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7화
“어허, 일어나거라. 꼬맹아.”
“젠장, 누가 꼬맹이에요?”
나는 씩씩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귀 두 번. 인생 3회차.
머리에 든 건 많은데 몸은 따라 주질 않았다.
당연하다. 나는 세 번째 삶에서야 겨우 물의 힘을 각성한 애송이였으니까.
게다가 눈앞의 여자는 한눈에 봐도 물의 힘 사용이 너무나 능숙해 보였다.
‘생각할수록 궁금하네. 누구지, 이 여잔?’
홀로 물의 힘을 수련하던 중 홀연히 나타나서는 몇 번 지도해 주더니.
아예 홀랑 눌러앉아서 스승이 되어 버렸다.
죽어도 스승이라 부르지 않으려 고집을 부린 지 한 달 만에 나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아무리 봐도 직계손은 아닌데.’
회색 머리다. 범고래 방계들의 상징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회색 머리 위로 하얀 가닥이 살짝 보인다.
드물지만 방계 중에서도 저런 흰 브릿지를 가진 사람이 있다곤 들었지만.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매우 강하고, 잘 가르친다.
그러면 됐지, 뭐.
목에 손수건을 두른 스승, 시저는 정말이지 더럽게 나를 굴렸다.
내가 구르고 굴러 강해질 때까지.
“이제 어디로 가니?”
그녀는 늘 말투가 오락가락했다.
뒷골목 저급한 깡패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걸쭉한 말투를 쓸 땐 언제고.
평상시에는 우아한 말씨를 썼다. 누가 보면 평생 고아하게 살아온 아가씨로 봐도 무방할 말투였다.
한 손에 담뱃대를 들고 헐렁한 옷차림에 삐딱한 자세가 아니었다면, 누구든 손쉽게 속을 것이다.
미인이었고, 가냘픈 얼굴이었으니까.
“어디로 가긴, 가문으로 돌아가야지.”
“그러니?”
“스승님은 이제 어디로 갈 건데?”
그리고 미인의 얼굴에는 큰 흉터가 있었다. 안 그래도 악에 차 독기만 남은 3회차 내 성격.
구르고 굴러 더욱 거칠어진 성격으로도 섣불리 물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 글쎄.”
나를 바라보던 스승님이 생긋 웃었다. 흉터만 없다면 곱게 자란 아가씨처럼 보였다.
나이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꽤 먹었다고 들었다.
“나는 갈 곳이 없네.”
“……왜?”
“모든 걸 잃었거든.”
“…….”
웃고 있지만 무겁게 들려 오는 말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허무해.”
“…….”
“그래도 생을 돌아보다 보니까. 딱 하나 미련이 남는 게 있지 뭐야?”
다정한 말씨였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나와 헤어지면 어떤 삶을 살지 가늠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시저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안녕, 내 마지막 미련.”
이렇게 말했지만 크게 가슴에 두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있어, 그런 게.”
사실 이때의 나는 오로지 돌아가 가주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으므로.
이런 말에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넌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 남들 10년 걸쳐 배울 걸 3년 만에 배웠지.”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 시저는 늘 웃었다. 마지막에도 웃었다. 미련 없는 미소였다.
“하고 싶은 걸 이뤄.”
“스승님은 어떻게 살 건데?”
“후회 속에서 살 거야.”
“…….”
“동정하지는 말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일이었으니.”
우리는 이렇게 헤어졌고, 나는 이후 가주가 된 후에 그녀를 찾았지만.
다시는 시저를 보지 못했다.
* * *
‘그랬었는데.’
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눈앞의 구 스승님을 보았다.
손에 생성된 저 가위는 물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일시에 고요해졌다.
나 참, 이전 생에서 가주가 된 뒤에 찾을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사람이. 여기서 나타나?
“……칼립소.”
벨루스가 내게 성큼 다가왔다.
아무래도 놈도 물의 힘을 쓰는 웬 여자, 시저를 보고 놀랐겠거니 생각했다.
그랬는데, 웬걸.
“……모친이다.”
“응?”
나는 홱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모친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벨루스의 표정도 복잡해 보였지만, 대뜸 핵폭탄을 얻어맞은 나만큼은 아니었다.
‘이게 무슨 대뜸 막장 드라마 같은 장면인지.’
내가 뭘 먹고 있던 중이라면 모 드라마의 ‘예나 선정이 딸이에요’ 하는 대사를 들었을 때 배우처럼 물을 좔좔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 오빠는 농담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놈이었다.
‘허, 시저와 엄마가 동일 인물이라고?’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넌 원망하진 않니?”
“누굴 말이야?”
“뭐, 네 엄마라거나. 아빠라거나.”
“원망도 원망할 대상한테 하는 거지. 낳자마자 죽은 엄마는 왜 탓하겠어.”
“…….”
‘허, 설마. 그래서 지난 생에서 그런 걸 물어봤던 건가?’
그런 게 있다.
생각도 전혀 하지 않을 때는 그저 바닥에 떨어진 조각이구나 하고 넘어갔던 것이.
모든 그림을 알고 나서 다시 보면 앗, 저거 중요한 조각이었잖아?!
싶은 것 말이다.
시저를 만났을 당시 내 머리엔 오로지 처음 각성한 물의 힘, 이 힘을 단련해 가주가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악에 찬 복수귀였다고나 할까.
‘두 번의 생을 그렇게 보내 봐라. 악에 차지 않을 수가 있나.’
그래서 시저와의 시간을 밥도 안 먹고 훈련만 했지. 마음에 여유가 없어 거의 정도 쌓지 못했다.
뺨을 긁적였다.
‘하아, 일단 진정하자.’
시저인지 엄마인지. 어느 쪽이든 대화가 필요한 상황이니.
나는 느슨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일단 그놈은 놔줘요. 대화나 하죠.”
시저의 눈이 나를 응시했다.
여전히 가냘픈 미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얼굴에 큰 흉터가 없었다.
흉터가 없는 얼굴은 이런 느낌이구나…….
범고래답지 않는 동글하고 청순한 눈을 보다 알아차렸다.
‘내 눈이 저기서 온 거였군.’
“그놈을 놓더라도 대화는 충분히 해 드릴 테니까.”
“흐음, 이렇게 쉽게?”
시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도 치밀하게 가위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나를 아는 눈치던데, 우리 어디서 봤지? 이렇게 예쁜 얼굴을 쉽게 잊을 리가 없는데…….”
“그러니까 그 예쁜 얼굴이랑 가까이서 대화나 좀 하지? 서로 손대지 않는단 바다의 맹세를 하면 될 거 아냐.”
“목숨을 참 쉽게 여기네? 좋아.”
시저는 맹세를 끝내고서야 물의 힘을 거두어들였다.
“당신이 수장이구나? 수장 대 수장으로 이야기를 좀 나눠 보겠어?”
마치 인질을 잡은 적 없는 양 태연하게 말하는 시저의 모습은 기억하는 스승님 그대로였다.
대화할 곳이 마땅하지 않아 벨루스가 머무르고 있던 도시, 영주성으로 왔다.
바다의 맹세를 한 것 때문인지, 시저는 적진 한복판까지 잘만 따라왔다.
‘분명 같이 온 수하들은 죄다 상어였다.’
범고래는 전혀 없었다.
여기서 알아차릴 수 있는 건 많았다.
제일 중요한 건, 상어랑 손을 잡았다는 거겠지.
벨루스는 연신 복잡한 눈치였지만 둘만 남게 해 달라는 내 명에 군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남매니?”
“…….”
“하나도 닮지 않았네.”
나는 느긋하게 등받이에 기댔다. 다리를 꼰 채였다.
“닮지 않았는데 남매인 건 어떻게 알고?”
“…….”
나를 빤히 보던 시저가 생긋 웃었다. 미인의 웃음이다.
“두 사람 유명하잖아? 범고래 가주 아래 첫째와 막내.”
“아예 관계없는 사람처럼 말하네?”
시저는 대답 없이 웃음을 삼켰다.
“혹시 약초를 좀 피워도 되니?”
“편하게 해.”
시저가 담뱃대를 입에 얌전히 물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담배냐는 말은 안 하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인데 말이지.”
“…….”
“날 어디서 봤을까.”
누가 범고래 아니랄까 봐, 경계하는 눈초리가 꽤 매서웠다.
“하긴 이런 얘길 하려고 모인 게 아니니.”
곧 담뱃대를 내려놓고 시저 쪽에서 본론을 시작했다.
“반가워. 나는 상어들을 이끄는 무리의 대장이란다. 이름은 시저. 뭐, 내 이름마저 알고 있던 눈치 같지만?”
“상어들을 이끈다고? 그럼 셰크는?”
“우릴 버린 놈들의 수장이지.”
시저가 설명했다.
상어는 크게 두 일파로 나뉜다고 한다. 하나는 셰크가 이끄는 무리로 우리가 익히 알 듯이 범고래에게 어마무시한 원한과 증오를 품은 놈들이었다.
“모두가 선조의 증오를 이어받진 않았지. 살기도 바쁜데, 기억조차 나지 않은 선조의 유지 따윌 굳이 이어야 하나? 이런 놈들도 있었다. 여기까지 이해가 되니?”
“그게 그쪽이 이끄는 무리다?”
시저가 끄덕였다.
“사실 상어 중에서도 몇몇 종이 극성이지 대부분은 평화를 바라. 우리도 평범한 수인이니까. 하지만 저쪽에서 대화는커녕 같은 종이라도 잡아 죽이니 별수 있겠니? 우린 조용히 숨어 살았지.”
내가 알기로 시저는 강하다.
그런데 셰크를 때려잡는 쪽보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데리고 조용히 살길 택했다고?
“하지만 사나운 상어들이 모두 끝장난 마당에, 너희가 상어 씨를 말릴까 싶어 찾아왔지.”
“…….”
“내 무리에서 삐딱한 놈들은 모두 버렸단다.”
“…….”
“남은 이들은 아프거나 늙거나. 어린아이들밖에 없지.”
시저와 함께 나타났던 수하도 꽤 어려 보였다.
간접적으로 전투 인원이 거의 없다는 말을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시저 혼자 싸움을 시작하기에도 무리였을 터.
사정은 이해했다.
내가 상어를 싸잡아 잡아들이거나 죽일까 봐 염려돼서 나타났다는 것까지.
하지만 의문이 남았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죠?”
나는 덤덤하게 의문을 담아 물었다.
“당신은 범고래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