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화
하우저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사냥 직전과도 같은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음에도 레바이는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잠시 후, 레바이가 움직였다.
마침내 방을 나설 때가 되어서야 하우저는 레바이에게서 원하는 답을 들었다.
협력은 잠시뿐이다.
하우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 *
아콰시아델 내에서 웨일의 위치는 조금 오묘한 편이었다.
범고래가 있는 아콰시아델에 적을 둔 대부분의 고래들과 다르게 흰수염고래들은 오래전부터 소수로 방랑하는 수인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강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가문이 있다거나 귀족적인 업적을 이룬 바가 없었다.
힘이 전부인 세상답게 신분제의 압박이 덜한 편이었지만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웨일은 가문을 이루지 못한 평민이었으며, 그를 지지하는 같은 종의 수인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웨일은 치료 능력을 가졌다.
환경만 마련된다면 죽기 직전의 수인도 살려 낼 수 있는.
기적 같은 능력을 가진 수인 말이다.
그래서 범고래들마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전투가 잦은 이들일수록 부상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게다가 칼립소가 웨일의 능력과 재능을 적극 지지하며 아예 연구하라고 통 크게 건물 하나를 내어줄 정도이니.
웨일은 스스로도 자신의 위상이 올랐다고 느꼈다.
‘물론 내가 바란 건 이런 위상도 권력도 아니지만.’
비록 임시 가주라지만, 피에르가 가주 자리에 앉아 있을 때에도 대부분의 수인들은 칼립소를 신기해했고 존경했다.
고유 힘인 물의 힘 하나 없이, 막내임에도 제 오빠들을 모두 이겨 먹는 공녀.
그뿐 아니라 가주가 대대로 모두 여성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칼립소가 다음 가주가 되리라 확신했다.
그녀가 오큘라를 이긴 것을 모르는 이조차도 말이다.
웨일은 칼립소가 자신에게 주는 신뢰를 참으로 달콤하게 여겼지만.
한편으로 칼립소의 신뢰는 선을 그어 놓고 여기서 더는 넘어가지 말라는 경고를 내포하고 있었기에 아쉽기도 했다.
어렸을 적 추격에서 구해 준 어린 공녀님은 알면 알수록 커다란 비밀을 품은 사람이었다.
칼립소를 사랑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불가항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흉터가 남지 않는다는 거야?”
“네, 맞습니다.”
웨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칼립소와는 전혀 다른 생김새를 가진, 날카롭고 도도한 분위기를 가진 여성이 서 있었다.
리리벨이었다.
한때 칼립소와 함께 다음 대 후계자 후보에 이름을 올렸던 소녀였지만.
깔끔하게 패배를 받아들였으며 후에는 자신의 불치병을 고쳐 준 칼립소를 위해 제 부친마저 직접 바친 사람이었다.
“그래? 흉터가 남아도 상관없는데. 잘됐네. 고맙게 됐어.”
“아닙니다.”
리리벨은 막 치료가 된 어깨를 빙빙 돌렸다.
치료를 위해 흉터가 가득한 팔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지만 웨일과 리리벨 모두 어떠한 감흥도 없이 상처에만 집중했다.
“불편한 곳이 있으시면.”
“없어. 네 치료는 늘 그렇잖아.”
리리벨이 차갑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옷을 걸쳤다.
“혹시 내 엄마에 대해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헤일라 말씀이신가요.”
“맞아.”
리리벨이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이번에 거의 추적에 성공했거든. 앞으로 한 번만 더 쫓으면 잡게 될 거야.”
리리벨의 모친이었던 헤일라는 범상치 않은 범고래였다.
비록 방계 출신이었지만 지략가였으며 동시에 일신상의 체술도 뛰어났다.
게다가 반란을 통해서 물의 힘을 다룰 줄 알았다는 사실 또한 밝혀졌다.
아마 직계로 태어났다면 가히 후계 자리까지 노릴 수 있었을 터다.
그러나 후계로 밀던 자식을 잃고 가담한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녀는 저 멀리 도망갔고.
칼립소는 추적을 리리벨에게 명했다.
“긴 싸움이었군요.”
웨일은 평온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너와는 상관없는 싸움이다 이거지?”
“그럴 리가요. 칼립소에게 도움이 되는 싸움이기에 저도 정성껏 치료한 거 아닐까요.”
리리벨이 픽 웃었다.
“웃겨. 나한테는 이리도 정중하게 말하는 주제에 가주님에게는 마음껏 반말이라니.”
“…….”
리리벨은 칼립소를 진심으로 존경했지만, 가끔 어처구니없는 곳에서 무르다고 생각했다.
“하긴 너도 긴 싸움을 진행 중인가?”
옷을 모두 갖춰 입은 리리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아한 몸짓이었다.
본래 말투가 냉랭하고 냉소적인 편이었지만. 리리벨은 이 다정한 체하는 흰수염고래가 마음에 들었다.
“네 싸움은 어때? 그 짝사랑엔 차도가 있나?”
웨일이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제자리걸음이죠.”
“그래? 응원해. 어차피 가주님 곁에 반려가 있어야 한다면 네가 되면 좋겠거든.”
“…….”
“그 가주님이 다치는 건 사실 상상이 가지 않지만……. 도리어 다친다면 어마어마하게 크게 다칠 것 같아서 말이야.”
칼립소가 긴 잠에 빠진 일은 그녀의 가족뿐만 아니라 리리벨과 같은 수하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리리벨은 문득 낯선 얼굴들을 떠올렸다.
칼립소가 황무지에서 주워 온 하우저라는 놈 말이다.
하우저가 나타난 뒤로 칼립소는 어딘가 조금 이상해졌다.
해야 할 일은 안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간 못 보던 모습이 보이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유독 그 하우저란 남자 앞에서 그러했다.
“최근엔 우리 가주님 취향이 꽤나…… 독특하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정작 칼립소 자신은 자신의 태도 변화를 느끼지 못한 눈치였다.
“하우저라는 놈, 눈이 머리카락에 가려서 음침하게 느껴지던데, 그런 놈이 좋으신 건가?”
웨일은 리리벨이 어떤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오히려 웨일은 리리벨보다 더 예민하게 느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하우저가 나타난 뒤로, 칼립소의 태도는 하우저와 레바이,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좀 더 낯선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이처럼 칼립소 자신이 저도 모르게 내보이는 3회차 가주일 때 모습은 현 수하들에게 이질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뭐, 감정이라곤 쥐뿔도 없는 내가 하는 말은 아니지만.”
리리벨은 눈앞의 흰수염고래가 분명 적잖게 실망했으리라 생각하고 얇은 입술을 열었다.
“나는 그게 애정일지언정 사랑이라고 느끼진 않았는데. 넌 어때?”
칼립소는 하우저를 향해 애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리리벨이 느끼기에 그건 리리벨 자신이나 아게노르를 대할 때 보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만난 지 얼마 안 된 이를 향해서 친애를 드러내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적어도 가문에서 호들갑을 떠는, ‘가주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라는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무엇보다 나는 가주님이 너나 그 과묵한 용 공작이랑 있을 때…….”
리리벨이 여기까지 말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됐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거나 내게 투표권이 있는 일은 아니지만 말이야. 누군가 내게 의견을 묻는다면 난 네가 제일 괜찮다고 생각해.”
“그것참 감사한 일이네요.”
“그래, 그러니 가주님 좀 잘 꼬셔 봐. 나는 갑자기 나타난 놈을 가주님 반려로 모시기 싫으니까.”
리리벨이 잠시 문을 노려보았다.
“너도 그렇지 않아? 기껏 너나 그 용 공작이 십수 년을 함께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놈팡이가 홱 자리를 빼앗아가면.”
리리벨이 물줄기를 일으켜 문고리를 열었다.
“그보다 그 용 공작의 기억은 여전히 변함없나?”
웨일이 잠깐의 틈을 두었다가 대답했다.
“……네,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리리벨은 많은 사람의 손이 거치는 문고리 같은 것을 이렇게 열곤 했다.
“참 우스운 일이야. 네가 아니라면 용이 처음으로 범고래 가주의 반려가 되는 걸 보는가 싶었는데.”
“…….”
“간다.”
웨일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리리벨은 어디에도 없었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거야, 그녀 같은 범고래에게 숨 쉬는 일보다 쉬울 터.
웨일은 한참이나 문을 응시했다. 웨일의 눈동자가 심해처럼 어둡게 가라앉았지만.
신기하게도 어두워졌음에도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구석이 있었다.
곧 웨일 역시 문을 열고는 어디론가 향했다.
조금 뒤, 그가 도착한 곳은 용 공작이 거주하는 방이었다.
문을 열자 방주인은 다행히 자리에 있었다.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왔음에도 용 공작은 차분하고 과묵한 낯으로 웨일을 가만히 응시했다.
웨일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웨일의 표정은 이례적으로 심각했다. 얼핏 분노가 어려 있기도 했다.
“에키온. 나 말이야, 진심으로 궁금한데…….”
그러고는 그 상태로 툭, 폭탄을 떨어트렸다.
“언제까지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척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