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7화
도와줘?
“무엇을 말이지?”
“현재 저희 뱀 수인들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팔라야가 지나치게 정중하다 싶었더니, 모두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팔라야가 해 준 설명인즉 이러했다. 현재 황성에서 뱀 가문을 압박하고 있다고.
3년 전부터 근처에 위치한 다른 가문으로부터 크고 작은 시비가 걸렸는데.
알고 보니 그 뒤엔 황실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 그치지 않고 걸리는 시비의 크기가 차차 커지더니.
이윽고 황실이 직접 나서기까지 했단 것이다.
“맹점은, 뱀 수인들이 수백 년간 살아온 땅이 본래는 황실의 것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뱀 가문 모든 일원은 영지 밖으로 나갈 것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경고장도 받았습니다.”
“이쪽은 초대장에 그쪽엔 경고장이라.”
“네?”
“아냐, 계속해.”
현재 뱀 가문 수장도 수완이 꽤나 대단하여 잘 버티고 있지만.
이대로 황실이 무력을 쓴다면 어떻게 될지 자명했다.
“다행히 뱀 가문에는 유능한 전사들이 많고, 이번 세대에 특히나 많은 편입니다. 하지만 황실을 홀로 상대하기엔 역부족입니다.”
“그렇지. 그놈들이 괜히 깡패, 양아치 새끼들이겠어?”
“…….”
팔라야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어라, 통쾌함마저 스치네?
보아하니 어지간히 황실에 털린 모양이었다.
“문제는 저희 가문에는 현재 릴리도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생을 반추하자면 황태자는 어떤 이유에서건 릴리를 원할 터였다.
“릴리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흑표범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설 겁니다.”
팔라야는 흑표범을 남처럼 이야기했다.
“저는 저희가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는 것도, 릴리를 빼앗기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부디 저희를 도와주시겠습니까?”
“…….”
“간청드립니다.”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모든 이권 다툼에서 승리한 자에겐 언제나 ‘명분’이 있다.
바꿔 말해 싸움에 정당하게 끼어들기 위해선 적당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우리는 황태자놈이 초대에 응하지 않기 위해서.
혹은 황실과 부딪치기 위한 명분이 필요하던 차였다.
“일단 물러나. 회의를 한번 해 볼 테니.”
하지만 기회가 왔다고 한들 바로 붙잡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래서 시간을 두기로 했다.
잠시 판단할 시간을.
* * *
가신들과 회의 결과, 반신반의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긍정적이었다.
아틀란같이 릴리를 기억하는 이들은 더욱더 긍정적이었다.
“진실을 판별하는 특기를 가진 가신을 데려와 재차 물었습니다만,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럴 것 같았어.”
팔라야가 다른 것이라면 모를까, 릴리와 관련된 일을 두고 사람을 속일 리가 없었다.
“제의를 받아들이지.”
팔라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한편으로는 미심쩍음이 느껴졌다.
너무 쉽게 수락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야.”
“……예, 그 부분은 저희도 이해합니다.”
“너희가 필요한 건 화력이야? 아니면 무력이야?”
“…….”
“그것도 아니라면, 정치 싸움?”
팔라야가 가만히 침묵하더니 정중하게 나를 응시했다.
“전부 다입니다.”
“이런, 욕심이 많네.”
“…….”
“우리의 협조를 받는 만큼 정당한 대가를 줘야 할 거야.”
팔라야가 대답 대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처음 들어올 때의 인사에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면.
이번엔 진심에서 우러나온 듯한 인사였다.
아마 이놈은 우리가 적절한 명분을 찾고 있었다는 것도.
때마침 가져온 용건이 우리 입맛에 아주 걸맞다 못해 환영할 정도란 사실도 전혀 모를 터였다.
뭐, 어때. 결국 서로 윈윈하면 그만 아니던가.
‘유비무환이라더니. 과연, 준비해 둬서 나쁠 건 없단 말이지.’
언제 황실로 쳐들어갈지, 혹은 전쟁이 날지 준비하던 덕분에.
쓰일 곳이 생기자 바로 움직일 수 있으니 말이다.
이틀 뒤.
팔라야가 뱀 가문으로 돌아갈 때 함께 갈 1차 인원을 뽑아 동행하기로 했다.
내가 자진해서 이 일행에 끼었기에 한동안 나를 만류하는 실랑이가 있었지만.
의외로 아빠가 나를 지지해 준 덕분에 합류할 수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다잖아. 언제 전면전이 벌어질지 모르니, 내가 가야지.”
“……가주님께서는 모든 싸움에 참여하겠다는 마음을 조금 버리시면 참 좋겠습니다만.”
“되는 걸 바라, 되는 걸.”
일행에는 일반 기사와 병사를 제외하면 레바이와 하우저, 리리벨, 아틀란과 벨루스, 웨일.
마지막으로 용 공작이 합류했다.
사실 용 공작의 합류를 두고도 소소한 분란이 있었지만.
아니, 어째서인지 아빠가 결사반대했지만. 의외로 웨일이 용 공작의 합류를 지지했기에 함께할 수 있었다.
“칼립소, 황실은 이미 용 공작이 이곳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다며? 이곳을 습격할지도 모르지. 그때 용 공작이 없다면…….”
“물 먹일 수 있다? 나쁘지 않네.”
여차저차 크고 작은 소란 끝에 우리는 출발했다.
뱀 가문 영지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리는 편이었으나, 합류한 이들 모두가 체력이 좋은 데다가.
발을 바삐 놀린 덕분에 빠르게 뱀의 영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갈색 벽돌로 쌓인 성대한 성벽이 우릴 반겼다.
‘호오, 밀림?’
성 주변으로 우거진 숲과 밀림이 보였다.
굳이 예시를 찾자면, 아마존 숲같이 우거진 거대한 열대우림 같달까.
실제로 근처에 거대한 강이 있었으며, 기온이 꽤나 후덥지근한 편이었다.
‘뱀 가주가 아나콘다였던가.’
나는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긴 생에서 한 번도 직접적으로 엮여 본 적 없는 인물이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팔라야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려니, 곧 커다란 영주성을 맞이했다.
성 또한 갈색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지나가고 있자니 도열한 기사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는데.
뱀 수인답게 대부분이 눈매가 쭉 찢어져 있으며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성에는 물뱀 수인도 꽤 살고 있습니다.”
같은 물에 사는 놈이다, 이건가?
나는 팔라야를 한 번 보았다가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은 밖과 달리 높은 온도에 건조했다.
“뱀 수인에게 가장 알맞은 온도로 유지되다 보니, 아마 조금 덥고 건조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그러네.”
우리는 기본적으로 물에 사는 짐승이니, 아무래도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성문에 들어선 순간부터, 영주성에 도착한 지금까지.
그 어떤 수인도 우리를 이상하게 보거나 평소 육지놈들이 그러하듯 멸시하는 눈초리를 보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드물지만 수중 동물 수인도 보이기도 했고.
“가주님, 아콰시아델의 가주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커다란 의자와 의자 주변에 쳐진 베일을 보았다.
팔라야의 말과 함께 베일이 거둬지더니, 그 사이에서 요염한 인상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쭉 찢어진 눈매와 마치 에키온의 것과 같은 파충류 특유의 타원형 동공.
“이런, 세상에. 생각지 못한 거물이 오셨구나?”
뱀들의 주인이었다.
“반가워요, 나타샤라고 합니다. 어린 범고래 가주.”
“‘어린’은 빼 주셔도 무방한데. 이래 봬도 성인이라서.”
“그런가요?”
나타샤가 눈을 가늘게 접었다.
오, 정말 뱀처럼 웃네.
“사정은 댁 아들을 통해 모두 들었습니다. 아쉬운 쪽이 말도 곱게 쓰셔야지, 안 그렇습니까?”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딱이자, 주변에 서 있던 호위들이 쉬익, 하는 뱀 특유의 혓소리를 냈다.
나타샤는 손을 까딱이더니 그저 웃어 보였다.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범고래 가주.”
“별말씀을. 인정이 빠르니 좋네요. 그래서, 본론부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물론, 바라는 바랍니다.”
“우리 도움이 필요하다 들었는데, 현재 가장 필요한 도움이 뭔가요?”
“흐음, 조금 난감한 질문이네요…….”
난감한 질문? 가벼이 물은 건데?
나타샤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순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홱 돌렸다.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
“한번 직접 보시겠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나타샤가 주변에 있던 기사 하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가 손을 휙 움직이는 순간 우리 몸이 둥실 떠올랐다.
동시에 활짝 열린 창문으로 휙 내보내졌는데, 나타샤도 내 옆에서 둥실 떠 있었다.
“날아다니는 뱀의 솜씨랍니다. 나쁘지 않는 특기지요?”
“네, 나쁘지 않네요.”
내가 대답하는 순간 바닥에서 물줄기가 솟았다. 동시에 내 몸을 지탱했다.
“하지만 남의 손에 내 목숨을 맡기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알아서 가죠.”
“…….”
나타샤는 잠시 놀라더니, 이내 의미 모를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그대로 둥실 뜬 채 들어왔던 성문과는 반대쪽, 서쪽에 위치한 성벽에 다다랐다.
그리고.
까맣게 몰려오는 군대를 보았다.
“저건 뭐죠?”
“악어들이랍니다.”
“……악어?”
저런 새카만 놈들이?
“그리고 황실이 보낸, 독이기도 하지요.”
내가 볼 수 있는 건, 눈깔이 뒤집혀 사람 같지 않은 몰골을 한 수인들이었다.
왜일까, 황태자 놈의 인형이 떠올랐다. 땅의 힘으로 만든 인형.
오싹한 광경을 아래에 두고 나타샤의 얼굴이 굳었다.
“저것들이 우리의 전사를 찬찬히 말려 죽이고 있어요.”
“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자세한 건 일단 저것부터 해치우고 이야기하면 된다는 거죠?”
“네? 잠시만……! 함부로 내려가지 말아요, 저들에겐 이상한 독이!”
“아, 그러니까 닿으면 안 된다?”
오케이. 접수.
“야, 가주님, 야! 잠깐만!”
“너흰 거기 있어.”
나는 물줄기로 금방이라도 따라나서려는 수하들을 꽁꽁 묶어 둔 뒤, 바닥에 내려섰다.
두두두두.
이야, 땅이 울릴 정도의 인원을 맞이한 게 얼마만이던가.
‘오랜만이네.’
눈앞으로 기백은 될 만한 수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내가 씩 웃는 동시에 땅에서 무수하게 많은 물줄기가 솟았다.
“닿지 않고 싸우는 것도 전문이라.”
솟고 솟은 물줄기가 곧 거대한 파도가 된다.
슈아아아아아악!
모든 인원이 이 해일에 갇혀, 태풍을 맞이한 나무처럼 우수수 쓸려 나갔다.
마침내 파도가 잦아들었을 때.
파도가 들이친 자리로 기절한 이들만 무수히 널려 있을 뿐.
나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는 나타샤를 향해서.
“자, 다음은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요?”
뭐든 다 쓸어 줄 수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