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4화
갑작스러운 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이 줄 거라니?
한편으로 하우저가 이번 생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는 이상 예삿것이 아닐 거란 판단이 섰다.
“여기서 전달해도 괜찮은 거야?”
나는 물의 힘을 사용할 수 없다.
고로 소리를 차단하는 방벽을 사용할 수 없다.
하우저가 잠시 주변을 돌아봤다.
“……잠깐 자리를 옮기시죠.”
“그래.”
우리가 도착한 도시 근처에는 자그마한 숲이 있었다.
숲이라고 하기에도 초라한 몰골이지만 한적하여 사람이 거의 없었다.
‘좋아,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군.’
나는 고개를 바로 했다.
하우저는 아주 잠깐 긴장한 표정을 하더니, 이내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았다.
“수하님, 언제부터 그렇게 무릎이 쉬워지셨나?”
나는 심드렁하게 내려다봤다.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저는 원래 무릎을 잘 꿇었습니다.”
“웃기고 있네. 잘못했을 때만 잽싸게 무릎 꿇는 게 레바이 그놈이랑 너랑 똑같았지. 자랑이냐?”
“…….”
이에 하우저의 낯으로 뜻 모를 미묘한 표정이 스쳤다.
“말씀하신 돌고래놈과 관련하여 긴히 드릴 말씀이 있지만……. 제 용건이 더 중요한 일이니 미뤄 두겠습니다.”
뭐야, 이 찝찝하고 의미심장한 음성은?
“이걸 받아 주시겠습니까?”
무어라 하려던 나는 곧 앞으로 내밀어지는 주먹에 잠시 멈췄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놈이 또 무슨 어마어마한 비밀을 보고하려 하는 건가.
그런 생각뿐이었는데…….
주먹이 펼쳐지는 순간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뭐야, 이거…….
“……설마, 리니어스?”
하우저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면 꿈을 꾸는 거라 생각했을 거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분명 보고에서는 우리가 친 근거지의 수장 놈이 갖고 있다고 했는데?’
근거지는 무너졌다. 게다가 그놈들은 이미 황실과 엮여 있었으니.
그 폐허 더미에 묻혀 있거나.
황실 손에 넘어갔거나.
황실 손에 들어간 건 최악의 경우겠지만. 여기까지 고려하고 있었는데…….
“이게 왜 네 손에 있는 거야?”
“제가 챙겨 왔으니까요.”
내 손에 있던 리니어스의 존재는 수하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내가 술 취하면 낄낄대며 물의 힘을 각성한 계기를 나불나불댔던 탓이다.
‘오죽하면 첫째와 둘째 놈도 기억이 있다고 토로한 뒤에 리니어스에 대해 한 번씩 물어봤을까.’
하우저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인즉 이러했다.
수도에서 나온 뒤로 바로 황무지로 향한 게 아니라, 돌고래 영지로 향했다고.
황태자가 어떻게든 수를 써서 리니어스를 손에 넣으려고 하는 걸 알아차려서라나?
‘확실히 기억이 있다면 이걸 손에 넣으려 들었겠지.’
게다가 원작에서 원래 황태자 손에 들어가는 보물이기도 했으니.
“그래서 계속 네 손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네.”
“어떻게? 너 그간 묶여 있었잖아?”
여기까지 말하고서 얼굴을 흐렸다. 이놈 이거…….
하우저가 히죽 웃었다.
“시간이 흐르기는 했군요, 가주님께서 그런 것을 여쭈시다니…….”
“……아니, 됐다. 안 들으련다.”
생략된 방법은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나는 리니어스를 받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빛을 받아 찬연하게 반짝이는 보석.
그러나 효과와는 다르게 대단하게 보이진 않는 것이 이 보물의 특징이기도 했다.
‘이게 드디어 내 손안에 들어왔구나.’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물의 힘을 쓸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뭐 어때? 이게 안 된다니, 3회차에서처럼 보물의 힘을 빌리면 되지.
나는 가만히 3회차에서 물의 힘을 각성한 순간을 떠올리며 보석을 꾹 쥐었다.
보석의 날카로운 부분에 베여, 피가 흘렀다. 그 피가 보석에 송골송골 맺힌다.
그 뒤로 일어날 일을 기다렸다.
“…….”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가주님?”
“…….”
나는 손을 휙 펼친 뒤에 보석을 다시 들어 올렸다.
한참을 바라보던 내 얼굴로 황당함과 허망함이 스쳤다.
“야. 하우저야.”
“……예?”
“이거 짝퉁이냐?”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돌고래 영지에서 가져온 진품이란다. 게다가 누구의 손에도 들어간 적이 없다고.
나는 다시 한참이나 복잡한 낯으로 보석을 바라보다 마침내 인정했다.
“……이거, 작동 안 하는데?”
* * *
그날 밤.
나는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벨루스에게 요청해 받은 방은 크고 침대도 거대했다.
수하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아틀란이나 웨일이 세 명쯤 누워도 틈이 남을 듯한 침대는 만족스러웠지만.
만족을 제대로 느낄 겨를이 없었다.
내 손에는 줄에 둘둘 묶인 보석이 들려 있었다.
‘……대체 왜 작동을 안 하는 거지?’
나는 이미 이 보석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이를 통해서 각성도 했고 말이다.
설마 지난 회차랑 사용 방법이 달라진 건 아닐 테고. 뭔가 조건을 충족 못한 게 있나?
“리니어스 이놈한테 눈이라도 달렸나. 너 낯가리냐?”
하도 어이가 없어 중얼거리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만히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왔어?”
태연히 맞이했지만, 한편으로 잠시간 보석을 머리에서 잊었다.
‘뭐야, 옷차림이 왜 이래?’
가운 하나만 걸친 용 공작이었다.
아연해진 기분이라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옷차림이 왜 그래?”
“옷차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표정 하지 말고. 그 가운 말이야.”
용 공작이 걸친 가운이 살짝 벌어져 가슴의 굴곡이라거나 살갗이 그대로 비쳤다.
은은한 촛불 아래 보이는 저 모습을 보자니…….
“방을 같이 쓰는 사람이, 뭐? 용 공작?”
첫째놈의 당황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같이 방을 쓸 사람이 용 공작이란 말에 기함하는 모습이었지.
사정을 설명했지만, 표정은 매한가지였다.
‘이제 황실의 하나뿐인 목표가 용 공작이란 걸 알았는데, 어떻게 혼자 둬?’
이게 아니더라도 내가 아니면 잠조차 못 잔다고 하니.
불면으로 폭주하는 용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물론 상의를 탈의해야지만이 잠을 잘 수 있다는 건, 좀 그렇긴 해.’
나는 눈을 자연스럽게 돌리면서 탁탁 침대를 두드렸다.
수하 놈들의 벗은 상체를 한두 번 보는 건 아니지만.
용 공작은 미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게 있다 보니, 조금 곤란했다.
사실 나만 이렇게 느낀 건 아니라는 데에 내 머리카락을 걸 수 있다.
오늘 회의에서 보니까, 용 공작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여성 수인이 한두 사람이 아니더만.
“……왔으면 먼저 누워. 나는 생각할 게 있어서 조금 뒤에 잘 테니까.”
용 공작은 수긍한 건지, 아니면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건지.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아니, 앉은 채로 상체는 침대 등받이에 기댔다.
“…….”
“……뭐야, 안 자?”
“그냥.”
나는 리니어스를 다시 보려다 말고 한숨과 함께 보석을 아래로 내렸다.
“설마하니, 아기처럼 토닥토닥 다독여 줘야 잠드는 건 아니지?”
“겪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해 준다면 사양하진 않겠다.”
“뭘 그리 당당하게 말하고 있어?”
“그럼 어린 나는 어떻게 말했지?”
“알려 줄 생각 없는데.”
생긋 웃었다. 슬쩍 그어 놓은 선을 느낀 건지 용 공작은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 말고 푹 자. 이제 끝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용 공작은 깊고도 찬연한 금빛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넌 지금 행복한가?”
“응?”
갑자기?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용의 조각이 조금 귀찮은 소리를 속삭였을 뿐.”
“뭐야…….”
김새게.
나는 꼬물거리며 눕는 커다란 남자를 보다 등을 돌렸다.
등이 꼿꼿하게 펴졌다.
곧이어 새근새근 잠드는 소리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 * *
“아빠는 조금 늦나 보네?”
“그런 것 같더군.”
다음 날, 어제저녁 미리 회의한 대로 당장 목책을 찾아가기로 했다.
우선 병력을 둘로 나눠서, 한쪽은 시선을 끄는 역할.
다른 한쪽은…….
공작새들을 처단하고 직접 수장의 모가지를 따는 역할이다.
후자 쪽은 맡은 역할에 따라 은밀하게 움직일 소수정예로 정해졌다.
‘잠입할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아게노르 그놈을 데려올 걸 그랬네.’
공작새의 환영을 파훼하는 방법은 벨루스도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를 직접 겪어 본 사람이 하나는 더 필요했기에.
지금까지 속수무책이었을 거다.
“그럼 저쪽 지휘 잘 부탁할게.”
“분부대로.”
나는 벨루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망토의 모자를 푹 눌러썼다.
둘째는 현재 용 공작과 함께 본성에 남았다.
자신이 빠진다는 사실에 길길이 날뛰었지만 어쩌겠나.
“믿고 맡길 사람이 너밖에 없다, 둘째야.”
이 말에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도 남았지만.
아틀란을 대신한 전투 인원은 하우저가 메웠다.
나는 뽑힌 인원의 면면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살짝 웃었다.
하우저를 만나서인가, 유독 그리운 수하 얼굴들이 생각난 탓이다.
“모두 출발한다!”
* * *
그리고 정확히 30분 뒤.
나는 무너지는 천장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야……. 한 방 먹었네?”
돌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금이 간 천장이 보였다.
‘빠르면 8초, 길어 봐야 10초인가?’
아마도 10초 내로 무너질 것이다.
움직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바닥 또한 겨우 무게와 균형을 유지하는 상황.
움직인다면 그대로 무너질 것이다.
다음 수순은 거대한 건물 더미에 갇히는 것.
‘여기에 나만 있는 게 다행인가.’
한숨을 작게 쉬었다.
끝이 이러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 보고 있냐. 망할 보석 놈아?”
나는 목에 끼고 있던 리니어스를 잡고 들어 올렸다.
“네가 발동하지 않으면, 난 죽어.”
피가 나도록 보석을 꾹 쥐었다.
“그리고 절대 여기서 못 죽지.”
보석을 협박하는 것도 웃기지만 말이야.
“여기서 발동 안 하면 천년이나 된 너도 가루가 되는 날일 줄 알아.”
보석이 으스러져라 힘을 주었다. 쩌저적.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리니어스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깨진 틈 사이로 새파란 빛이 새어 나왔다. 반가운 빛을 보며 나는 피가 어린 얼굴로 씨익 웃었다.
“진작에 이럴 것이지.”
파사사삭. 손에서 보석이 부서진다.
동시에 흘러나온 힘이 온몸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