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이는 계산할 수는 없지만 수십, 수백의 고래 수인을 만나 온 사람으로서.
모든 고래의 수장이자 수장이었던 자로서 느끼는 본능이었다.
아이는 이제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었다. 이런.
금방이라도 도망갈 듯한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목소리에서 날카로움을 제거했다.
“놀라게 해서 재차 미안해.”
몸을 낮춘다.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이렇게 보니 어리다는 것이 실감 났다.
얼굴을 가리던 로브를 들어 올려 모습을 보이자, 아이의 눈에서 조금이지만 두려움이 가시는 게 보였다.
“너 고래 수인 맞니?”
자그마한 얼굴에 망설임이 스쳤지만 이내 곧 끄덕임이 쫓아왔다.
나는 가까스로 표정을 찌푸리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불꽃을 튀겼다. 거대한 불이 될 법한 불씨를.
‘이런, 도망가겠는데.’
다시 경계하는 아이를 보다, 주머니를 뒤져 무언갈 내밀었다.
“왜, 이곳에 있니?”
아이는 사탕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비쩍 마른 모습을 보아 오래 굶었을 게 뻔했다.
“더, 더는 쓸모가 없어서요…….”
어느새 뒤로 따라붙은 일행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이는 일행을 보고 경계를 다시 세운 거였다.
“혹시 저기 있었니?”
내가 태연하게 도시 중앙을 가리키자, 연구소와 나를 번갈아 보던 아이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있었어?”
“아니, 엄마랑, 아빠랑……. 동생이랑…….”
아이의 목소리는 갈수록 기어들어 갔다. 나는 주먹을 꽉 쥐다 못해 손이 으스러지지 않도록 조절해야 했다.
무언가를 잔뜩 부숴도 성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누가 널 여기 데려온 건지 알아?”
“…….”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신중해야 한다.
“그럼 갑자기, 눈을 떠 보니 이 도시였니?”
아이가 영 입을 열지 않자, 나는 다시 한번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냈다.
아이는 겁먹은 얼굴이면서도 머뭇거리며 사탕을 가져갔다.
“하, 할아버지가……. 좋은 곳에, 가라고 했어요…….”
“할아버지. 이름은 알아?”
그러나 이 대목에서 아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 뒤로 한참 아이를 어르고 달랜 끝에 하나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듣는 순간, 웃음이 피식 나왔다.
대화 끝에 나는 누군가를 불렀다.
“하우저.”
아이가 눈치를 보며 사탕 하나를 허겁지겁 뜯어 먹었다. 내가 먹어도 좋다고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네, 가주님.”
“뭘로 보여?”
이가 빠진 말이었음에도 하우저는 전체를 들은 사람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귀신고래군요.”
고래 수인을 분간하는 건 평범한 사람에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여기 있는 하우저에겐 쉬운 일이었다.
“‘케론’이 현재, 귀신고래 수장인가.”
“아뇨, 전(前) 수장입니다. 2차 반란 때 죽고 둘째 아들이 이어받았습니다.”
2차 반란이라는 말에 리리벨의 기척이 움찔했다.
당연했다. 2차 반란은 그녀의 모친 헤일라가 일으킨 것이었으니까.
“어쩐지, 오합지졸을 데리고 있는 것치고는 꽤나 버티더니.”
저력이 꽤 대단하다 생각했건만, 사실 여기에도 묻어 있던 모양이다.
더러운 황실의 끄나풀이.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게 뭐 있어. 우리가 세상 모든 일을 전부 알 수 있나.”
회귀자라고 해서 전지전능한 신이 되는 게 아닌데.
게다가 나 또한 그 사자 새끼가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 않던가.
‘아아. 차라리 흑표범 가문에 한번 팔려 갔다 돌아올 걸 그랬나.’
그럼 뭔갈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뭐,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말이다.
파르르 떨고 있는 아이를 보니 입맛이 썼다.
이렇게 비이성적인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은.
내가 이들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겠지.
‘내가 한국에 돌아갈 생각 대신에 처음부터 황실 새끼들 조질 생각만 했다면…….’
침묵이 길어지려는 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 탓이 아닙니다.”
“칼립소 탓이 아니야.”
목소리가 겹쳤지만 각기 누구의 음성인지 분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니, 내 탓 맞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래. 그게 앞으로의 일에 더 도움이 될 테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다시 아이를 향했다.
“작전을 변경한다.”
“……네?”
“웨일, 네가 이 아이 좀 맡아 줄래?”
“…….”
누군가의 침음이 이어지고 웨일이 그 사이에서 온화하게 대답했다. 그러겠노라고.
“아무래도 고결하기만 하던 우리 도시에 아무도 몰래, 노린내가 제대로 묻어 있던 모양이야.”
나는 안다. 만약 평범한 방 안에서 누군가를 죽여 치우면.
잘 치워 깨끗해 보이더라도, 아주 자그마한 피 알갱이가 바닥에, 카펫에 알알이 퍼져 있다.
지우지 못한 얼룩은 수사관의 눈에 띄고.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는 조각의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숨어 있던 아주 작디작은 얼룩이었다.
아마도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평생 들킬 리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반란한 놈들. 죽이는 대신 탄광에 보낸 것도 아주 너그러운 처사였구나.”
실제로 굳이 탄광이 크게 필요 없는 도시의 탄광은, 죄인을 효과적으로 평생 고통스럽게 하는 훌륭한 수단이었지만.
이것도 사치였던 모양이다.
“더는 남 일이 아니게 됐어?”
내 말은 의문형으로 끝났지만,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누군가의 사과가 이어졌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나조차도 몰랐던 것을.
아이에게 고개를 돌려 손을 뻗었다. 아니, 손을 뻗으려 했다.
“있잖아. 괜찮으면 우리랑 같이 갈래? 저 형이…….”
그러나 내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투다다닥. 발소리가 들린 건 찰나였다.
내 앞으로 뻗어진 무언가를 가볍게 잡아채는 동시에 나는 입을 열었다.
“멈춰.”
“…….”
“아무도 힘쓰지 마.”
내 앞에는 한 팔로 아이를 끌어안고 다른 팔을 내게 뻗은 남자가 있었다.
씨근덕거리는 얼굴. 나는 목까지 털이 수북한 것을 보다 내게 잡힌 칼을 보았다.
칼을 잡은 손등에도 털이 수북했다.
‘고릴라 수인인가.’
분명, 원숭이놈들의 수장이 고릴라 수인일 텐데?
아이와는 친밀한 사이인지, 아이는 환한 얼굴이었다.
“아저씨……!”
“당신들 뭐야. 왜 이 애에게!”
맨손으로 칼날을 잡은 탓에 손에서 비릿한 핏줄기가 흘렀다.
그와 동시에 푸르른 아지랑이가 일렁이더니 남자를 둥실 들어 올렸다.
나는 검을 잡은 채로 쯧 혀를 찼다.
“에키온, 그러지 마. 정체가…….”
정체가 드러날까 봐 힘을 쓰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건 물의 힘을 쓰는 자에게 해당될 뿐.
“나는 괜찮아.”
에키온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흘러나온 기류가 심상치가 않았다. 아직은 괜찮다.
“나 크게 안 다쳤어. 그냥 생채기야. 그러니…….”
고저 없고 감정마저 없는 목소리에 만류하려던 찰나.
쿵, 소리와 낯선 고릴라 수인에게 주먹이 내리꽂혔다.
“……하우저.”
나는 끙, 하는 심정으로 이마를 붙들었다.
“주인님, 저도 힘을 써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우저가 벽에 부딪힌 고릴라 수인을 두고 태연하게 말했다.
저 거대한 덩치의 인간을 날려 버리고서 말이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멋대로였냐? 그럴 거면 네가 수장해.”
“……요, 아니 에키온 님이 폭주할까 봐 나섰습니다.”
“에키온 핑계 대지 마. 네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선 걸 내가 모를까. 죽을래?”
나는 고개를 돌려 에키온과 하우저를 동시에 노려봤다.
“……잘못했어.”
“시정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혼난 아이처럼 어깨를 움찔했다.
다행스럽게도 텅 빈 거리엔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소란스러워질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이가 어느새 사탕마저 집어 던지고 고릴라 수인 앞을 막아섰고.
고릴라 수인은 끙끙대면서도 털이 수북한 팔로 아이를 끌어안으려 했다.
“새, 새로운 심복이냐?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이것 보게. 말이 좀 묘한데.
“쿨럭, 너희가 사냥꾼이라고 해도, 이 도시는 내가 더 잘 알아! 쿨럭, 게다가 이 애는 이미 실패한, 쪽이니. 데려가도 소용없어…….”
나는 주변을 보다가 결정을 내렸다.
“그 얘기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동시에 얼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반투명한 막이 나타나 저 두 사람과 우리 일행을 감쌌다.
그리고 막은 투명해졌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일 뿐, 역할은 톡톡히 해내고 있을 것이다.
밖에서 우리 모습이 보이지 않게, 또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그 대가로 내 얼굴을 드러내게 됐지만.
“혹시, 여기에 우리 애들. 아, 우리 영지민들이 얼마나 있지?”
미련 없이 모자를 벗어 버리자, 고릴라 수인이 눈을 크게 떴다.
“너, 너는……!”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저 얼굴이 꽤나 익숙하다. 하지만 아는 얼굴은 아니다. 왜일까.
“여기에 수중 동물 수인들, 얼마나 되냐고.”
고릴라 수인은 끝도 없이 경악하더니 이내 빠르게 제 감정을 수습했다.
변화하는 폭이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비틀거리며 자세를 바로 한 이가 나를 다시 응시했다.
“혹시 붙잡힌 사람을, 구출하러 온, 겁니까? 저, 정말로?”
“나는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리 말하면서도 물줄기가 흘러나와 고릴라 수인이 몸을 가눌 수 있게 도왔다.
고릴라 수인답게 허리를 펴니 덩치가 상당했다.
남자는 가만히 물줄기를 바라보더니, 이내 결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소개를 먼저 하자면 로레일입니다.”
“……로레일?”
기억났다.
그래, 원숭이들의 수장이자 그 새끼들이 하나같이 ‘소장’이라 부르던 새끼 이름이 ‘로랜드’였다.
“현재 이 도시의 영주이자 연구소 총괄 소장의 동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