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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228화 (228/275)

제228화

말하는 중에도 내 눈은 시저의 머리카락에 고정되어 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이다. 직계손들처럼 새하얀 브릿지가 보인다.

기억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누가 봐도 범고래 수인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상어들을 이끈다고 하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시저는 웃었다. 이 또한 익숙한 웃음이었다.

어찌 보면 무수히 많이 이 질문을 들어 왔다는 듯, 조금 곤란한 표정이었다.

곧 시저가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난 혼혈이란다.”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이 움찔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소리였다.

뭐……?

“그래서 가문의 수치였지, 나는.”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상어와 범고래의, 혼혈이라고…… 한 건가요?”

“그렇단다.”

담담한 인정에 허리를 바로 세웠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첫째놈은 알고 있었나?’

아니, 알았다면 분명 공유해 줬을 터였다. 확신하는데, 벨루스도 몰랐던 거다.

“당신, 내 모친이죠?”

“…….”

저쪽에서 나를 모를 리는 없고.

가식은 집어치우기로 했다.

“당신이 정말 상어와 혼혈이라면 대체 아빠와 어떻게 결혼했던 거죠?”

어떠한 악의 하나 없는 순수한 의문이었다. 아빠가 병이 있었다고는 하나 직계손이었다.

그 할머니가 가만히 두고 볼 인간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니?”

시저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보다시피. 생긴 것에 차이가 없어서 말이다.”

시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었다. 보란 듯이.

“직계손과 혼인에 눈이 먼 가문이 이 사실을 감쪽같이 속인 채 날 보냈단다.”

“…….”

“생각해 보면 나 말고도 후보가 꽤 있었던 걸로 아는데…….”

시저가 고개를 돌려 창문을 한참 응시했다.

“네 아빠가 날 선택한 거야.”

“…….”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시저의 의상은 내 기억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늘 낡은 옷을 입고 있던 기억 속 모습과는 다르게 조금 더 좋은 옷을 걸치고 있다.

하지만 목에 묶은 손수건만큼은 기억하는 것과 같았다.

시저는 손수건을 풀어냈다.

손수건 아래 드러난 모습에 나는 가만히 숨을 삼켰다.

“여기, 이것만이 내가 혼혈이라는 증거이지.”

상어 수인들의 대표적인 특징.

목에 연한 문신 같은 아가미의 흔적이 뚜렷했다.

일반 상어 수인의 것보다는 흐린 편이지만, 알아보기 어렵지 않을 정도였다.

‘잠시만, 상어 혼혈인데 물의 힘도 사용해?’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사기캐네.’

허어, 어쩐지 나를 가르치는 내내 늘 목에 손수건을 두르고 있더라.

헤어질 때까지 푸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지.

“장점이란 장점은 다 가졌네요. 부럽게.”

시저가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감상은 그것뿐이니?”

“그럼 또 무슨 말을 해요?”

“흐음, 왜 널 버리고 갔느냐는 말이라거나.”

“아, 평생 죽은 줄 알고 살아서 그런가. 살아 있다고 들으니 반갑던데요?”

내가 처음에 아빠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모친에게도 기대가 없었다.

“어차피 이제 와 엄마 노릇 할 거 아니잖아요? 뭐, 정체를 밝히니 이해는 가네요.”

“…….”

나는 이 상황을 단조롭게 말했다.

“당신에겐 범고래보다 상어들이 중요했던 거잖아요?”

남편과 아들. 갓 낳은 딸을 두고 떠나 버릴 정도로.

“…….”

상어들의 또 다른 수장이라는 자는 말이 없었다. 침묵은 때때로 긍정을 내포한다.

“정리하자면 상어들 중에서 꼴 보기 싫은 놈들은 정리됐고, 남은 놈들은 알아서 평화롭게 통합하여 잘 살겠다. 이건가요?”

사무적으로 돌아간 내 모습에 시저가 눈길을 주는 게 느껴졌다.

“맞아. 그놈들이 사라졌으니, 우린 우리끼리 모여 살 생각이야. 다신 범고래들을 건드리지 않을 예정이고.”

“결국 당신들 입장에서 꼴 보기 싫은 놈들을 우리를 이용해서 없앤 거네?”

내 말이 짧아졌지만 시저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조금 시원하게 웃을 뿐.

“맞아.”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넨 세잖아?”

“…….”

“우린 부상자와 장애가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라. 이젠 이들을 지키기 바쁠 예정이야.”

상어들 중에서 나쁜 짓을 일삼은 자들은 이제 사라졌지만.

남은 자들은, 이미 죽은 나쁜 상어들이 쌓은 악명과 평생 싸워야 한다.

그리고 표현을 이용한다라고 하긴 했지만.

내게도 셰크가 이끄는 상어 레지스탕스 정리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수확도 상당했다.

상어가 황실이랑 손을 잡은 데다가. 그놈이 이 땅까지 직접 올 정도로 몸이 달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절대 내가 손해 본 일이 아니었다.

“바라는 건?”

“그저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뿐이지.”

확실히 담뱃대를 손에 쥔 시저는 평안해 보였다.

기억하는 모습 속, 허무함을 짐처럼 짊어졌던 사람과 달라 보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삶에서 느꼈던 당신의 허무함은 혹시.

“만약 지금 당신을 따르는 상어를 모두 잃었다면, 어땠을 것 같아?”

“응?”

“허무했을까?”

시저는 조금 골몰히 생각해 보더니 그렇지 않겠느냐 말했다.

“그래.”

아마도 이전 삶에선 셰크놈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따르던 이를 모두 잃었던 게 아닐까 가만히 짐작해 보았다.

지금 생각해 봐야 소용없는 이야기였다.

“우리도 황무지에서 더는 약한 수인들을 괴롭히지 않을 거라면 볼일 없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

“아, 그럼 말이야. 칼립소라고 했나?”

시저가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협약이 끝난 거라면 잠시 개인적인 이야길 꺼내도 되려나?”

“무슨 이야기?”

“만나서 반갑다고.”

“…….”

나는 시저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는 느긋하고 조금은 능글맞게 웃었다. 가냘픈 얼굴과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묘하게도 조화로웠다.

“네가 이미 날 알고 있을 줄은 몰랐어. 딸.”

“…….”

“날 보고서 무슨 생각을 한 거니?”

무슨 생각이라.

“난 할머니 복도 없는데, 엄마 복도 없구나 하는 생각?”

“…….”

시저가 고개 숙여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웃지? 농담 아닌데.

“대신 오빠 복과 아빠 복은 있었다고 봐.”

이번 생엔 말이지.

“난 말했듯, 당신에게 아무런 유감없어요. 오히려 살아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고 할까.”

“……그건 놀랍네.”

“범고래를 싫어하나요?”

“그랬던 것 같구나.”

그래, 당신은 싫어했다.

“난 범고래가 싫어. 세상에 어떻게 강자만이 존재할 수 있니?”

“스승님도 약자인 나를 핍박하고 있는데?”

“이건 훈련이고, 예쁜아.”

약육강식을 외치는 범고래들에게 환멸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뛰쳐나간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아빠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말이야.’

“당신이 있었을 때는 어땠는지 몰라도, 범고래들은 달라질 거예요.”

나는 목 뒤를 문질렀다. 애석하게도 눈물의 모녀 상봉 같은 건 없었다.

나는 이미 충분히 사랑받았다.

“혼혈이란 건, 당신의 반쪽은 범고래라는 소리잖아요? 그러니 언젠가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쪽으로 와요.”

“……미안하지만 날 따르는 상어들을 버릴 생각은 없단다.”

“누가 버리래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누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좀 더 가까워지고야 시저도 같은 기척을 느낀 듯 문을 향했다.

“당신을 애타게 그리워하던 사람이 있으니 하는 말이죠.”

나는 시저를 빤히 응시했다.

스승님.

내 인생 첫 스승을 향해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알아보지 못해서 참 아쉽네요.

꼭 이곳의 엄마를 한번 만나 보고 싶었거든요.

감사했어요.

당신의 가르침 덕분에 난 가주가 되었다고. 꼭 한 번은 다시 보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결국 하나의 생을 돌아 만나게 되었네요.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그곳에는 땀으로 젖은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희귀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나는 작게 휘파람 불었다.

“이야…… 유령이라도 보신 모습이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과거의 연은 연이 있는 분끼리 잘 이야기 나눠 보시길.”

한쪽은 죽은 사람을 다시 본 것처럼 안색이 파리했고.

다른 한쪽은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듯 다리를 움찔움찔 떨고 있었다.

‘뭐지, 보고 있으면 한편의 기나긴 서사시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인데.’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얌전히 자리를 비웠다.

물의 힘을 살짝 써서, 막 도망가려던 ‘엄마’의 다리를 붙잡아 소파에 앉힌 건…….

미안하지만 의도한 바였다.

이 정도 심술은 용서해 주시기예요, 스승님?

아니.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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