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1화
나와 하우저 사이에 짤막한 침묵이 흐른 것도 잠시, 하우저 쪽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억하시는군요.”
음침하게 가라앉은 눈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달려올 기세였다.
그러나 놈은 달려오는 대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당신의 종이 주군을 뵙습니다.”
이럴 땐 어떤 표정을 해야 할까.
아틀란과 벨루스가 나를 기억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 들었다.
가족과 수하의 차이인가?
아니면 처음엔 적이었지만 동료가 된 이와 처음부터 나를 맹목적으로 따른 이의 차이인가.
게다가 하필 3회차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놈은 이렇게 엉망이었던 몰골이었다.
기억이 난무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차분하게 말했다.
“일어나.”
내가 이름을 부른 것 한마디만으로, 하우저는 내게 기억이 있음을 확신한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우저가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확 끌어안았다.
“……살아 계시는군요.”
나는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떨리는 하우저의 손이 마치 절벽에 매달린 사람처럼 내 등을 아프지 않게 꽉 잡았다.
목소리에서 어둡게만 느껴지던 너의 집착이, 기꺼우면서도 오묘하게 느껴진다.
“나의 주군.”
하우저에겐 기억이 있었다.
“이날만을 기다렸습니다.”
아틀란에게 분명 이렇게 말한 적 있다.
하우저가 눈을 떴을 때, 내뱉는 첫마디에 따라서 많은 것이 바뀔 것만 같다고.
“수없이 떠올린 선택지 중에 네가 기억이 있다는 선택지도 있긴 했지만 말이지…….”
가능성이 희박했다.
벨루스가 알려 준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좀 더 희망적으로 생각했을 터다.
아틀란과 벨루스는 나와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앞선 생애 기억이 희미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태어날 때부터 나와 떨어진 채 자라 온 이번 회차의 하우저가 기억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떨어져. 숨 막히니까.”
“네.”
난 쯧 혀를 찼다.
대답만 잘하지.
꾹 밀어도 하우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정말 밀어낼 힘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거라 생각하냐?”
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냉정한 말에 머리 위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침울한 듯 느릿한 웃음소리다.
“정말, 가주님이시로군요.”
하우저가 떨어지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허리 뒤로 가져다 댔다.
열중쉬어 자세.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보다 흐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편히 서 있어.”
웨일의 치료 덕에 더는 환자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기력이 많이 떨어졌을 터다.
“넌 대체 어떻게 기억이 남아 있는 거지?”
“네?”
하우저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가늘고 긴 눈이 나를 빤히 응시하다 물었다.
“‘넌 대체’라고 하신 건…… 저 말고도 있는 거군요.”
기억이 있는 자가.
“그러는 넌 쓸데없이 눈치 빠른 건 여전하고.”
“당신께서 쓸 만한 인간을 좋아하셨으니까요.”
“오해는 없도록 하자. 눈치 빠른 수하가 좋았다는 거니까.”
“예, 그런 의미라도, 가주님에게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특별합니다.”
“나사 빠진 네 머리도 여전한 것 같고.”
어딜 봐도 기억이 희박한 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넌 언제부터 기억했지?”
“언제부터랄 게 있겠습니까.”
“뭐?”
편히 서라 했음에도, 하우저는 여전히 열중쉬어 자세.
이전과 같이 군인처럼 쓸데없이 반듯하게 선 채 고개만 느슨하게 기울였다.
“태어날 때부터 기억했습니다.”
“쯧, 쓸데없는 걸 품고 태어났다고? 그럼 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건…….”
하우저가 처음으로 말을 멈췄다. 속이는 건 허용치 않는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듯 아무렇지 않게 재차 입을 열었다.
“찾아갔는데, 가주님께서 저를 기억하지 못하면 주제도 모르고 실망할 것 같았습니다.”
“…….”
“그럴 바엔 차라리 가주님께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나타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던 것 같군요.”
“같군요, 가 아니라 겁을 먹은 거겠지.”
“네, 맞습니다.”
산뜻한 인정이었다.
“가주님께서 제 생이고 죽음이며 삶인데, 저를 모를지도 모른다니 두려웠습니다.”
지나치게 솔직한 말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붙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곁에 있으면 안 될 이유가 생겼습니다.”
“안 될 이유라니?”
“황태자에게 기억이 있던 걸 들켰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놈도 3회차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대체 이번 회차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당시 전 가주님께 도움이 되기 위해 수도로 넘어가 첩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새낀 왜 이번 생에 또 시키지 않은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
어처구니없는 낯으로 보자, 음침한 얼굴이 히죽 웃었다. 정상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눈이었다.
“누가 널 육지 동물 수인으로 보디?”
“흑곰들과 친해졌습니다. 외양적으로는 다행히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으니까요.”
하우저는 어린 시절에 수도에 살면서 어찌저찌 황성까지 들어가 여러 정보를 얻었다고 했다.
그러다 황태자에게 들켜 수도를 황급히 벗어나게 됐다고.
“잠깐, 잠깐만. 그 사자 새끼가 네게 기억이 있는 걸 알았다는 건……. 그놈도 오래전부터 기억이 있었단 소리지?”
하우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했다.
‘그 새끼한테도 3회차 기억이 있었다면 더더욱 이상해. 분명 어디든 써먹었을 놈이다.’
특히나 수중 동물 수인들, 우리 범고래들을 혐오하는 놈이었으니.
당장 미래 지식을 이용해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상하시지요? 바로 그 점이 황태자가 저를 뒤쫓은 이유입니다. 제가 그자의 비밀을 알아 버렸으니까요, 가주님.”
하우저의 눈이 가라앉았다.
“황태자는 이전 생을 기억하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둠 같은 눈으로 희열감이 어렸다.
“예를 들어, 가주님의 앞길을 망치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분노를 터트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황성과 수도를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외로 갈 수 있는 곳은 한 곳뿐입니다.”
“……어디?”
“흑표범 가문의 저택입니다.”
“…….”
황성, 수도. 그리고 흑표범 가문의 저택.
나는 숨을 삼켰다.
‘……모두 원작의 주요 배경들이잖아?’
생각해 보면 황태자가 이외 배경에 등장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수하의 손이라거나 직접적인 명령으로 수중 동물 수인을 해칠 수 없습니다.”
“허?”
“그 증거로 제게 땅의 힘을 쓰려다가 피를 토해 냈습니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입술을 끌어 올렸다. 비웃음이었다.
호쾌한 웃음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아. 그러니까 그놈이 멋진 등신이 되었단 소리네.”
소리 내어 웃다가 눈물을 살짝 닦아 내며 멈췄다.
하우저가 이런 행운과 함께 등장할 줄이야.
‘그래서 이 땅에 고작 흙인형을 보내는 게 다였던 건가?’
“그럼 혹시 네가 상어들에게 붙잡힌 건 황실 때문이야?”
“예, 맞습니다.”
하우저는 수도에서 무사히 도망쳐 어느 곳에 정착하는 대신 황무지를 떠올렸다고 했다.
이곳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자취를 감추는 한편, 나중에 날 고생시킬 상어들을 미리 다져 두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나?
‘뭔 놈의 삶을 내 중심으로만 살고 있어?’
조금 착잡해졌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꼈지만, 이놈은 3회차의 인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는 그때와 다른 생을 사는데도.
나는 티 내지 않은 채 그저 웃다가 하우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서? 그다음은?”
“……네?”
“왜 붙잡힌 거냐고.”
수많은 상어가 몰려온다고 한들 하우저가 거기서 도망칠 수 있는 놈이란 생각엔 여전히 변함없다.
“황태자가 몇몇 상어 일파와 손을 잡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수중 동물 수인을 극도로 혐오하는 놈이? 별일이네.”
그토록 하우저를 잡고 싶었던 방증일까? 아니면 나를 치려는 계획?
“그 관계를 알아보는 도중에 한계를 느끼고 일부러 붙잡혔습니다. 이쪽이 알아내기 쉬울 것 같아서 말입니다.”
“…….”
“덕분에 황태자에게 걸려 있는 금제. 그러니까 수도를 벗어날 수 없는 금제를 풀 수 있는 방도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걸 알아내는 동안 넌 얼마나.”
다친 거냐고 물으려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우저는 물끄러미 날 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가주님, 용입니다.”
“응?”
“용의 힘이, 황태자를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는 모양입니다.”
순간 이번 생에 유독 지독하게도 용 공작에게 집착하던 황실을 떠올렸다.
동시에 등으로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