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35화 (235/275)

제235화

웨일이라고 처음부터 눈치챈 건 아니었다.

아마 에키온은 정말로 기억을 잃었을 것이다.

그는 10여 년간 에키온과 칼립소를 보아 온 사람이었다.

에키온이 무감정한 눈으로 칼립소를 볼 수 있다니. 아니, 혼란스러운 눈으로 볼 수 있다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웨일 또한 에키온이 기억이 잃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점점 에키온의 태도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에키온의 눈이 다시 칼립소 하나만을 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분명 혼란만 가득했던 눈 위로 애정이 덧씌워졌다.

우습게도 오랜 시간 라이벌로서 보아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에키온의 기억이 돌아왔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변화가 있을 거라고.

칼립소마저 눈치채지 못한 걸 자신이 먼저 알았다.

비단 눈빛을 제외하더라도 웨일은 이따금 에키온에게서 영문 모를 친근함을 느꼈다.

정확히는 에키온의 힘이나, 권속인 투스를 보면서.

웨일이 자신의 힘을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은, 자신은. 흰수염고래는 용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웨일의 능력은 치유 능력.

정확하게는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대가를 치르고 치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연구할수록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웨일이 행하는 능력은 정확히는 대가를 치르고 몸 상태를 ‘상처가 있기 전’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웨일은 그것을 ‘시간 역행’이라 부르기로 했다.

치료에만 한정되기는 하나, 결국 시간과 관련된 힘이었다.

그래서 웨일은 자신이 에키온의 힘에서 정체불명의 친근감을 느낀 게 아닐까 했다.

이런 의미로 보자면.

기억을 잃었다고 했을 때 에키온의 힘은 요동치고 있었으며, 권속인 투스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투스가 보이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에키온의 힘은 신기할 만큼 안정적인 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마 세상에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해서 내 생각은 이런데. 넌 어때?”

웨일은 자신이 보고 느낀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추측한 자신의 생각을 모조리 말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에키온은 답이 없었다.

웨일은 에키온의 상태를 확신했다.

이와 별개로, 에키온이 모든 걸 부정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그럴 때는 칼립소에게…….

“흰수염고래가.”

에키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 흰수염고래가 오래전 초대 용을 모신 대가로 힘을 살짝 떼어 줬다던데, 사실이야?”

“……뭐?”

“그렇군. 그래서 알 수밖에 없다는 거구나.”

에키온의 대답은 웨일로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답이었다.

게다가 웨일에게 대답하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허공을 향해 대답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잠깐이지만 에키온이 미쳤나 싶기도 했다.

“뭐야, 잠깐만. 그럼 내 말이 맞다는 거지?”

“…….”

에키온의 침묵은 대부분 긍정을 뜻했다. 이번도 다르지 않았다.

웨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왜 부정도 안 하는 거야?”

“이미 확신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시치미도 떼지 않겠다? 그럴 거면 칼립소는 왜 속이는 건데?”

설마 했지만 진짜였다.

웨일은 자신의 가설에 자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희박한 확률로 틀릴 수도 있다고 여겼고, 이보다는 높은 확률로 에키온이 아니라고 잡아뗄 거라 생각했단 말이다……!

웨일은 공연히 힘이 빠지는 기분에 하, 한숨을 쉬면서 에키온 맞은편에 앉았다.

이 용 공작은 어릴 때도 그러했지만, 성장한 뒤에도 제 속을 뒤집는 재주가 환상적이었다.

게다가 칼립소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 묘하게 날카로워진 저 눈초리를 보라.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거면서 대체 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단 말인가?

웨일은 차근차근 정리해 보기로 했다.

“기억을 잃은 건 확실한 거야?”

“맞아.”

“그럼 잃었다가 돌아온 거고?”

“……맞아.”

에키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웨일은 재차 기가 막혔다.

그는 에키온이 기억을 잃은 뒤로 칼립소가 에키온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단 사실을 잘 알았다.

심지어 에키온이 없는 곳에서도 ‘용 공작’이라고 거론하는 걸 직접 듣기도 했다.

“그럼 지금은 내가 아는 에키온 그대로야?”

“아마도.”

에키온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귀찮은 게 옆에 붙었지만.”

그 귀찮은 게, 칼립소에게 들었던 ‘초대 용의 기억’인가 뭔가 한 거냐고 물어보니 맞단다.

그래서 자신도 몰랐던 흰수염고래 선조를 운운했던 건가?

들을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제 앞에 있는 남자가 정말 에키온이 맞나 싶기도 했다.

칼립소를 향한 집착은 세상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심한 주제에, 어째서 칼립소에게 이런 취급을 받고도 인내했단 말인가?

“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 거야?”

가장 중요한 질문이 흘러나오자, 억울할 정도로 순순히 대답하던 에키온이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허공 혹은 창문 쪽을 응시하더니, 이윽고 에키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갑자기 성장하면서, 과부하가 오는 바람에…… 기억을 잃었어.”

여기까진 웨일도 아는 사실이다. 기억을 잃은 이유는 지금 알게 됐지만.

“기억은 차차 돌아왔지만, 그리 달갑지 않은 사실도 함께였어.”

성장 전의 에키온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전과 다르게 긴 대화가 가능하단 점이었다.

“나는 언젠가 힘을 빼앗긴 적 있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때에.”

“네 힘을?”

그게 어쨌다는 건데? 웨일의 질문은 타당했다.

“중요하지. 내 힘을 빼앗아간 사람이 칼립소니까.”

웨일은 더욱 알 수 없었다. 칼립소가 빼앗았다고? 언제?

하지만 자신보다 먼저 에키온을 만났으니 그때 일어난 일이려니 싶었다.

중요한 건 에키온이 성장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됐다는 점이고.

“덕분에 나는 성장했음에도 여전히 불완전한 상황이야.”

어느 정도냐면, 권속인 투스가 아예 에키온의 힘에 스며들어 폭주하지 않도록 틀어막고 있을 정도라 했다.

“‧……그래서 칼립소가 힘을 빼앗아갔으니, 밉다는 거야? 그래서 말 안 하고 있던 거라고?”

“아니.”

에키온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웨일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에키온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어서였다.

이 힘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용은…… 독점욕이, 지나치게 강해.”

에키온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성장과 함께 알게 되었다.

불안전하다는 건 쉽게 폭주한다는 것.

용의 폭주는 그곳의 시간선을 ‘리셋’하는 것과 같다.

그러려면 먼저 멸망부터 해야 할 테고, 그 뒤에는 자신도 칼립소도 한 번 더 생을 반복할 것이다.

에키온은 느꼈다.

성장과 함께 용의 독점욕마저 갖춘 에키온은……. 칼립소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폭주한다.

더 심각한 건, 용의 본능이 칼립소에게 있는 소중한 존재들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독점욕과 집착을 통제하지 못하면.

칼립소의 소중한 존재들을 망가트릴 것이다.

그 뒤로는 칼립소의 미움을 받겠지. 당연한 수순으로 폭주하고 시간선이 반복될 것이다.

칼립소는 원하지 않는 결과였다.

왜냐면 칼립소는.

“이번 생의 꿈은 늙어 죽는 거야. 모든 수명을 다하고 말이야.”

기억이 돌아왔을 때, 에키온은 칼립소가 기억을 잃은 자신에게 실망하고 거리를 두었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칼립소는 자신을 버리지 못했다.

이를 보고서 에키온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박에 도전했다.

지금처럼 기억을 잃은 척 행세한다면.

칼립소가 자신에게 딱 적당한 정도의 관심만 가져줄 거란 생각.

그걸 자신이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

이 도박은 애석하게도 처절하게 실패했다.

에키온은 꾸역꾸역 올라오는 갈증을 삼켰지만 점차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으므로.

“……왜 칼립소한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어?”

“칼립소는, 뭐든…… 맞춰 주려고 할 테니까.”

실제로 칼립소는 에키온에게 맞춰 주고 뭐든 해 주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건 자신보다 미숙한 이에게 베푸는 배려임을 알았다.

동등해지고 싶어서 성장이 간절했다.

그때는 자신이 칼립소를 지켜 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용의 본능이 장애물이 될 줄은 몰랐다.

에키온은 사랑을 글로만 배웠다. 책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고 좋아하는 건, 그 사람이 싫어하는 짓을 하지 않고…… 인내하는 거라고 했어.”

용의 본능이 어떻단 말인가.

칼립소가 싫어하면 하지 말아야 했다.

“나는 참을 수 있어.”

“대체 언제까지?”

웨일은 이 이야기를 듣는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 칼립소여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칼립소에게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라이벌이었던 에키온이 저렇게 처참한 표정을 짓길 바랐던 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엔 넌 정말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거야.”

웨일은 한숨을 쉬고서 또박또박 말했다.

이 방에 와서 꼭 하고 싶었던 말을.

“이로 인해 칼립소를 빼앗기게 되어도…….”

고개를 숙였던 에키온이 천천히 들어 올렸다. 반짝이는 금안이 웨일을 담았다.

“넌 손 놓고만 있을 거야?”

에키온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 안에 자리한 건, 빛을 받아 번뜩이는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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