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43화 (243/275)

제243화

쿵쿵.

내 생애, 아니. 앞선 회차와 전생을 통틀어서도 한 번도 없던 상황과 행동에.

나 또한 그 유능한 머리와 행동 능력은 어디 간 건지.

놀란 얼굴로 백치처럼 가만히 있었다. 정확하게는 눈동자만 열심히 굴렸다.

눈을 감고 있는 에키온의 얼굴, 가지런한 눈썹과, 그 아래로 매번 하녀들이 예술이라 부르짖던 콧날과.

그 어느 날은 내가 만약 성장한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했던 눈매까지…….

나는 손을 떼어 냈다.

속으로는 화들짝 놀라 떼어 내는 것에 가까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태연함을 가장한 채로.

그럼에도 미약한 떨림은 있었다.

에키온이 눈을 떴다. 태양처럼 요요히 빛나는 눈동자가 지나치게 가깝다.

“……무슨 생각해, 칼립소?”

“나쁜 생각.”

눈을 들어 올렸다. 깨끗한 눈동자였다. 그저 날 향해 흘러넘치는 애정을 제외한다면.

“네 얼굴이 이렇게 생겨 먹어서, 이런 상황에 사람 홀리나 싶은.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어.”

“…….”

“그냥 그렇다고, 네가 한 말은…….”

“……마음에 들어?”

에키온의 입에서 떼어 낸 손이 어느새 커다란 손에 잡혀 있었다.

애정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은 듯 깍지를 껴 오는 손이 싫지만은 않았기에 그저 시선을 한 번 줄 뿐. 다시 눈을 들어 올렸다.

“칼립소. 그 사람을 갖고 싶다면, 먼저 목줄을 내어 주라고 했어.”

“……그렇게 말한 적 있긴 한데 잘도 기억하네, 넌.”

“응.”

그거야, 그때는. 네가 그 말을 써먹는 상대가 내가 될 줄은 몰랐거든.

나도 네가 하는 이 말에 동요할 줄도 몰랐고.

거리가 가까웠다.

숨결을 나누는 사이라. 인생에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것을 한 발짝 앞두고 있었다.

여러 생각이 교차한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눈앞의 얼굴을, 눈에 가득 담긴 진득한 애정과 시선을 보며 무언가 앞서가는 것도 내가 어찌할 수 없던 일이었다.

“내가 용을 손에 넣을 줄은 생각 못 해 봤는데 말이야.”

오래전 그날 널 구하던 나는 아마 몰랐을 거야.

조력자, 협력자 정도로 생각했던 용이 직접 제 목줄을 내어 줄 거라곤.

“에키온. 그렇지만, 나도 서툰 것 정도는 있거든. 내 감정이 특히나 그럴 거야. 인생에서 이성과 사랑을, 연애와 결혼을 용납한 적이 없으니까.”

에키온은 성장 전의 무구한 듯 깨끗한 눈을 한 채 나와 조금 더 가까워졌다.

“내가 지금 혼란스럽다는 거야.”

암묵적으로 괜찮다고 하듯이.

네 침묵은 늘 긍정이었고, 지금도 그러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침묵도 혼란도 교차하는 감정도, 풋풋하게 빛나는 무언가도 어둠이 모두 가려 주는 것 같았다.

아주 잠깐 이런 공간이어서, 어둠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 * *

쾅, 쾅! 콰아앙!

마치 새까만 돌 같은 벽이 일시에 깨졌다. 나는 그 사이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런 내 옆에는 내게 팔을 얹고 추욱 늘어진 에키온이 부축당하고 있었다.

빛이 흘러나오며,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가주님, 괜찮으세요?”

“가주님!”

“아, 리리벨. 하우저.”

“야, 어떻게 된 거야?”

리리벨과 하우저를 포함해 아틀란과 벨루스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칼립소!”

옆으론 웨일과 레바이도 보였다.

하나같이 표정에 경악과 염려를 담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당했어.”

“뭐?”

“황태자 놈에게 당했다고.”

나는 조금 전 있던 상황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 인생 첫 뽀뽀를 할 때만 해도 이게 설레는 기분인가 했건만.

무언가 둔탁하면서도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다. 황급히 눈을 뜨고 나와 에키온을 보호했지만.

조금 늦었다.

이 공간 특성상 기척이 거의 사라지기에, 이미 눈앞에 다가왔던 것이다.

내가 느낀 기척의 정체는 바로 나무줄기처럼 뻗은 검은 그림자였다.

에키온을 주력으로 보호한 나머지, 검은 그림자가 내게 거의 닿을 듯했다.

그 순간 검은 그림자는 촉수처럼 가는 줄기를 뻗었고, 에키온이 날 밀어냈다.

아차 하는 사이에 그림자가 에키온을 칭칭 감았다.

동시에 에키온이 눈을 부릅뜨더니. 폭발적인 힘이 흘러나왔고.

그 힘은 내가 용 공작의 폭주에서도 익히 느꼈던, 폭주할 때의 힘과 비슷했다.

“에키온!”

“쿨럭! 만지면 안 돼!”

에키온이 검은 피를 토하며 외쳤다.

“시간, 함정…… 하아, 용의, 힘을, 역이용…….”

“대체 무슨 소리야?!”

다행히 검은 그림자가 강력한 힘은 아니었던 것인지, 물의 힘으로 금세 풀렸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풀려난 에키온의 몸에는 검은 문신 같은 게 떠올랐다.

게다가 그림자들이 눈에 띄게 시들어 갔다.

마치 그림자들의 역할이 그저 닿기만 하면 상관없던 것처럼.

대체 무엇인 걸까.

찌푸리며 에키온의 만류를 진정시키는 한편. 손끝으로 그림자 끝을 툭 건드렸다.

그리고 그 순간.

‘여긴…….’

나는 익숙한 공간에 서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일부러, 그리고 자연스럽게 잊어버린 곳.

한국에 있는 양부모님의 집이었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눈앞으로 부모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자그마한 아이는 누가 봐도 엄마와 아빠를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이제는 오래된 일이지만 심장이 지끈거렸다.

“하하, 우리 지은이 잘 걷네. 아이구, 이뻐. 우리 하나밖에 없는 딸!”

“아뺘!”

“그래, 아빠야.”

“여보, 이렇게 되고 보니 시은이가 차라리 없어진 게 낫지 않아?”

쿵, 지끈거리던 심장이 추락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아빠가 웃으며 동의했다.

“그러게, 이제 생각해 보니 잘된 일이야. 진짜 가족끼리만 살게 되었으니 말이야.”

이 말을 끝으로 단란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점차 이 공간에서 쫓겨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다시 현실이었다. 검은 공동에 갇힌 현실.

바닥에는 이제는 말라붙은 그림자가 보였다.

‘뭐야, 이거. 환상?’

환상이라기엔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에키온의 도움으로 시공간을 넘어 한때 부모님을 뵌 적 있기에 알 수 있었다.

정신 공격?

그래, 정신 공격에 가깝지 않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 정신에 무척이나 해로운 공격이었다고.

‘에키온도 시간이랑 함정이라고 말했어.’

문제는 정말 찰나 접촉했을 뿐인데, 머리가 지끈거리고 힘이 쭉 빠졌다.

그렇다면 온몸이 칭칭 감겼던 에키온은 더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일 터.

어쩌면 용과, 나 같은 회귀자에게 가장 최악일 공격.

거기까지 떠올리고서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태자 새끼가 나타났다는 소리야?”

눈앞에는 염려로 가득한 아틀란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 그건 아니야. 대신 미리 알아 다행이라 할지, 당장은 대안이 없으니 불행이라 할지.”

나는 에키온을 응시했다.

“좋지 않은 소식이 있단 거지.”

회귀자에게 통하는 공격이라, 내가 힘들었다면 아틀란에게도, 나아가 하우저와 레바이에게도 통할지 모르는 일이다.

황태자 그놈이 악의 어린 칼날을 제대로 갈았다는 게 아주 또렷이 느껴진다.

* * *

다행스럽게도 에키온은 뱀 가문의 성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에키온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시간 왜곡?”

“응…….”

에키온의 턱에 진땀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가 그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는 이미 고정된 형태, 누구도 바꿀 수 없어. 하지만 용의 힘을 이용해서…… 과거를 가져와, 공격하는 거야. 존재를 갉아먹도록.”

“존재?”

“응. 영혼…….”

“그럼, 내가 본 건 진짜 있던 일이라는 거야?”

에키온이 고개를 내저었다.

정확하게는 시간 축에서 과거를 가져와 공격 대상이 더욱 괴로워하고 영혼에 손상을 입도록, 시간을 왜곡하는 공격 형태라고.

그리고 이와 별개로 같은 용에게는 최악의 공격이라고 한다.

“붉은, 용의 특기야…….”

에키온의 말에 나는 정글 속에 있던 용의 무덤을 떠올렸다.

우리가 발견한 건 녹색 용의 뼈.

“황태자가 다른 무덤을 발견한 거겠지?”

“……아마도.”

여기까지 말한 에키온은 아직 덜 회복되었는지, 그대로 앞으로 툭 쓰러졌다.

놀라 얼른 받아 주는 사이, 에키온의 머리가 내 어깨로 톡 떨어졌다.

“가지 마…….”

“그래그래. 네가 잠들 때까진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아니, 잠, 들어도…….”

여기까지 들었을 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주님, 뱀 가문의 가주가…….”

막 들어오던 레바이가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내게 기댄 에키온을 아주 빤히 보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