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칼립소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뭐야, 이 인간. 자기 얼굴을 알고 이러는 건가?’
기가 막히게도 눈물과 잘 어울리는 낯이었다. 하기야 이 얼굴로는 웃든 울든 뭐든 안 어울리겠냐만은.
울려 보고 싶을 만큼 예쁜 얼굴이기도 하기에.
처마 끝에 달린 이슬처럼 눈물 달린 속눈썹 끝이 팔랑일 때마다 별수 없이 들숨을 침인 양 꼴깍 넘기게 되는 것이다.
분명 수없이 긴 세월 동안 수많은 남자를 만났지만, 눈앞의 남자가 가장 잘생겼기 때문인가.
아니, 잘생김 이상의 범접할 수 없는 미와 신비로움이 절묘하게 담긴 얼굴이었다.
목석같은 자라 하여도 버틸 수가 있을까.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
“꿈을 꿨는데, 조그만 내가 나왔다.”
복도에 낮은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뭔가 기억이 난 건가?’
심드렁한 찰나 생각지 못한 말이 파고들었다.
“네게 고백하고 있더군.”
“…….”
칼립소가 눈을 깜빡였다.
칼립소는 지나치게 발달한 오감 때문에 방 근처에 많은 인원이 상주하는 것을 피했다.
그렇기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등줄기가 바르게 펴졌다.
“다른 건?”
“…….”
“그저 딱 그것만 기억난 건가 보구나.”
싸움과는 또 다른 긴장감이 그녀를 지배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무슨 이유로, 어쩌다 그런 말이 나온 건지 기억 못 하는 거라면.”
칼립소가 나직하게 말했다.
부드럽되 거리를 둔 한마디였다.
“그건 의미가 없어.”
“의미가 있다면?”
칼립소가 잠시 멍해진 사이, 남자가 칼립소의 손을 붙잡아 제게로 가져왔다.
“넌, 내가 널 사랑하는 거라고 했지.”
남자가 제 심장에 칼립소의 손을 얹은 채 눈을 내렸다.
“너를 좋아해.”
누가 볼까 봐 예민해진 걸까. 아니면 이 남자가 앞에 있기 때문에 예민해진 것인가.
날카로워진 청력이 거대한 북소리를 잡아냈다. 아니, 북소리가 아니라 심장 소리다.
“…….”
“그래서 날, 혼자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감정을 배우지 못한 자의 목소리를 안다. 참으로 건조하고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칼립소를 좋아해. 평생 함께할 거야. 너만 보고 싶어.”
“……음, 이 어둠 속에서 그것도 시간의 틈에 몬스터 때려잡다 할 고백은 아니지 않니. 용용아.”
“그럼 시간의 틈을 나가서 성장하면 대답해 줄 거야?”
그럼에도 자신을 향한 목소리에만은 늘 안에 희미한 열망이 어려 있었다.
집착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외로워. 남자가 조그맣게 속삭인 말이 귓바퀴를 푹 파고들었다.
“기억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가?”
“…….”
칼립소는 복잡한 심정으로 올려다보았다.
하필 기억을 떠올려도 그런 걸 떠올릴 게 뭐람.
네가 어떤 심정으로 그날 그 고백을 했는지. 나는 성장한 네게 듣고 싶었는데 말이지.
칼립소는 남자의 눈가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를 보았다.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한 모양새다. 불면인가.
‘하녀들을 통해서 어느 시간에 들어가도 깨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야기 중에 미안한데, 혹시 당신…… 요즘 못 잤어?”
“…….”
“언제부터 못 잔 거야?”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남자가 조금 발끈했다.
그러다 그대로 멈칫했다. 칼립소가 고요하게,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칼립소가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들어와.”
“…….”
“일단 같이 좀 쉬자.”
칼립소가 자신의 눈을 툭툭 두드렸다.
“나도 조금 졸리거든. 그간 못 자서.”
남자가 홀린 듯 방으로 들어간 순간 문이 닫혔다.
그리고 같은 시간, 하우저가 누워 있는 방. 죽은 듯 쓰러진 하우저의 손이 꿈틀 움직였다.
* * *
“아흠…….”
나는 뒤척거리며 눈을 뜨다 말고 흠칫했다.
‘아, 깜짝이야.’
눈을 떴는데, 바로 앞에 웬 조각상이 있으면 누구나 놀라지 않을까.
그것도 웬만큼 정도가 아니라 아주 훌륭하다 못해 대단히 아름다운 조각상이 있다면 말이다.
‘나 좀 주접이었나.’
나는 내 옆에 앉아서 기대 잠든 남자를 빤히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이 불편한 자세로 곤히도 잠들었네.’
제대로 눕혀 주고 싶은데, 건드렸다 깰까 봐 걱정이었다.
어젯밤, 방에 들어온 뒤로 별다른 대화 없이 함께 잠들었다.
처음엔 내가 소파에서 자려 했는데, 다시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기세라 같이 침대에 앉아 등받이에 기댔던 기억은 있는데 말이지.
“그 마음은 고마워.”
네가 날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내 말에, 남자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끄덕였다.
그렇게 잠이 든 건 좋은데 말이지…….
“네가 들어가……!”
“싫어, 네가 들어가!”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나 있을 줄 알고…….”
‘다 들린단다, 얘들아…….’
나는 방 밖에서 들려 오는 청어 시녀들 목소리에 끄응, 하는 얼굴로 문을 쳐다봤다.
“싫어! 내가 아까 살짝 문을 열었다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다른 사람이 있었단 말이야!”
아무래도 내가 곤히 잠든 사이에 잠시 문을 열어 봤던 모양이었다.
‘놀라운데. 문이 열렸는데도 내가 몰랐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뺨을 매만졌다. 매끈매끈하군.
“우리 가주님이 양다리시라니! 훌륭하시잖아!”
“암, 가주님은 원래 남편을 여럿 두는 거랬어.”
“애인 아니고?”
“하긴, 가주님 남편은 엄격한 심사를 통해서 뽑아야지.”
“누가 심사하는데?”
“당연히! 피에르 님이지?”
“……그거 인간이 통과할 수는 있는 거야?”
“…….”
목소리를 낮췄다지만 내겐 너무나 선명히 들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파하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심스럽게 일어나는 동안 남자는 깨지 않았다. 슬쩍 건드려 봤지만 미동도 없다.
좀 더 용기 내어 아예 번쩍 들어 올려서 눕혀 봤는데도 고요했다.
‘좋아, 이대로 재워 두고…….’
옷을 대충 가다듬고는 문을 열었다. 놀란 시녀들을 마주한 순간 입가로 검지를 가져다 댔다.
“쉿.”
“앗, 네……! 쉬잇!”
“가주님, 안녕하세요……!”
시녀들이 얼른 목소리를 낮췄다. 그 틈에 나는 문을 조용히 닫았다.
“일단 이동할까?”
복도를 함께 걷다가 어느 정도 됐을 무렵 시녀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가주님. 정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방 안엔…….”
“누군지 봤어?”
데데가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벗고, 계시던데…….”
“……내가 벗긴 거 아니야.”
용 공작, 그놈이 왜인지 모르지만 자긴 맨살로 자야 잠이 잘 온다고 했단 말이야.
물론 바지는 안 벗었다?
괜히 눈을 뜨자마자 조각상을 본 듯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니었다.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해, 해, 행복한 밤을 보내신 건가요……!”
“……대체 그 ‘행복한’을 붙이는데 왜 말을 더듬는 건데?”
“하지만 그렇고 그렇고 그런!”
“일은 없었어.”
“…….”
나는 어처구니없어서 웃었다.
“……너희 너무 대놓고 실망하는 것 아니야?”
범고래들이 퍽 문란한 편이란 건 알고 있다.
여성 범고래들이 애인이나 남편을 여럿 둘 수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계가 꼬이기 십상이었다.
유독 이번 세대 놈들이 하나같이 이성 관계 쪽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윗세대나 윗윗 세대들은 거의 ‘사랑과 전쟁’을 뺨치는 막장 가정사가 하나씩은 있었다고 들었다.
“전전 가주님은 젊었을 때 애인이 열 명이나 있었대요……!”
……그 할망구가? 대단하네.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렇구나. 일단 나는 해당사항 없으니까 다들 일해. 일.”
“아, 가주님!”
실망하는 청어 시녀들 사이로 에이야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분이 깨어났어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맞아요. 깨어나셨어요!”
“가주님이 데려오신 애인이요!”
“애인 아니래도…….”
“그럼 이상형!”
“그것도 아니지만, 그것보다 깨어났다고?”
심드렁하게 웃다 말고 멈칫했다. 하도 아무렇지 않게 외치길래 간과했다.
‘하우저가 깨어났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는 달려갔다.
“먼저 갈게! 너흰 웨일과 레바이에게 연락해서 오라고 해!”
“네!”
달려가는 뒤로 시녀들의 이야기가 톡 들려 왔다.
“대체 어떤 사이이신 걸까?”
글쎄. 나도 궁금하다.
하우저, 너와 난 이번 생에 어떤 사이가 되려나.
‘내가 네게 실망할 일만 없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하우저의 방문을 쾅 열었다.
숨이 차진 않았지만, 아주 오래 달린 것처럼 날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기분이었다.
넓디넓은 방,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이가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색의 머리카락, 끝이 뻗치고 곱슬진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심해 속 해초 같은 머리카락이었다. 앞머리를 가릴 듯 긴 머리카락 사이로.
음침한 빛을 품은 눈동자가 보였다.
“……하우저.”
나는 알았다. 저기 청년이 된 이 수하의 이름을 불렀을 때.
네 반응에 따라서 앞으로의 우리 관계가. 너의 위치가. 내가 취할 태도가 달라지란 걸.
얇은 입술이 잠시 멍하게 벌어졌다. 이내 가는 웃음을 매달았다.
웃음이 전혀 없던 수하는 단 한순간에만 허물어지곤 했다.
바로 나를 만날 때.
“가주님.”
긴 시간을 돌아, 너의 시선, 너의 호칭 그 하나만으로.
“존경하는 나의 가주님.”
나는 이 순간 만남이 첫 만남이 아니라.
‘재회’임을 자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