 놀라고 반성하고 있으니까.”

3회차에도 그런 놈이 있었을까?

아마도 있었을 거다.

‘있었지만 일찍 죽었겠지.’

애석하게도 전쟁 중엔 좋은 놈들이 가장 먼저 죽는 법이었다.

* * *

“나를 보자고 했다고 들었어.”

그날 저녁, 로레일과 동료들의 아지트. 우리는 각기 방과 회의실을 부여받은 상황이었다.

카뮬라는 유쾌한 얼굴로 우리가 있는 회의실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반긴 건 회의실 내 무거운 분위기였다.

카뮬라가 눈을 깜빡였다.

“어라, 나 지금 때를 잘못 찾아온 거야? 돌아가?”

“아냐, 제대로 찾아왔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카뮬라는 다가오긴 했지만 앉는 대신 내 옆에 자리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나처럼 책상에 기댔다.

과거에도 이런 버릇이 있었던지라 기분이 묘했다.

‘상황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단 말이지.’

나는 오늘 오후의 일을 떠올렸다.

“……제일 먼저 걔를 치료해 주면 안 되냐?”

좀처럼 내게 뭘 부탁하는 법이 없던 아틀란이 내게 말했다.

본인도 머쓱한지 목 뒤를 한참이나 긁적인 끝에 나온 말이었다.

“왜, 신경 쓰여?”

“뭐…….”

“…….”

“신경 안 쓰인다고 하면 거짓말 아니겠냐?”

둘째 놈이 결국은 쓴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시인했다.

놈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에게 목숨을 빚지거나 빚을 안은 채로 죽었다.

내가 그랬듯 아틀란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틀란의 부탁을 거절하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카뮬라의 ‘특기’가 이번 연구소를 치는 계획에 중요했기 때문에 치료할 생각이었다.

“우린 가장 먼저 널 치료할 거야. 지금은 치료하기 전에 뭐 하나 물어보려고 부른 거고.”

“오, 그래? 별일인걸. 날 높이 사 줬다니 고마운 마음이야.”

카뮬라가 감격한 눈으로 시원하게 씩 웃었다.

“가주님이 날 제일 먼저 부를 때마다 인정받은 기분이라, 너무 좋은데요?”

스쳐 가는 기억을 꾹꾹 누르며 나는 차분하게 표정을 정돈했다.

“혹시 당신, ‘누르기’ 사용할 수 있나?”

바다코끼리 수인의 특기는 타격을 받지 않는 맷집과 엄청난 힘이었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힘을 모아서 ‘누르기’라는 기술을 쓸 수 있었는데.

일시적으로 자신의 무게를 엄청나게 늘려서 힘도 맷집도 늘리는 기술이었다.

3회차에서 카뮬라가 주특기로 쓰는 기술이자, 이 덕에 곧잘 최전방을 맡았다.

한데, 카뮬라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어어? 그거, 우리 바다코끼리 기술 말하는 거지? 나 그거 못 쓰는데?”

“뭐……?”

나는 멈칫했다.

듣자 하니, 카뮬라는 일찍이 매드럼에 잡혀 온 케이스로 그때 다리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 후로 폐기 처분될 뻔한 걸 로레일이 구해 주어서 이곳에 있게 된 거라고.

나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낭패인데.’

로레일과 함께 세운 계획엔 에키온이 장치를 해결한 뒤 굵고 거대한 벽을 넘어트릴 사람이 필요했다.

나나 범고래들이 해도 괜찮지만 다른 곳에 배치된 사람을 빼 와야 되니, 효율성이 떨어졌다.

무엇보다 카뮬라가 이 기술을 쓸 수 있고 없고에 따라 전력 차이가 크다.

‘이번 생은 황태자 새끼 때문에 이렇게 변한 거군.’

입술을 툭툭 쳤다. 이제 와 배우기엔 늦은 기술이었다.

“가주님.”

고개를 돌리니 하우저가 보였다. 본래 혼자 만날 생각이었지만, 함께 가고 싶다 하여 온 사람이 두 사람.

에키온과 하우저였다.

“잠깐…… 조용하게 드릴 말씀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나는 대답 대신 카뮬라를 보았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들으면 안 될 이야기야? 이해해. 편하게 대화해. 난 나갈까?”

“아냐. 고마워. 그럼 잠시 실례할게.”

카뮬라를 제외한 나머지를 둘러싼 반투명한 막이 처졌다. 나는 막을 확인하고서 시선을 돌렸다.

“뭔데? 짧고 간결하게 말해 봐.”

“카뮬라가 그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

“카뮬라가 기억을 떠올리면 됩니다.”

무정한 듯 단출한 말에 나는 그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아, 맞다.’

이미 한차례 레바이와는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 후 일이 긴박하게 흘러간 통에 하우저와는 끝내지 못한 이야기였다.

나는 너희가, 내 수하가 3회차를 떠올리길 바라지 않는다.

그게 내 마음이었고, 확고하게 결정지었다.

“그러고 보니 넌 수하들에게 이전 생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댔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레바이가 얘기해 주던데.”

“배신했군요. 저를.”

하우저는 차분하게 말했다. 전혀 타격받지 않는 낯으로.

“얼씨구, 너희 둘이 언제부터 배신 운운할 정도로 친했다고. 어처구니가 없네.”

“그렇습니까?”

하우저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쨌거나, 그 방법은 기각이야. 다른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을 잡으신 것 아니셨습니까? 다른 계획을 세우기엔 시간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설마 그 정도 시간이 없겠냐? 내가 나서도 상관없어.”

“만약 이 자리에 카뮬라가 있었다면 그걸 원했을까요?”

선을 넘는 발언이었다.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하우저를 응시했다.

“그거야말로 주제 넘는 말이네.”

“제가 무례했다면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이전 생에도 그렇게 뭐든 구멍을 직접 메꾸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우저에게는 제대로 의사를 전달하는 게 좋겠다.

“하우저, 나는 싫다고 했어.”

“…….”

그러나 왜일까. 하우저는 전혀 물러서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직접 한번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기억이 살려지는 과정을요.”

“내가 언제부터 네게 싫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해야 했지?”

오히려 혼자서라도 멋대로 움직일 듯한 기세였다.

이미 레바이를 통해 들었다.

하우저가 레바이보다도 더 지난 생에 집착하고 있음을.

하우저는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내게 좀 더 다가왔다. 하지만 이는 곧 내가 일으킨 물줄기에 가로막혔다.

“내가 싫다고 하잖아.”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팽팽하게 날이 선 분위기를 느꼈을 터였다.

하우저는 대답하는 대신 나를 응시했다.

확신으로 빛나는 눈을 한 채.

“아니면, 본인에게 의사를 물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무슨 의사야. 기억도 못 하는 사람한테-. 찌푸리며 한마디 하려는 순간이었다.

“나한테 뭘 물어볼 건데?”

내 고개가 홱 돌아갔다. 카뮬라가 그 자리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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