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잘못 느낀 게 아니었어.’
분명 앞선 삶에선 용 공작에게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간 꽁꽁 숨긴 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인지 몰라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황실이 이번 삶에선 용 공작에게 집착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집요하고 지독하게.’
용 공작을 가둬 두고, 용의 성에 자신들의 감시자들을 곳곳에 세워 둘 만큼.
‘그게 황태자 그놈에게 일어난 일을 해결하기 위한 거라면.’
이해가 가.
모든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왜냐, 차근차근 수중 동물 수인의 일을 진행하면서도 고요하기 짝이 없는 황실이 이상하기만 했으니까.
“용이, 어떻게 황태자를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는 건데?”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시간’과 ‘멸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입맛이 썼다.
3회차의 멸망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니, 이번 생은 절대 그런 결말을 맞이하게 두지 않아.’
나는 이 생을 마지막 삼기로 결심했다. 정말, 만에 하나 시간을 반복하더라도…….
지긋지긋한 원한을 끝낸다.
이 생은 늙어 죽는 걸 목표로 할 거야.
“그래서 황실이 용 공작을 원했다.”
하지만 내가 용의 성에 갔을 때, 에키온은 그저 감금되어 있을 뿐이었다.
학대 정황은 있었지만 에키온의 힘을 억지로 착취한 흔적은 없었다.
‘혹시 저놈들도 에키온을 가둔 채 뭔가를 기다린 거라면?’
황태자에게 걸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라면. 쉽게 풀려날 수 있는 건 아닐 터.
어떤 준비가 필요했다거나.
‘무언가’를 기다려야 했다면.
여기서 무언가란…….
‘에키온의 성장을 기다린 거겠군.’
맞다. 투스도 에키온도 성장하면 힘이 안정된다고, 또한 온전히 쓸 수 있게 된다고 했으니.
나는 삐뚜름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네놈들도 다시 폭주를 겪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지?’
투스는 내가 있어서 안정된 덕분일 뿐 어린 에키온은 늘 폭주 가능성이 높았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사자 새끼들이다.
‘수틀리면 다시 한번 다 같이 죽자고 폭주시켜 멸망을 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황태자 앞에 용 공작의 존재를 드러낸 건 후회하지 않았다.
황태자는 이미 이곳에 용 공작이 있던 걸 눈채챈 듯했고, 들키는 건 시간 문제였다.
적의 목표가 확실하면, 이에 대등할 작전은 머리 아픈 것 없이 단순해지는 법이다.
‘놈들은 우선 순위인 용 공작만을 노릴 테니까.’
한편으로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알고는 있지만. 그리고 수긍도 했지만, 용 공작을 미끼로 삼은 듯한 이 기분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과거 죄 없는 용 공작을 희생양으로 삼더니, 너희는 이번 생에도 변한 것이 하나 없구나.
“…….”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을 때, 불쾌감은 얼굴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대신 그 틈을 채운 감정이 있었다.
나는 내심 복잡해졌다.
‘대체 넌…….’
이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얼마나 고생한 거야?
한 귀로 들어도 보통 정보가 아니었다.
이 정도씩이나 되는 정보를 캐내기 위해선 못해도 수없이 많은 고생을 했을 터이다.
“혼자서 이 모든 걸 알아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공치사를 모두 제게로 돌리고 싶지만, 아쉽게도 완전히 혼자서 해낸 건 아닙니다.”
“그럼?”
“‘악퍼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간만에 듣는 이름은 3회차 나를 열렬히 따랐던 문어 수인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모습은 물론 타인의 모습을 완벽하게 바꿔 줄 수 있는 특기를 가진 수인이다.
“뭐야, 설마 걔도 기억해?”
“유감스럽게도 아닙니다.”
하우저는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조금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 저만 기억해서 좋긴 합니다. 덕분에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으니까요.”
“…….”
나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주름을 모두 펴냈을 때, 내 손이 놈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고생했어.”
“…….”
그리고…….
“죽지 않아 줘서. 고마워.”
하우저는 나를 보다가 문득 말했다.
“울어야 하는 시점입니까?”
“……그건 눈물이라도 쏟으면서 해야 하는 말 아니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
“단 한 순간이라도, 눈물에 가주님 얼굴이 가리면 못 견딜 것 같으니까요.”
“……너도 참 정성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놈을 보고 있으려니 절로 레바이가 떠올랐다.
정말이지, 양팔 같던 놈들은 거짓말처럼 3회차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나마 레바이는 기억이라도 없지. 이놈은…….
“일단 피곤할 텐데 쉬어. 알려 주느라 고생 많았다.”
이제 막 병상에서 일어난 사람을 더는 붙들고 있을 게 아니라 앞으로의 일을 도모할겸.
휴식을 주기로 했다.
그러나 돌아서기 무섭게 하우저가 내 앞으로 돌아 나와서 양 무릎을 꿇었다.
“뭐 하는 거야?”
“이름,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뭐야……. 하우저. 됐지?”
“네. 가주님의 수하입니다. 기억하시지요? 목숨을 바쳐 충성을 맹세한 것.”
“…….”
음침하게 가라앉은 눈이 나를 뚫어 버릴 것처럼 응시했다.
“지난 생처럼 이번 생도 제 평생을 가져 주십시오.”
하우저의 얇은 입술로 황홀한 미소가 어렸다.
“몸도 마음도 영혼도. 당신의 것이니까요.”
“……내가 어디 가서 그런 미친 소리 하지 말랬지?”
과거 내 주변엔 왜 또라이들만 모일까 고민하게 만든 일등 공신답게, 나는 번들거리는 눈을 보며 허, 웃음 같은 한숨을 지었다.
“난 인신 공양은 안 받는다.”
나는 놈의 이마를 꾹 누르고는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 * *
하우저의 등장과 하우저가 가져온 정보는 우리 진영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가 간 곳이 최종 본거지가 아니었던 모양이니. 아빠랑 벨루스가 간 쪽이 본거지겠네. 그곳에 상어 일파를 이끄는 리더도 있겠어.”
“그럴듯합니다.”
레바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회의실에 앉아 있던 아게노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가주님, 아니, 여동생님, 이번엔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응? 응?”
나는 셋째놈에게 살짝 고개를 저었다.
셋째놈은 기동력이 가장 좋다. 만약을 대비해 이곳에는 움직임이 좋은 놈이 남아야 했다.
“놀랍군요. 황태자의 사정으로 용 공작에게 집착했던 거라니…….”
레바이가 작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다는 듯한 표정인데?
그러나 레바이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생각이 정리되면 어련히 말하겠거니 하고 넘겼다.
“그래. 결판을 빨리 짓고 싶었는데, 저쪽에서 친히 노크를 다 해 오네?”
수중 동물의 영역은 곧 아콰시아델의 영역이다. 더러운 사자놈이 내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기분이 아주 더럽고 불쾌했다.
“그럼 벨루스 님이 가신 곳으로 직접 가시는 겁니까?”
“맞아.”
레바이는 작게 끄덕이고는 한곳을 향했다. 놈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곤혹스럽다는 듯 한편으로는 의아함이 가득한 낯이다.
“그나저나, 가주님. 그간 아무런 말도 안 하셔서 저도 넘겼습니다만…….”
레바이가 한쪽을 눈짓했다.
“저 인간은 왜 저기 앉아 있는 겁니까?”
레바이가 가리킨 곳엔 하우저가 자리해 있었다.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둘째놈을 제외하면 모두가 할 말이 많은 낯이었다.
내가 설명 없이 넘기니 그러려니 넘어갔다는 자세가 역력했다.
“중요한 안건이 끝났으니 망정인데, 사적인 질문을 조심스럽게 드려 봅니다.”
레바이는 이들을 대표해 안경 아래 차갑게 벼린 눈으로 온유하게 말했다.
“애인을 데려오셨다는 소문이 자자하시던데요. 정말입니까?”
“데려와.”
“네?”
“그 소문 가장 적극적으로 퍼트린 놈 하나만 데려오라고. 본보기로 조져 버릴까 해서?”
“……아니로군요.”
레바이가 고개를 주억였다.
“너 움찔했지. 왜, 너도 소문을 퍼트리는 데 한몫했어?”
“유언비어 싫어합니다만.”
“왜, 세 치 혀로 사람 죽이는 건 잘하면서. 아틀란이 매번 사망하지 않았나?”
“내가 언제!”
나는 둘째놈의 불평을 한 귀로 넘겼다.
곧 하우저를 소개했다. 이번에 우리 아래로 들어온 주요한 첩보원으로.
모두 미심쩍은 시선이 가득했지만, 바다의 맹세를 마쳤다는 말에 살짝 누그러트렸다.
“하우저, 할 말 있으면 해.”
“살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음? 뭐가? 아니, 누가?”
“굉장히 약해 빠져서 분명 어디 고꾸려져 있을 줄 알았는데…….”
하우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레바이였다.
‘아.’
나는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얘네, 사이 그다지 안 좋았지?
‘뭐, 내 수하 중에 몇몇을 빼고는 하도 호전적이라 매번 치고받고 싸우는 게 일상이었지만 말이지.’
레바이는 하우저가 누군지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지만. 본능적으로 저를 향한 깊은 불쾌감을 느낀 듯 살짝 미간을 좁혔다.
“가주님, 저 미역 머리가 뭐라 지껄이는 겁니까?”
“…….”
“다 불어터진 해초 머리를 한 채로……. 무례는 둘째치고 씻은 상태이면 좋겠군요. 이 회의장엔 청결한 것만 있길 바라니.”
“…….”
오, 유치한데 확실한 도발이군.
나는 턱을 괸 채 키득키득 숨죽여 웃었다.
뭐, 됐다.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니까. 쟤들은 더는 애새끼가 아니지만.
속 알맹이가 저런 거겠지 뭐.
“그럼 이렇게 됐으니, 오늘 당장 벨루스를 향해 출발한다.”
* * *
회의 파장을 선언하는 칼립소의 목소리에 모두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우저는 홀로 꼼짝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건’ 언제 드리지?’
어제 모든 것을 보고드린 날, 하우저는 제 감정에 너무 취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를 잊고 말았다.
그는 칼립소에게 전달해야 할 보물이 있었다.
‘둘만 있을 때…….’
오늘 오전까지는 좀처럼 둘만 있을 여유가 나지 않았다.
칼립소가 바빴기 때문이다.
하우저는 오붓한 시간 속에서, 자신의 노고를 절정까지 치하할 수 있는 순간에 주고 싶었다.
그 아름답고 고결한 눈에 오로지 자신만이 들어차는 순간을 기대하며 고통을 버텼다.
자신은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그의 그늘진 시선은 한곳을 고요히 응시했다.
집요하게.
놀랍게도 항상 꿈에 그려 왔던 가주 칼립소를 보는 대신, 시선 끝엔 돌고래 수인. 레바이가 있었다.
하우저가 생각했다.
‘저 새끼.’
새하얀 낯이 느슨하게 기울어졌다.
‘왜 기억이 없는 양 행세하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