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19화 (219/275)

제219화

칼립소는 요즘 들어 부쩍 3회차 인생을 이어서 사는 기분이 들었다.

하우저를 만나니 더욱 그런 감상이 든 것일 터다.

아틀란의 시선이 칼립소의 동그란 코끝을 좇았다.

“너랑 있을 때나 레바이랑 있을 때. 아 최근엔 벨루스 그놈도 있겠네.”

이전 생을 기억하거나 혹은 이전 생과 비슷한 모습인 놈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틀란.”

제 여동생이자 존경하는 가주님은 좀처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녀가 부르는 ‘둘째야’ 하는 말이 돌보지 않은 부모가 지은 이름보다 훨씬 정감 있었으니까.

“아빠와 너. 그리고 첫째나 셋째나. 모두 웨일이랑 에키온을 곁에 두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 거 알아.”

범고래들은 다른 종에게 배타적이다. 동시에 자신의 것, 자신의 동료에 대한 집착이 남다르다.

단순히 육아물 소설들에 나오는 가족들이 딸이, 여동생이 결혼하는 게 아쉬워서 투정 겸 심술을 부리는 것과 비슷한 듯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있다는 거다.

……이 인간들은 여차하면 정말 그 청년을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하지만 말이야. 그 애들은 내게 있어서 이 삶이 지난 생과 다르다는 걸 알려 주는 존재야.”

칼립소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틀란이 움찔했다.

그로서는 생각도 못 한 혼란이 어려 있는 얼굴이었다.

언제나 확신에 차 있던, 자신만만하던 가주님답지 않았다.

“넌 모를 거야. 그 애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

“아틀란, 난 말이야……. 가장 마지막에 죽었어.”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불편한 주제였지만 아틀란은 그 말을 막지 않았다.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이는 이전에 죽은 모든 이들의 죽음을 등에 짊어진다.

실제로 전투에서 홀로 살아남은 군인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아닌 줄 알았는데…… 살아 보니까 알겠더라. 나는 유독.”

3회차만큼은.

“미련이 철철 넘쳐.”

칼립소가 살았던 한국에서는 한을 품은 자들이 죽어 남긴 혼을 귀신이라 불렀다.

살아 달성하지 못한 목표를 죽어서라도 이루려 드는 존재.

칼립소는 아주 가끔, 3회차의 기억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떠오를 때마다 자신이 살아 숨 쉬는 귀신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지난 생의 미련이라고 치부하며 떨쳐 냈다.

티를 내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자신을 속여 왔다.

그래서, 에키온과 함께 있던 시간이 그리도 편했던 것일 터다.

이전 생엔 함께하지 않았던 존재.

웨일 또한 이전 회차에서는 죽은 인물이었기에 함께하지 않았던 건 마찬가지였다.

“넌 변했지만, 난 말이지 이전 생의 나나 지금의 나나 변한 게 없어.”

“…….”

벨루스가 부드러워지고 아틀란에겐 친구가 생겼다.

그럼에도 칼립소 자신은 3회차와 동일했다.

나는, 그 죽음들을 잊으면 안 돼.

아쉽고 억울하고 애틋하다.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하우저는 이 모든 것을 똘똘 뭉친 대표격의 인물이 되었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해 줄까.”

칼립소는 최근에야 알았다.

“웃으면 안 된다?”

이전 생에 없던 이들로 인해서 안정감을 느끼는 자신을.

“그 애들이 내게 가진 연애 감정을 통해서 나는 이전 생과 지금 생을 구분 짓게 돼.”

지난 생에서 유일하게 하지 않았던 것이 이성과의 교류 혹은 연애, 결혼이기 때문인가.

주변이 온통 자신을 존경하거나 거의 신격화시켜서 신봉하는 놈으로 가득했기에.

더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칼립소는 참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진실이었다.

“아, 물론 아빠가 달라진 것도 크겠지만 말이야.”

칼립소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화를 마무리했지만.

아틀란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었다.

“그놈들 둘 다 필요하다는 소리를 뭐 그따위로 어렵게 말하고 있어?”

“오, 역시 이번 생에선 머리가 좀 좋아졌나 봐? 눈치도 생기고.”

“…….”

칼립소가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자신은 연애를 한 적이 없다. 반려를 둔 적도 없고.

이성에게 끌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1회차 삶에서 생존 본능으로 남자주인공과 어떻게든 엮이고 싶었을 때조차도.

그놈에게 끌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칼립소는 남자의 사랑이라면, 고백이라면 받아 봤다.

“고백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가주님께 고백하는 일이란 걸 알았습니다.”

“…….”

“마지막이니까.”

“…….”

“사랑한다고 해도 되겠습니까.”

하우저를 가만히 바라보던 칼립소의 표정이 구겨졌다.

칼립소가 아틀란에게 이런 이야기를 시작한 건, 괜히 꺼낸 말이 아니었다.

“아틀란, 그래서 말이야.”

확실히 에키온과 웨일이 대가 없이 쏟아 준 사랑은 칼립소가 이번 생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나 자신이 지난 생에 받은 짝사랑 또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면.

“나는 하우저 저 애가 눈을 떴을 때, 무어라 할지에 따라서 뭔가 달라질 것 같아. 그래서…….”

아틀란이 바라본 칼립소는 매우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 * *

웨일의 치료가 끝났으나, 하우저는 눈을 뜨지 못했다.

칼립소는 자리를 비우지 않은 채 하우저가 있는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일 처리도 그 방에서 서류를 보며 진행했다.

이에 따라 저택에는 빠르게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들었어? 가주님 연애하신다는데.”

“음? 피에르 님? 칼립소 님?”

“내가 말하면 누구겠어!”

“에엑, 칼립소 님?!”

칼립소를 따르는 수하들 사이에서 칼립소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헉, 나는 그, 짝사랑이라고 들었는데……?”

“뭐야! 우리 칼립소 님이 뭐가 부족해서!”

소문의 내용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외부 일 때문에 밖으로 나간 칼립소가 웬 남자를 데려왔는데. 그 남자가 칼립소의 이상형이라더라.

“……피에르 님이 외부에 계셔서 정말 다행이야.”

피에르를 비롯한 벨루스, 리리벨 등. 다른 상어 근거지를 치러 간 이들은 여전히 외부에 있었다.

그저 저택에서 사흘간 알음알음……은 아니고 빠르게 퍼진 소문이랄지.

아무튼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었다.

“너희, 거기서 뭐 하는 거지?”

“악! 깜짝이야. 데데, 무슨 짓이야!”

“어후, 놀라라.”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던 청어 하녀들이 팔을 비볐다.

“어때. 감쪽같지?”

칼립소의 목소리와 말투를 흉내 냈던 데데가 씩 웃었다.

“자중들 해. 지금 칼립소 님이 이쪽으로 오고 계신다는데.”

“으응…….”

사실, 자신들의 가주님은 한창때의 나이 아니시던가.

그렇기에 수하들은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지만. 데려온 남자의 정체가 마음에 걸렸다.

이조차도 범고래와 우호적인 혹등고래 수인이란 말에, 또 황무지에서 약한 수인을 도운 바 있는 수인이란 말에 풀어졌지만.

그날 밤.

칼립소는 찌뿌둥한 어깨를 돌려 가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잠시 씻고 옷만 갈아입은 뒤 다시 하우저가 있는 곳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칼립소는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멈칫했다.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 공작?”

에키온이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칼립소에게 이름마저 잃은 남자.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칼립소를 응시했다. 시선만은 타는 듯 뜨거웠다.

“여기서 뭐 해? 아, 혹시 지금 머무는 방이 불편해?”

“…….”

황태자 케일에게 용 공작의 모습을 부러 보인 뒤로 용 공작의 거처는 본 저택으로 옮겨졌다.

이젠 그의 존재를 숨길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이전에 쓰던 방이 서쪽 끝쪽에 있다 보니 옮긴 건데. 혹 불편하면 다시 거기로 옮겨도…….”

“아니다.”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너와 가까운 방이 훨씬 좋더군. 비록 넌 방에 돌아오지 않지만.”

“하하……. 그래? 나랑 있으면 초대 용의 조각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지? 미안하게 됐어. 요 며칠 바빠서 말이지.”

“그자의 방에 가는 게 바쁜 일인가?”

칼립소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남자는 한참 컸으므로 머리를 꽤 들어 올려야 했다.

3회차의 용 공작은 늘 허공에 떠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 크기인지 가늠하기 어려웠고.

칼립소는 에키온이 성장한다면 그 애의 유려한 선에 맞춰서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예상은 완전히 틀려 버렸지만.

“칼립소.”

남자의 부름에 칼립소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음, 미안한데 내 이름은 역시 안 부르는 쪽이 좋겠다.”

“나를 피하는 건가?”

“내가 왜? 당신을 피할 이유가 없잖아?”

“…….”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칼립소는 자신이 너무 심했나 싶어 뺨을 긁적였다.

대체 뭐가 심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에키온과 동일한 외양이라서 그럴까.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쉽사리 허물어지고 약해졌다.

어쨌거나 달래서 찾아온 이유를 들어 봐야겠다. 그리 생각하고 눈을 다시 들어 올렸을 때.

칼립소는 추욱 처진 채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남자와 마주했다.

“…….”

……더 곤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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