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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233화 (233/275)

제233화

나는 이 모든 광경을 멍하니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에 너무 많은 정보가 주어졌다.

제아무리 나라도 처리가 버거울 정도의 정보가.

그리고 나의 충성스러운 수하이자, 가장 제멋대로였던 책사는.

내 모든 반응을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 한 줄기, 흘러넘친 눈물 흔적만 아니었다면 정말 기뻐서 웃는 것이라 착각할 뻔했던 웃음을 지은 채로.

“저희 약속은 모두 잊으셨습니까?”

흘러나오는 말에 그제야 얼음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눈을 들어 올렸다.

“……하.”

지금까지 치밀하게 속여 온 것에 화를 내야 할지.

네 사정을 알게 된 지금 애잔함과 안타까움을 느껴야 할지.

그럼에도 똑같은 말과 행동으로 속여먹는 게 어딨냐고 억울함을 토로해야 할지.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축하해. 지금 막 네가 가주가 된 이례로 최고의 난제가 되었으니까.”

“…….”

“뭐야, 너.”

“죄송합니다.”

레바이가 천천히 내 옷을 놓았다. 그러나 나는 놈이 순순히 물러나도록 두지 않았다.

“이제 지금 뭐 하자는 건데?”

“…….”

“그래서 지금까지 모두 속였던 거였습니다, 이러면. 내가 ‘장난도 작작 쳐라.’ 정도로 웃으며 넘어갈 줄 알았어?”

“하지만 가주님도 죽기 전에 절 속이셨잖아요.”

“…….”

“마지막까지 살아 주시겠다고 해 놓고.”

레바이는 내가 했듯이 멱살을 쥔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

“그래서 저도 속여 봤어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레바이의 몸이 밖으로 튕겨 나갔다.

볼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나는 주먹을 쥔 채로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참 오랜만에 맞는 거다. 그치?”

우리 책사님, 너만은 참 애지중지 여겼는데.

정확히는 네가 내 주먹을 오래 못 견딜 것을 알아 조심한 거지만.

“다른 새끼들 실컷 두들겨 맞을 때 너만 늘 무사했지.”

“덜 맞아서 이런 헛소릴 한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잘 아네.”

나는 노려보면서 대답하다가도 얼굴에 손을 얻은 채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나랑 뭐 어쩌고 싶은 건데.”

“…….”

레바이는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기는 했으나 빠르게 자세를 갖췄다.

“아무것도요.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기엔 아쉬워졌고,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마음먹었다면 죽을 때까지 나와 아틀란과 벨루스를 속여먹을 수 있었을 인간이었다.

“그저 이젠 더는 그냥 있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레바이가 그대로 돌아서서 걷는 순간이었다.

레바이의 신형이 휙 기울더니, 그대로 바닥에 쿵 쓰러졌다.

내가 만든 물줄기가 놈의 다리를 휙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나는 저벅저벅 걸어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주웠다.

“……가주님?”

그대로 허리만 숙여 레바이 손에 올려두었다.

“한 번쯤은 모든 걸 기억하는 네가 부르는 ‘가주님’ 소리를 듣고 싶긴 했는데.”

“…….”

“이렇게 들으니까 속 터진다, 야.”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손을 뻗어 레바이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너도 참 독해. 쉽지 않았을 텐데.”

“…….”

“넌 여기 있어라. 속 터진 내가 나가련다.”

그저 내가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혹은 얼마나 긴 시간을 인내한 것인지.

속상하다가도 뭐 이런 어리석은 놈이 있나 싶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바람은 놈이 아니라 내가 쐬어야 할 성싶었다.

문을 열고 나오니,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나오셨습니까.”

막 벽에 기대 있다 말고 등을 떼어낸 남자는 다름 아닌 하우저였다.

“……웨일이랑 같이 간 거 아니었냐?”

“아, 볼일은 모두 끝났습니다.”

하우저는 웨일 측에서 자신에게 면담을 요청한 거라며, 빠르게 보고했다.

이런 것까지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지.

“그래, 내게 뭐 할 말 있는 거냐? 아니, 아니. 있어도 정말 급한 게 아니면 나중에 해.”

“왜 그러십니까?”

“몰라, 속이 복잡하니까.”

“아, 드디어 들으신 모양이네요. 그놈이 토로했습니까?”

막 등을 돌리려던 나는 멈칫하다 말고 몸을 다시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어쩐지 돌고래 그놈이 지금쯤 모두 말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기억이 있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이건 또 뭐야.

‘하우저 이 새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고?’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건 뭐, 기억이 있는 놈끼리의 유대감이냐?”

“아…….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우저가 고개를 기울였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짙은 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까맣게 물드는 눈동자는 마치 계략을 잔뜩 꾸미는 악당처럼 짓궂은 무언가가 일렁거렸다.

“속인 놈이나, 알면서도 침묵한 네놈이나. 똑같아.”

“죄송합니다. 가주님께서도 눈치를 어느 정도 채고 계신 줄 알았어요.”

낌새는 알았지.

그 낌새마저도 저 레바이가 일부러 드러낸 틈이었겠지만.

“됐어. 며칠만 지나면 아무렇지 않아지겠지. 어쨌거나 너도 홀로 기억하느니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을 테니까.”

나는 나 혼자서만 모든 것을 기억하던 나날들을 떠올리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당황했을 뿐이다.

“간다.”

하우저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정중하게 숙일 뿐이었다.

* * *

“글쎄요…….”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우저가 작게 중얼거렸다.

마침내 칼립소가 복도 끝 모퉁이를 돌 무렵, 하우저는 제게도 겨우 들릴 법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저는 선택하라면 저 혼자만 기억하는 쪽을 택할 건데…….”

그래야.

가주님을 홀로 독차지할 것 아닙니까?

차마 꺼내지 못한 마음을 느릿하게 삼키며 하우저는 여유롭게 몸을 돌렸다.

칼립소의 집무실로 들어가면, 태연하게 서 있는 레바이가 보였다.

놀랍게도 떨어진 서류를 주워 정리 중인 레바이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하우저가 쯧, 혀를 찼다.

가주님도 참, 이 돌고래 새끼를 모르시지.

칼립소는 아마 레바이를 꽤나 섬세한 놈으로 생각하는 듯하지만.

하우저가 보기에 이놈은 칼립소의 그런 무른 면마저 철저하게 제 편할 대로 써먹는 계략적인 인간이었다.

“뭐야.”

레바이가 보지도 않고 물었다.

신체 능력이 좋지도 않은 놈이 어째 보지도 않고 자신인 줄 알았나 싶었다.

예나 지금이나 희한한 새끼였다.

“지금쯤이면 한 대 맞고 엉엉 울 것 같아서. 놀리러 왔는데?”

“애석하게 됐네. 아무렇지 않아서.”

건조한 대화가 오갔다.

“쓸데없는 소릴 하려고 네가 가주님과 떨어져서 날 찾아온 건 아니겠고. 뭐지?”

서류를 내려놓은 레바이가 안경을 고쳐 썼다.

살짝 금이 간 안경이라거나.

붓기 시작한 뺨으로 충분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법했다.

아니, 예상 그대로라 할 수 있었다.

“아니, 이제야 말했나 싶어서. 예상하긴 했지만 신기하네.”

“굳이 비꼬러 올 만큼 한가해서 참 좋겠군. 난 바빠서.”

레바이는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여기서 더 날 자극하면 널 가주님과 제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배치하는 건 일도 아닌데.”

“…….”

“이전 생에서처럼?”

하우저가 웃었다. 음침한 미소 속에 분노가 슬쩍 섞였다.

“넌 늘 입만 살았지. 돌고래.”

“덤비는 거라면 충분히 받아 주겠단 소리지. 지능이 모자란 네가 알아듣기 쉽게 말하고 있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레바이는 안경을 추어올리며 싱긋 웃었다. 냉랭한 비웃음이었다.

“원래 그런 놈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면. 그 사실에 무서워해야 하는 거야.”

레바이가 제 머리를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다른 게 있단 소리니까.”

역시 돌고래놈은 입만 산 새끼였지만.

한편으로 제 능력은 입담이 다가 아니란 걸 스스로 증명했다. 그 점이 대단했다.

“삐딱하게 나오지 말고 들어 봐.”

하우저는 눈을 뜨고 그간 칼립소 뒤를 쫓으며 느꼈다.

시간이 흘렀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하우저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칼립소 옆에 있을 때만큼 크게 느낀 적은 없었다.

칼립소 주변에 새로운 사람들이 가득하다.

자신과 자신들의 동료가 아니라.

그럼에도 칼립소는 자신을 보며 흔들렸다. 정확히는 향수를 느끼는 듯 흔들리는 얼굴을 보았다.

“손이나 잡을래?”

레바이가 서류를 든 채 하우저를 응시했다.

칼립소의 주변에 매력적인 수컷이 있다. 아니, 너무 많다.

심지어 칼립소의 시선을 앗아갈 정도의 이마저 존재했다.

그러니 레바이가 이전 생을 기억한다는 사실은 이 순간 하우저에게 득이 되어 버렸다.

“지난 생처럼.”

“…….”

“너와 내가 각기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때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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