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하, 찝찝하네.’
아침, 눈을 뜨자마자 불쾌감을 느꼈다.
‘뭔 꿈을…….’
요란스러운 꿈을 꿨다.
에키온과 시간의 틈에 함께 있던 때의 꿈을.
그 당시의 꿈은 눈을 뜨면 더는 내가 알던 에키온이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기에.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 뿐이었다.
드라마에선 연인이 기억상실에 걸린다고 한들 변함없이 헌신적이고 애정을 추구하던데.
연인은 아니었지만, 내가 그 애에게 품은 애정은 진실했건만.
왜 나는 기억을 잃은 그 애가 어딘지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황태자에게서 보호하겠답시고 재우는 내 모습을 봐서는 끼고도는 건가 싶기도 한데.’
문제는 지금 느끼는 불쾌감 아래 찝찝함이 존재한다는 거고.
그것은 곧 무언가를 잊어버렸다는 기분과 이어졌다.
에키온과 시간의 틈에서 있었던 일을 보다가, 꿈 끝에서 어떤 다른 것을 본 것 같은데.
이게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뜨면 꿈이 기억이 안 나는 일이야 실로 흔하고 당연한 일임에도.
‘으으…….’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기분은 오전에 집무실에 앉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빠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이틀 내로는 돌아올 것 같다는 서신이 날아들었다.
당장 아빠가 필요한 일은 없었기에 편안히 돌아오시라고 했다.
엄마랑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몰라도.
철석같이 죽었다고 믿을 정도의 일이었을 텐데, 며칠 만에 해결이 되겠나 싶어서.
꿈이 아니라도 신경 써야 할 문제는 산재했다.
전쟁을 결심했지만 무턱대고 일으킬 수도 없었을뿐더러.
황태자 새끼가 초대장이란 함정을 던진 이상 여기에 대응할 것도 충분히 준비해 두어야 했다.
물론 완벽할 테지만.
“함정엔 함정으로 응수하면 될 일이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후우, 이 감각 오랜만이네.’
나는 집무실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콰시아델 가주 집무실은 주인의 성향에 따라 재구성되곤 했다.
아빠가 임시 가주가 되었을 때 내 취향대로 꾸미라고 내어주었으므로.
내 경우엔 아빠가 쓰던 집무실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결국엔 내 취향으로 범벅된 공간이었다.
신나게 꾸며 놓고, 정신을 차려 보니 3회차와 똑같은 방이 만들어졌다.
요즘 들어 더욱 내가 3회차에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헷갈리는 기분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필 옆에서 우뚝 서 있는 보좌 겸 책사가 레바이 저놈이다 보니 더 그랬다.
곧 문이 열리고 웨일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런 감상이 쭉 이어졌을 터다.
어째서인지 웨일은 하우저와 함께였다. 어색한 조합에 신기함이 먼저 들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마주했을 땐 웨일이 묘하게 하우저를 경계한다고 느꼈는데.
‘치료하면서 정이라도 들었나?’
하우저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고, 웨일도 마찬가지로 인사했다.
“가주님.”
나는 웨일을 보며 살짝 웃었다.
“네 입에서 깍듯한 소리가 나오니 어색한데?”
“그럼 예전처럼 할까?”
“나쁘지 않지.”
웨일이 나와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앉아서 올려다보려니 더 커다랗게 느껴지는 몸이었다.
웨일은 유일한 치료 특기를 가진 수인인 데다가, 스스로 자신의 특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며 연구에 돌입한 탓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편이었다.
게다가 나와 하는 일이 계속 엇갈리던 상황이라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 자리에 있다 보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기 마련이거든.”
“…….”
그러자 웨일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이내 다정한 웃음을 보였다.
“그렇구나. 그런데 마치 가주를 해 본 듯한 말이야. 하하.”
“그런가?”
웃는 것치고는 꽤나 날카로운 말이라 잠시 멈칫했다. 어디까지나 속으로만 말이다.
바로 옆에 레바이가 있던 탓에 절로 시선이 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뭐……. 세 살 때부터 바라 왔으니 꿈에선 여러 번 하지 않았겠어?”
“그렇구나.”
웨일은 그저 농처럼 건넨 말이었던 듯 느릿하게 이어 말했다.
“일각고래들이 만들어 준 물건의 성능이 꽤 좋아.”
“그래?”
수중 동물 수인 중에 공간을 다룰 수 있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타인의 특기를 일시적으로 자신에게나 제삼자에게 옮겨 줄 수 있는 수인이 있는데.
여기에 발명의 재능을 가진 일각고래들의 특기까지 합쳐졌을 때 꽤나 신기한 조합이 만들어졌다.
쉽게 설명하면, 바로 웨일의 치료에 필요한 재료를 원할 때 바로 꺼낼 수 있는 주머니였다.
그 주머니는 온갖 재료를 망라한 아콰시아델의 약초 및 재료 창고와 이어졌고.
웨일의 치료는 한결 더 편해졌다.
“덕분에 시험 삼아 해 봤을 때 치료하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올랐어.”
“그래?”
3회차 전쟁에서 제때 치료받지 못해 수없이 죽어 가던 이들을 떠올리면 아주 좋은 일이었다.
전쟁이 있든 없든. 그 어떤 세상에서든 유용한 능력이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네 노력 덕분이겠지.”
“아니야. 소라게 수인들이나 일각고래들, 모두 힘을 합쳐 만들어 낸 결과인걸.”
“겸손할 필요는 없는데. 내 측근은 좀 더 잘난 듯이 굴어도 좋아.”
웨일이 내 말을 가만히 듣더니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확실히, 갑자기 전력이었던 레바이 형이 빠졌음에도 정말 잘 마무리한 편이긴 하지?”
음? 잘난 척 좀 해 보라고 했더니……. 어째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너 그렇게 가족을 저격해도 되니?
웨일과 레바이가 친형제는 아니어도 이와 비슷한 관계임을 너무 잘 알다 보니 아리송해졌다.
말에 뼈가 있었으니까.
“빠져도 잘할 걸 알고서 빠진 거지.”
“더 중요한 게 있어서 나 몰라라 한 건 아니고?”
“자자, 형제 싸움은 나가서 해. 우리 가문엔 좋은 연무장 많다.”
“하하하, 칼립소. 그럼 형은 10초도 못 버티고 누워있을걸?”
“돌고래놈에게 10초씩이나 주다니, 치료사 네놈은 너그러운 편이군.”
“…….”
침묵하던 하우저가 한마디를 붙였다.
“다들 머리로 싸우는 사람한테 좀 더 존중을 보였으면 해. 레바이가 최전선에 나갈 일은 없잖아? 저 얇은 팔목을 봐.”
“……가주님의 말씀이 가장 직설적인 것 같습니다만.”
“나는 걱정해서 하는 말이고.”
내 장난스러운 표정을 본 건지.
레바이는 먹이를 주지 않겠다는 듯 태연하게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가주님 바로 말씀드리려 했습니다만. 바다사자들에게서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아, 벌써?”
휘말리지 않아야지 하면서도, 놈에게서 나온 말은 결코 넘길 수 없는 단어였다.
바다사자.
수중 동물 수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이 아콰시아델이 있는 땅 근처에만 몰려 사는 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바다사자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영지를 설명하기 위해선 잠시 우리가 있는 세계의 제국에 대해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제국은 크게는 북쪽에 육지 동물 수인들이, 남쪽에는 수중 동물 수인들이 거주한다.
황실이 있는 수도가 북단에 있다고는 하나, 최북단은 아니었다.
수도 뒤쪽과 바다(북해) 사이에도 자그마한 땅이 존재했으며.
바로 이곳에 바다사자들이 살았다.
“그래서 반응은 어때?”
“처음엔 미적지근했습니다만…….”
3회차에서 거의 모든 수중 동물 수인을 포섭했지만 바다사자는 실패했다.
애초에 저들이 수도 뒤편, 최북단에 사는 탓에 연이 닿기도 어려웠을뿐더러.
전쟁 도중에야 쟤네가 저기 산다는 걸 알았을 정도로 저들은 폐쇄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다르지.
“가주님께서 새로 보내신 편지를 보고서는 마음을 달리 한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을 쓰신 겁니까?”
“걔들이 혹할 만한 내용?”
“그러고 보니 문어 수인들 쪽에서도 한번 뵙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아, 그건 제가 추진한 겁니다.”
하우저가 반쯤 손을 들며 느릿하게 말했다.
문어라, 확실히 연이 깊은 이들이었다.
이렇게 3회차에서 함께했던 수하 중에서 굳이 찾아가지 않았던 놈들도 하나둘씩 보게 되는 걸까.
묘한 감상에 사로잡힌 사이, 웨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럼 보고는 끝났으니 돌아가 볼게. 점검할 게 남아서.”
“아, 응.”
“칼립소, 다음엔 내 방으로 한번 와 줄래? 보여 줄 게 있어서.”
“어? 알았어. 오후에 한번 갈게.”
웨일은 끄덕이고는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
두 사람 사이에 미리 이야기된 것인지 하우저도 자연스럽게 함께 나갔다.
뭘까. 하우저가 남에게 자연스럽게 옆을 내줄 인간이 아닌데?
“하우저가 어째 웨일과 좀 친해진 것 같은데?”
문이 닫히고 이렇게 묻자, 레바이가 평온하게 대답했다.
“필요성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구는 것이지 않을까요? 그 누구와도 맞바꿀 수 없는 치료사니까요.”
뭐, 그건 그렇지.
여기까지 이야기하다 말고 나는 멈칫했다.
보려 했던 서류도 그대로 내려두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라.
방금 분명.
하우저를 잘 아는 것처럼 말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