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화
침묵은 많은 역할을 했다.
내가 차마 더는 하지 못한 말을 대신해 자리를 채워 주었으며. 소리 없이 흐르는 레바이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 인내를 채워 주었다.
“…….”
한참 앞을 응시하던 레바이가 나를 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추태를 보였습니다.”
“…….”
“동행하겠습니다.”
반듯한 자세. 정갈한 목소리. 차분한 표정. 어느새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눈물로 인해 발갛게 짓무른 눈 밑을 제외하면.
나는 출발하는 대신 가만히 입을 열었다.
“레바이.”
레바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미세하게 움찔한 어깨는 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 마음이 생각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은.
“나한테 바라는 게 있어?”
“지금 막 차인 마당에 그런 걸 물으시는 겁니까? 그럼 가주님을 제게 주시지요.”
“그거 말고.”
삐딱한 대답에 살짝 웃음이 나올 것 같았으나, 웃지는 않았다.
“지금 하고 싶은 얘기 다 하는 게 낫잖아. 할 말도 남아 있으면서.”
“…….”
“사람은 생각보다 갑자기 마지막을 맞이한다는 거. 우린 이제 잘 알잖아. 그러니까 후회는 남기지 마. 다 들어줄 테니까.”
“귀 기울여 들어주신다는 건지, 아니면 제 바람을 모두 수용해 주시겠다는 건지. 모르긴 몰라도 참 잔인하십니다.”
“…….”
“그런 당신이라서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제가.”
고집스럽게 앞만 보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레바이는 잠시 안경을 벗더니 제 가슴 주머니에 안경을 무심히 넣었다.
오랜만에 보는 맨눈이었다.
“보셨지요, 저는 이제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그게 무슨 또X이 같은 말이니. 정말 안 보인다는 거야, 비유법이야?”
“글쎄요, 둘 다 아닐까요?”
“뭐?”
“좀 별스러운 이야기를 하긴 할 거라.”
내가 작게 미간을 좁혔다.
“그보다 뱀 가문 가주에겐 바로 가지 않으셔도 됩니까? 기다릴 텐데요.”
“미안하지만 기다리라고 해.”
“…….”
“지금은 너와의 대화가 더 중요하니까.”
뱀 가문의 가주가 무엇을 말할지 짐작이 가는 데다가, 급한 일이었다면 본인이 직접 오겠지.
이런 계산적인 마음 때문은 아니고 진심이었다.
이런 대화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만큼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니까.
“이러니까 사람 미치는 겁니다. 아십니까?”
……이번엔 내가 또 뭘 했다고?
“그래서 아마 포기도 못 하겠지요.”
“…….”
“싫다고 하시니 거북하실 만한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 옆에 있는 것조차 못하게 되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깊은 눈동자였다.
“가주님, 가주님의 의무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무슨 의무?”
가주의 의무란 한 손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가신들을 화합시킬 의무, 내 영지를 지킬 의무, 영지를 번영시킬 의무, 영지를 보호할 의무, 영지민을 돌볼 의무…….
“가주는 남편을 하나만 두지 않는 것. 말입니다.”
한없이 공공적인 것을 생각할 때 생뚱맞은 대답이 들려왔다.
적어도 나한텐 그랬다.
“……미친, 그게 언제부터 의무였는데?”
“잘 모르시는 듯한데, 아콰시아델의 영지법은 가주님께서 잘 아시겠습니까, 제가 잘 알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
“……너지.”
레바이의 차가운 낯으로 희미한 미소가 스몄다.
“범고래 수인들은 오래전부터 특유의 호전성이나 동지애 등이 특징인 반면, 후손을 잘 낳지 않아 개체수가 줄어들던 때가 있었지요.”
“지금 범고래 앞에서 범고래 역사 강의하냐?”
“이에 가주는 종족의 다양성과 발전을 위해 앞장서 다양한 반려를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범고래는 물론 타 수인도 포함하여.”
“…….”
“지금에 와서는 사문화된 법이라고 하나, 가주님께서 이를 꼭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응, 그래. 네 또X이 같은 소리 잘 들었다, 책사야.”
진지하게 들어 보려 한 내 잘못인가. 원래 이런 상황에 실없던 놈이 아닌데.
아니지, 이놈도 이번 생을 살면서 바뀌었을지, 누가 안담.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시간 낭비였다, 투덜거리며.
“됐고, 여기 가주한테나 가…….”
레바이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내 손목을 잡았고 절로 말을 멈췄다.
다가오는 걸 알았지만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라도 곁에 있고 싶다는 말입니다. 애정도 사랑도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저 지난 생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책사로는 더는 만족하지 못하겠어서, 그래서 미친 소릴 꺼냈습니다. 그저 당신과 서류상으로라도, 아니, 무엇이든 좋으니 엮여 있고 싶어서요.”
“…….”
“당장 결정해 달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꼭 해 주셔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레바이가 바닥을 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해 주세요. 그게 제 바람입니다.”
* * *
‘어쩌다 내 인생 이렇게 인기인이 된 걸까.’
회의실에서 나는 진지하게 고찰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3회차에서 레바이와 내가 그렇고 그런 대화를 나눴고, 내가 레바이의 마음도 내 마음도 몰랐으니, 레바이는 그렇다 치고.
‘하우저밖에 없었지? 아마.’
나 좋다고 달려든 놈 말이다.
그 외에는 정말 무수히 많은 수하와 가신들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별을 박아 두기라도 한 것처럼 맹목적인 충성 어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가끔은 과잉 충성에 무서울 지경이었다.
‘외모가 달라진 것도 아니고, 성격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무슨 차이인 걸까.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연애적으로 그리 좋은 자존감을 가질 형편이 못 됐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삶에서 정말 지독한 소릴 들어가며 흑표범 저택에서 지냈지 않았던가.
약혼자랍시고 있던 새끼는 그런 조롱과 비웃음에 일조하면 했지 대부분 방관하던 놈이었던지라.
“듣고 있나요, 아콰시아델 가주?”
“아, 듣고 있어요. 아주 잘.”
고개를 들어 올리면, 뱀 가문의 가주 나타샤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고운 미간이 살짝 찡그려진 채였다.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뱀의 전사들이 생포와 사살엔 실패했지만, 추격은 실패하지 않았다면서요. 용의 무덤을 습격한 황실 측 전사들 말입니다.”
“듣고 있었네요?”
“그럼요.”
딴짓, 딴생각하면서 듣기가 지난 회차 내 주특기였다.
레바이의 혈압을 다채롭게 올리던 특기였지.
“그놈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요? 황실?”
“그랬다면 증거를 잡을 수 있을 테니 얼마나 좋겠느냐만은, 애석하게 아니더군요.”
나타샤가 회의실 책상에 있던 두루마리를 펼쳤다. 대륙 지도였다.
나타샤의 긴 손가락이 한곳을 짚었다.
“이곳이 우리 영지. 그리고 도망친 이들이 가는 방향은 이쪽.”
손가락이 직선을 그었다.
‘고작해야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꽤 움직였군.’
나타샤의 손끝엔 산과 바위가 그려져 있었다.
“가는 방향이 조금 특이해요.”
“특이하다면?”
“여긴 사실 더는 잘 쓰지 않는 길이니까요.”
“어째서죠?”
나타샤는 여긴 몇 대 전 뱀 가문의 가주가 인력을 동원해 막아 버린 곳이었기에.
이쪽으로 가려면 아주 좁은 길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와는 사이가 좋지 못한, 아니, 꼴도 보기 싫은 놈들이 이곳에 산답니다.”
나타샤의 손은 도망간 놈들의 경로를 따라 또 한 번 직선을 그었다.
이 길 끝에는 이 도시가 있노라고.
“바로 원숭이들이 다스리는 도시, ‘매드럼’이죠.”
원숭이. 황태자의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충신이자, 도덕도 윤리도 개나 줘 버린 놈들이다.
나사가 죄다 빠져 버린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놈들이라고 할까.
“그리고 당신이 데려온 수하가 악어 대장의 세뇌를 풀어 주었던 것 기억하겠죠? 덕분에 악어들과도 이야기가 잘 풀렸어요.”
나타샤가 손바닥으로 지도를 쓸었다.
“황실이 자신들의 산란기를 이용해 아이들까지 노예로 삼으려 했다는 사실에 분개하더군요.”
덕분에 진실을 듣고 협조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고.
“그런다고 한들, 황실에 반기를 드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수완이 대단하네요, 뱀 가주.”
“아, 범고래들은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 종족이었던가요?”
“전체로 보면 그렇죠.”
“우린 달라요. 악어들이나 우리에게 아이들은 더없이 소중하며 종족의 미래를 이어 줄 보물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어들에게 좋은 약이라며 약을 줬던 황실의 전령이 있었다더군요.”
숫자는 총 다섯.
“그리고 진실을 밝히고 추궁하기 무섭게 그 자리에 있던 악어들을 찌르고 도망갔으나, 둘은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둘은 붙잡혔으며. 하나는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래서요?”
“여기까지 모두 예상했던 바라, 대기하고 있던 우리 인원이 추격 중이지요.”
나타샤가 콕, 한곳을 찔렀다. 조금 전 가리켰던 바로 그 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