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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232화 (232/275)

제232화

나는 속으로 선뜩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우선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은 채 눈을 평온하게 깜빡였다.

막 느낀 기시감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방금 레바이의 말은 하우저를 잘 아는 것 같기도, 한편으론 추측하여 내뱉은 말 같기도 했다.

아직 단언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마치 하우저를 잘 아는 듯한 말이네?”

입이 열리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일상 대화를 하듯이.

“예, 잘 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꾸만 내 감각을 긁는다.

“아, 물론 저쪽에서는 저를 오래 알고 지낸 것처럼 말을 하긴 하더군요.”

레바이는 이렇게 말하더니 제 손에 들린 서류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명령하셨던 3차 약재들의 구입은…….”

그 후로 한동안 레바이의 나긋한 목소리만이 집무실을 울렸다.

나는 태연자약하게 대답하면서도 예민하게 레바이의 낯을 살폈다.

내게서 은밀하게 흘러나온 물의 힘이 우리 사이에 아주 얇은 막을 쳤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는 막이었다.

레바이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어느새 마지막 서류를 응시하고 있었다.

“황무지에 순찰을 보낼 병사들의 순번도 순조롭게 정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느긋하게 대답하자, 레바이가 서류에서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물었다.

“무엇이 궁금하셔서 저를 그렇게 빤히 보십니까?”

“느껴졌어?”

“싸움도 못 하고 10초 만에 누울 몸이지만 눈치는 빨라서 말입니다.”

“뒤끝은.”

“뒤끝 아닙니다.”

“잘생겨서 봤어.”

레바이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 잘생겼잖아? 하녀 애들이 너만 지나가면 뒤에서 꺅꺅하던데.”

“이곳 하녀들은 강한 수인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공자님들이라거나.”

“강함의 기준은 다양하잖아? 권력도 강자가 가지는 특권 중 하나니까.”

레바이가 작게 웃었다.

찬웃음에 가까웠다.

“제게 누군가 탐낼 정도의 권력이 있는 줄은 몰랐군요.”

3회차에서도 하녀들이 레바이가 지나가면 놈의 뒤에서 꺅꺅대곤 했다.

수하놈들 중에 미남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유독 저놈은 수요가 컸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면 지금은 용 공작도 있고 웨일도 있어서 좀 분산된 느낌이지…….’

서로 다른 느낌으로 잘생긴 미남들.

특히나 용 공작을 떠올린 순간, 우연인지 레바이에게서도 그 이름이 들려 왔다.

“외양을 따지자면 용 공작과 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을 듯합니다만.”

“아, 그러려나.”

“예, 이제는 기밀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지만, 지금도 그가 여기 있단 사실을 숨겨야 했다면 그 외양 때문에라도 애를 먹었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럴 만했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미남.

게다가 정체 모를 미남의 이야기는 아무리 숨겨도 새어 나갈 수 있었을 테니.

“관심 가십니까?”

생각에 잠긴 사이, 아주 고요하게 터져 나온 이야기였다.

흘끗 레바이 쪽을 응시하면 그는 다시 서류 쪽으로 시선을 둔 채였다.

“뭐……. 나도 잘생긴 거 좋아해.”

“그렇군요. 취향이십니까?”

궁금해서 묻는다기보다는,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해 묻는 것에 가까운 말투였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엔 나는 놈을 오래 보아 왔다.

이놈은 죄인의 심문 또한 이렇게 시작하는 놈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취향이긴 하지.”

서류에 눈을 두어도 글자가 딱히 들어오진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급한 건은 없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까.

“…….”

“내가 볼 서류는 이게 끝이야?”

비유하자면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예, 없습니다. 일단은. 그리고…….”

“응.”

“좋아하십니까?”

나긋하게 터져 나온 목소리엔 감흥 없는 차가움이 함께 어려 있었다.

그래서 호기심에 물어본 건지, 혹은 대화의 관성으로 나온 질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은 왜 하는데?”

“…….”

“왜, 네가 나 좋아해?”

내가 기억하는 내 책사는 거짓말에도, 표정을 숨기는 데도 능했다.

“존경합니다. 그리고…… 가주님이신데, 어찌 최측근으로서 후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난 널 보좌관이자 책사로 둔 거지 비서로 들인 게 아닌데.”

나는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맞아, 좋아해.”

나는 앞으로 내 생의 유일한 이해가 될지도 모를 그 애를 좋아했다.

그 애가 성장했다면…….

기억을 잃는 일이 없었다면. 이 마음이 또 다른 마음으로 진화하고 커졌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기억을 잃은 그 남자를 미워하는지도 모르겠다.

긴 시간을 앓아 온 우울감, 외로움. 억울함.

회귀자를 진정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용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기억을 잃어서 아쉬워. 더는 내가 아는 그 사람 같지 않거든.”

“……그렇군요.”

레바이는 가볍게 끄덕였다.

안경을 낀 날카로운 눈매에는 전혀 동요 따윈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와 같은 예리함이 공기처럼 어려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줄을 놓아 버렸다.

줄다리기에서 줄을 놓아 버리는 건 더는 이 게임을 이어 가지 않겠다는 의사이기도 했다.

보여 줄 생각이 없다면 더는 떠볼 생각은 없었다.

“그래. 더 급한 일 없으면 나가 봐. 바다사자들에게 보낼 서신은 시녀를 통해서 보낼게.”

“…….”

레바이가 자신이 챙겨 갈 서류를 품에 안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걸음이 멀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저벅저벅 가까워진다.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앞으로 후두둑 서류가 떨어졌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내 시야 안으로 심통이 난 얼굴이 반사되었다.

“약조하셨습니다.”

“……어?”

“제게는, 기다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습니까?”

내 입이 살짝 벌어졌다.

갑작스럽게 들려 온 말이었지만 이미 머리가 먼저 무슨 소리인지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잠, 잠깐만?

“레바이. 잠시, 지금.”

“모든 것이 끝나면 같이 살자고 하셨지요.”

“잠깐만……!”

“그때는 저를 평생 책임지겠다고 하셨습니다.”

가주의 멱살을 쥐는 책사가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우습게도 3회차 너무나 혼란스러운 그 시기에 유일하게 이것이 가능한 사람이 있었다.

“당신이 후회할 선택을 하겠다면 팔을 희생해서라도 그 선택을 막는 게 제 역할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살아남을 생각만 하십시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이 주먹으로 때려서라도 충언을 하겠다던 돌고래 책사.

“……뭐야, 너.”

그때의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계속 낌새는 있어 왔다.

레바이는 치밀한 놈이다.

내가 느낀 실마리는 사실 이놈이 알아달라고 내보낸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떠볼 때마다 시치미를 떼니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앞에서 안경 낀 남자의 미려한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분노인지, 회한인지. 슬픔인지 억울함인지 모를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가더니.

웃음으로 맺어졌다.

“언제부터?”

“…….”

“처음부터입니다, 존경하는 가주님.”

“……뭐?”

나는 내 멱살을 쥔 레바이의 손목을 꽉 눌러 쥐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텐데도 레바이는 나를 놓지 않았다.

“거짓말, 너는 그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기억하십니까, 저희가 한때 교육기관의 시험관이 되어 함께 문제를 만들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사소한 대화였다.

하지만 뇌가 빠르게 돌아가는 이 순간엔 놈이 말하는 대화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전체 문제에서 철저하고 완벽한 오답을 만들 수 있는 자는.”

“……사실 모든 정답을 아는 자일 것이다.”

놈은 처음부터 기억하면서도 아주 긴 시간을, 정말 오랜 시간을 침묵해 왔음을 시인했다.

하지만 대체 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나? 그럴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당신을 본 순간 떠오르더군요. 모든 기억이.”

나는 입을 뻐금거렸다.

“한편으로 궁금했습니다.”

“무엇이?”

“제가 철저하게 지난 생과 똑같이 군다면.”

“…….”

“그렇게 구는데, 기억만 없는 상태라면.”

레바이의 얼굴이 울 듯이 찌푸려졌다.

“당신께서 과연 그 말을 또 해 주실까 싶어서요.”

안경이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놈도 나도 잡을 수 없었다.

“……한 번 더 사는 생, 저도 이 정도는 바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게는 늘 냉정하고 단단하며, 비록 육체가 가장 강건하지 않아도 항상 정신력 하나만큼은 감탄스러울 만큼 튼튼하던.

내 책사였다.

“당신이 직접 해 주실 한마디를 이토록 오래 기다려 왔다면.”

미련한 일은 시작도 하지 않는다던 남자가 울 듯이 웃고 있었다.

이를 악문 미소 사이로 눈물 한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를 바보 같다고 욕하시겠습니까? 존경하고.”

“…….”

“사랑하는 제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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