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44화 (244/275)

제244화

레바이는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말을 이었다.

“뱀 가문의 가주가 한번 보자고 전해 왔는데,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에키온의 커다란 손이 나를 붙들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스르륵 떨어졌다.

“……붙잡아서 미안. 다녀와.”

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듯 닿은 살갗이 따끈하고 몽롱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래?”

나는 에키온의 손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고는 시선을 돌렸다.

“정확하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정글에서 있었던 일과 관련한 듯합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나는 에키온을 자리에 눕혀 두고는 일어났다.

“가자.”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서 걸음을 걷자니, 관자놀이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레바이.”

나는 굳이 돌아보는 대신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

“딱히 참는 성격이 아니잖아? 우리 책사께서는.”

잠시간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아주 희미하지만 한숨 소리를 들었다.

“사랑하십니까?”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뱀 가문 가주가 먼 곳에서 온 우리를 배려하여 건물 통째로 비워 준 덕택이었다.

따라서 조용한 복도는 평소보다 소리가 크게 울렸다.

“…….”

말을 꺼낸 레바이는 고요했다. 표정도 목소리도.

그러나 오래 봐 왔기에 알았다. 놈의 차분한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센 폭풍을 맞이한 것을.

애써 숨기려 해도 보였다.

“드디어 사랑을 알게 되신 겁니까?”

“그 말은 좀 웃기다.”

“…….”

“범주는 달라도 네가 나를 존경하고 따르며, 내가 너를 아끼고 다른 놈들을 아낀 건 사랑이 아닌가.”

“…….”

“이번 생에서 아빠를 사랑하고 오빠들을 향해 느끼는 사랑은 어떻고.”

“가주님, 말장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게, 그럴 기분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걸음은 일정하게 이어졌다.

“사랑하냐고? 글쎄, 끌리긴 해.”

“정말이십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그것이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느냔 말입니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레바이는 꼿꼿하게 앞을 바라본 채 말했다.

“만약 제가 처음부터 기억이 있었다는 걸 밝혔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 같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했다.

“저뿐만 아니라 아넬리, 카뮬라, 하우저, 롤리, 케하라……. 이외에도 언급하지 못하는 모든 수하들이 이전 생과 똑같이 돌아온다면.”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호흡을 띠며 차분하게 말을 맺었다.

“그럼 당신의 결정이 달라집니까?”

그리운 이름에 잠시 멈칫했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못했다.

다만 하우저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그리우시다면. 그래서 제가 가주님께 그 시절을 돌려드릴 수 있다면 수락하시겠습니까?”

레바이가 갑자기 이러는 건 필시 하우저의 이 말과도 관계가 있을 터였다.

“꼭 무슨 방법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네.”

“저는 모릅니다.”

“웃기지 마. 네가 모르는 것도 있어?”

“예, 이를테면 가주님 마음을. 평생 몰라 생을 아쉽게 보냈지요.”

“…….”

“저는 모르지만 하우저 그 인간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생의 기억을 일깨우는 방법 말입니다.”

나는 흠칫했다. 처음으로 걸음이 멈췄다.

“회귀라는 것, 처음 깨달았을 땐 내가 잘못했던 것 그리고 후회하는 것들을 모두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레바이는 나와 첫 시작이 늘 후회가 됐으니. 이번엔 좀 더 평범하게 나와 만나서 평범한 일상을 누려 보고 싶다고 했다.

“사실 모든 수하들의 마음이 그러했을 겁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당신을 보고 싶은 것.”

레바이가 천천히 손을 제 얼굴에 가져다 댔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 생의 당신은 지키기 위해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당신에 비하면 약해 빠진 우릴 지키기 위해 당신의 피를 말입니다.”

아니야, 그렇지 않다. 말을 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나는 당신 앞에 너무 멀쩡하게 나타났습니다. 그게 패인이었던 겁니다.”

“…….”

“당신이 불쌍하고 안타까운 존재에게, 이렇게나 약할 줄 모르고.”

끝내 걸음이 멈췄다. 고개를 돌리면, 처음으로 무너진 얼굴을 한 레바이가 보였다.

내게 고백할 때조차 이렇게 무너지지 않았던 네가.

“용 공작이 불쌍했습니까? 그 가련한 처지가 안타까웠습니까?”

아니라곤 할 수 없었다. 우월감이라 하여도 좋고, 연민이라 하여도 좋았다.

에키온을 향한 감정의 시작이 동정에 가까웠기에.

“당신 앞에 더 처절하게 나타나지 못한 걸 후회합니다.”

“레바이.”

“왜, 멋대로 끝내십니까? 당신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나와 하우저 그놈은 아직 거기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

“당신이 살 거라 믿으며, 안온하게 죽어 버린 우리들이 말입니다!”

“…….”

“후회합니다, 당신마저 죽어 버릴 걸 알았다면, 먼저 가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에게 있어 우리가 먼저 죽는 의미를 내가 모르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주르륵 안경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길 바라서, 소원했는데. 왜 다음 생에서 만난 겁니까?”

“…….”

나는 심호흡했다.

“평범하게 만나면, 침묵하면서 기다리면 나를 알아줄 거라 생각한 제 잘못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우리가 원래 그대로 재회할 방도가 있다면. 당신은 응당 우리를 선택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건 어린아이의 고집과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앞에서 합리성과 논리를 따질 수 없었다.

“……정글에서 황태자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갇혔을 때.”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자 레바이가 입을 다물었다.

안경 아래 짙은 눈동자에서 원망이 묻어 나왔지만, 찰나였다.

너는 이렇게 늘 내게 경청하고 집중하는 사람이었다.

“용 공작이, 에키온이 기억을 되찾았다는 걸 알았어. 그리고 기억을 잃은 이유도.”

“그것이 당신의 마음을 정하게 만들었습니까?”

“끝까지 들어 봐. 너 내가 평생 솔로, 아니지. 평생 독신에 연애도 못 한 거 알고 있지? 당연히 첫 키스도 못 해 봤고 말이야.”

“……? 갑자기 그게 무슨 이야기이십니까……?”

“어쩌다 보니 내가 첫 키스를 거기서 할 뻔해서.”

레바이가 입을 딱 다물었다. 정갈하고 날카로운 얼굴로 숨길 수 없는 충격과 동요가 스쳤다.

“그런데 못했어.”

“…….”

“미수였다고.”

나는 첫 뽀뽀를, 그래 첫 키스를 하던 때를 떠올렸다.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그만.”

다시 한번 입을 가로막았다.

“너희가 떠올랐어. 하우저의 마음도, 네 마음도. 나는 아직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마당에.”

“…….”

“옳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제대로 걷어차고 나서야 즐기겠다는 겁니까?”

“말 참 예쁘게 한다?”

레바이가 움찔하며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인정할게.”

하우저가 나타나면서, 레바이가 기억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혼란스러웠다.

마치 3회차로 돌아간 것과 같은 착각을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잊으려 했지만 잊을 수 없었던 것. 나를 살리기 위해 죽어간 너희들이 그립고.

마음에 사무쳐서.

후회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이전 생의 나는.”

3회차의 나는.

“널 사랑했을지도 모르겠어.”

제아무리 짓궂은 장난을 즐기더라도 경우를 모르진 않았다.

레바이 앞에서만 흘리고 만 말들은 아마도 나조차 몰랐던 진심을 반영했을 터였다.

나 또한 시간의 틈에서 기나긴 생을 반추하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미안해. 매번 장난 같은 말로 널 놀려 먹어서.”

“…….”

“단 한 번도 진심이라고 말해 주지 못해서.”

어떻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너는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알고 있던 책사였다.

전쟁 중 누군가 죽거나 다치면 눈물조차 흘리지 못해 막사에 틀어박혔고.

그럴 때면 고요하게 날 대신해 할 일을 끝내고 밤새도록 내 막사 앞에 서 있던 너를.

“레바이.”

“…….”

“나는 말이야. 이 지긋지긋한 생을 끝내고 싶었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가주가 되고, 다시 너희를 만나면 그 끝이 너희의 죽음일 거라는.

그 반복이 지겹고 괴로워서.

“그래서 수단으로 모든 생에서 나를 버린 피에르 아콰시아델을 선택했고. 그래, 말했듯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이었어.”

눈 감으면 이번 생이 스르륵 스쳐 지나갔다.

라일라, 루가루바, 미사, 청어 자매들…….

한 번도 가까이서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과 한 번도 있던 적 없던 일들.

셋째를 때려잡고, 교육기관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고, 회의에서 가주의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내 뜻을 꺾어 버릴 정도로, 아빠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

“…….”

“용서하게 될 줄도.”

고민했다. 3회차의 그놈들을 다시 눈앞에 데려온다면?

이번에야말로 3회차에서 나 때문에 죽은 걸 후회하지 않게, 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좋다. 너무 행복하다.

하지만 그건 그저 이상일 뿐이다.

“너희를 마주할 내가 더는 지난 생과 같은 사람이 아니야.”

루가루바를 만나 어린 친구들과 노는 재미를 알았고.

라일라를 통해 인정의 짜릿함을 느꼈고. 미사와 청어 하녀들을 통해 모정이 무엇인지 다시 느꼈다.

나는 독기로만 가득했던 3회차의 내가 될 수 없었다.

“미안해.”

그 어떤 때보다 무거운 사과가 흘러나왔다.

“너흴 죽게 만들어서. 나는 무능한 가주였어.”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였다.

“미안해.”

혹하던 마음을 버리고, 우리의 시간이 지나가 버렸음을.

“널 사랑하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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