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23화 (223/275)

제223화

하우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도 회의에 참석해.”

자신이 알아 온 모든 것을 고백한 다음 날. 칼립소가 찾아와 말했다.

‘하루 정도면 편히 쉬었지?’ 하는 표정이었다.

기억하는 가주님 모습, 너무나 그대로라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마치 광인처럼.

그렇게 참석한 것까진 좋았다.

낯선 그를 향한 시선이 따갑도록 쏟아졌지만 상관없었다.

아틀란 아콰시아델의 시선이 묘했지만 이미 칼립소로부터 아틀란도 기억이 있음을 언질받았기에 그러려니 넘겼다.

그런데 기억하는 것과 똑같은 얼굴이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건 줄곧 머리 한쪽을 차지했던 보물에 대한 생각도 잠시 잊게 할 만했다.

새하얀 낯짝. 돌고래 주제에 홀로 돌연변이처럼 성질 드럽게 생긴 눈깔을 안경으로 못 이긴 척 가리고 있지만.

정제된 모습 속 정갈한 차림으로도 숨길 수 없었던. 줄줄 새어 나오는 반항기.

‘저거 지금 뭐 하는 거야?’

분명 기억이 있는 주제에, ‘레바이 돌핀’은 뻔뻔하게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 * *

“어서 와.”

벨루스가 있는 곳까지는 정확하게 나흘이 걸렸다.

목책이 세워진 곳 앞에서 첫째놈이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근처에서 안절부절못하던 기사들이 내가 모자를 벗어 얼굴을 드러내고 나서야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쟤네 표정 왜 저래?”

“왜 저러긴. 저 망할 형 새끼가 보기 싫은 꼴을 하고 있으니 구역질을 안 참고 배겨?”

“아아. 첫째가 착한 모습을 보여서 적응이 안 된다는 소리구나?”

“정확하십니다.”

둘째놈의 말을 해석하자, 레바이가 훌륭하다는 듯 무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아틀란이 우리 두 사람을 미친놈 보듯이 봤다.

그러더니 나를 홱 잡아당겼다. 어느새 우리 둘만 둘러싼 물의 막이 보였다.

“야, 저 새끼 진짜 기억 없는 거 맞아? 어째서 날로 너랑 붙어먹어서 빡치게 하는 꼴이 예전이랑 똑같아?”

“뭘 호들갑이야. 기억 없다잖아. 확인은 같이 해 놓고?”

“이익…….”

“그리고 힘이 남아도냐? 빨리 이거 안 풀어?”

둘째가 이를 살짝 갈면서도 소리를 차단하는 물의 보호막을 해제했다.

“저 새낀 오늘도 지랄발광이군.”

“넌 동생한테 좀 부드럽게 말하는 버릇을 들여 보면 어떠니, 첫째야?”

“난 이미 충분히 네게 부드럽다.”

나한테 모든 부드러움을 쓰고 있으니 둘째와 셋째에겐 국물도 없다는 건가.

벨루스를 보았다.

첫째는 대놓고 ‘나보다 강한 사람한테만 이럴 거다’ 하는 기세를 풍겼다.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는?”

“나르파에 가셨다.”

“나르파면, 북쪽?”

“그래.”

이 도시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있는 도시였다.

범고래 방계 가문 중 하나이자 방계 중에서도 1, 2순위를 다투는 가문의 영지이기도 했다.

“거긴 왜?”

“모친의 무덤이 거기 있다더군.”

“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게 모친이 살아 있다고 알려 준 건 이놈이잖아?’

내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이어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자신이 아빠를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고.

하기야 여태 시간이 날 때마다 꾸준히 말했지만 아빠는 엄마가 살아 있음을 믿지 않았다.

죽음을 직접 봤다는 소리까지 하니. 첫째도 어느 순간 더는 주장하지 않았다.

“바다의 맹세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저 견고한 믿음을 그렇게까지 부숴 버리고 싶진 않군.”

나도 동의하고 만 건, 아빠가 묘하게도 엄마의 죽음에 있어서만큼은 절박하게 보일 만큼 완고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엄마가 살아 있다 한들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는데.

‘한국에선 장기 실종을 사망과 비슷하게 취급하기도 했지.’

이게 죽은 것과 뭐가 다른가?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

우리는 도시로 함께 들어갔다. 벨루스가 현재 상황을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곳은 내가 갔던 거점과 다르게 자폭에 실패했다고 한다.

‘허어, 자폭 장치를 아예 없애 버렸을 줄이야.’

그렇다는 건 온전한 전투로 우리와 맞서겠다는 건데.

상어놈들답지 않았다.

“저놈들이 전투로 우릴 이길 수 있기나 해?”

“그게 조금 이상하다.”

“왜?”

“싸우고자 하면 놈들의 목책이 사라져.”

나는 눈을 깜빡였다.

“사라진다고? 설마…….”

이 사실이 놀라워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첫째가 주변을 보더니, 조금 전 아틀란이 친 것과 같이 소리 차단을 위한 물의 장막을 둘렀다.

“‘공작새’야?”

“그래. 맞아.”

공작새. 이놈들은 사람을 홀리는 환상을 만들 수 있었다.

이놈들이 모이면 대규모 환상 능력을 쓸 수 있는데.

놈들은 이런 특기로 성을 숨기기도 했다.

“네가 전달해 준 정보대로, 이곳 또한 육지놈들과 손을 잡은 모양이더군.”

“……괘씸한 새끼들이네.”

수중 동물 간의 싸움으로 두지 않고 비겁하게 육지놈들을 끌어들여?

심지어 상어라고 육지 놈들에게 차별을 안 당한 것이 아니었다.

우습기만 했다.

범고래에게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자신들을 비린내 난다고 더럽게 보는 놈들에게 굴종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가?

“잘됐어.”

공작새들의 등장이라니 놀랍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3회차에 저놈들로 인해 전투에 골머리를 싸맨 적 있지만.

“승리했잖아? 한 번 한 거 두 번이 뭐가 어렵겠어.”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게 바로 나다.

“조심스럽지만, 가주님. 방심은…….”

“누가 방심한대?”

나는 팔짱을 낀 채 피식 웃었다.

“저 새끼들이 비겁하게 나왔다면…….”

나는 씩 웃었다.

“우린 더 비열하게 가면 되지?”

명분은 쟤네가 줬으니 말이야.

* * *

잠시간 상황을 보고하는 대화가 이어진 끝에 벨루스가 잠시 머뭇거렸다.

답지 않은 첫째 오빠의 행태에 칼립소의 예쁜 낯이 거칠게 휙 기울어졌다.

“뭐야, 너. 할 말 있으면 해.”

뒷골목 깡패라고 해도 어울릴 법한 말투에 벨루스는 실소를 머금었다.

뒷골목 깡패든, 양아치든. 이런 말투마저 고결하게 승화하는 게 바로 자신이 모시는 여동생이자 주군이다.

“옆에 달고 온 놈.”

칼립소는 벨루스에게 하우저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아직은.

하지만 벨루스는 아틀란이 그랬듯 한눈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칼립소는 짤막하게 하우저와 하우저가 보고했던 일을 공유했다.

“이상할 정도로 기억하는 놈이 많네.”

공감하는 바였다.

벨루스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등고래면 우수한 전사였으니 도움이 되겠어.”

“뭐, 그렇지.”

“너만 빤히 보는 꼴이 네게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낯이던데.”

“음? 그랬나? 걘 항상 그렇게 봐 왔잖아?”

이런. 둔해도 너무 둔했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벨루스는 작게 웃었다.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수하들, 동료들에겐 약해지면서.

이성과 관련되면, 자신에게 할 말이 있어 끙끙대는 남자 표정 하나 알아보지 못했다.

살면서 전투와 행정 능력, 가주로서의 삶만 강요받은 사람처럼 구는데, 여기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아, 확실히 둘만 있길 바란다고 요청해 왔는데……. 여기 달려오는 게 워낙 급하다 보니 시간이 안 나긴 했어.”

칼립소는 하우저의 요청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고마워. 덕분에 생각났네.”

“별말씀을.”

“그래. 그럼 일은 내일부터 실행해 보자고. 저녁에 한 번 전령 보낼게.”

칼립소가 돌아섰다. 저녁엔 여기 있는 인원까지 모인 회의가 열릴 것이다.

“이번 삶에서도 똑같이…… 살 건 아니잖아.”

벨루스는 뒷모습에 대고 가만히 말을 걸었다.

“뭐가?”

“지난 삶처럼 연애도 결혼도 거부할 거냐고.”

“내가 언제 거부했어? 나 참. 시간이 없었던 거지. 시-간이.”

칼립소가 몸을 반쯤 돌렸다.

“뭐, 이번 생은 알아서 할 거야. 연애도 해 보고 결혼도 해 보고?”

“상대는?”

“흐음?”

“넌 혹등고래의 마음을 알고 있잖아.”

둔하디둔한 칼립소였지만, 직접 고백한 놈의 마음까지 모를 순 없었다.

“이번 생엔 대답을 해 줘야 한다? 나도 알고 있어.”

대답은 산뜻했다.

“생전 안 하던 참견을 하네?”

그랬다. 3회차에서 적으로 만났던 형제들.

이들 중 아틀란은 패배해 아래로 들어온 이후, 날이 갈수록 칼립소에게 참견이 심해졌다.

벨루스는 그렇지 않았다.

“지난 생에선 적으로 시작해 동료로, 수하로 마무리했지만. 이번 생은 가족으로 시작했다고 생각해서.”

칼립소의 어처구니없던 표정이 조금 멍해졌다. 그러다 웃었다.

“그래. 알겠어. 오빠.”

벨루스도 가만히 미소 지었다.

잠시간 남매 사이에 훈훈한 온기가 맴돌았다.

“아, 그런데 혹시 영주성에 침대가 두 개인 방도 있나? 아니면 아주 커도 좋아.”

“왜?”

한데, 그건 오래가지 않았다.

“시녀 때문인가? 하지만 시녀를 데려오지 않았잖아?”

“시녀 말고.”

바로, 칼립소의 충격 선언 때문이었다.

“방 같이 쓸 사람이 있어서.”

* * *

“넌 혹등고래의 마음을 알고 있잖아.”

알고는 있었지만, 당장 다가올 거라 생각하지 못해 미뤄 뒀던 이야기다.

벨루스는 정확히 이걸 꼬집었다.

첫째 오빠와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섰다.

커다란 덩치였다.

끝이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보다 웃었다.

“왜?”

하우저였다.

“……감히 청컨대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감히 청하지 않고 편히 청해도 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랑 내가 그런 주종은 되지 않았나?”

“…….”

하우저가 어둡게 가라앉은 눈을 아래로 내렸다.

“……드릴 것이 있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