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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218화 (218/275)

제218화

가모라는 우리와 다닐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정갈한 말투를 썼다.

수도 특유의 말씨다.

“아쉬워, 정말 아쉬워.”

가모라의 입술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동안, 몸에서는 금빛이 흘러나왔다.

용 공작의, 에키온의 금색 눈동자와는 확연히 다른 채도의 빛이다.

가모라의 머리 색이 끝에서부터 물드는가 싶더니, 껍질 같은 가모라의 표피가 벗겨진 아래로 매끄러운 피부가 나타났다.

눈부시도록 아름답되, 거부감을 자아내는 미남이 한쪽 무릎을 접은 채 앉아 있었다.

빛은 사라졌던 가모라의 팔을 수복시켰고 부러진 다리를 끼워맞췄다.

황금빛의 반짝거리는 머리카락과 채도가 낮은 금안을 가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일 헬테아데.

“아, 이번 세뇌는 길었어.”

청명한 목소리.

갈라지고 쉬어 버린, 죽어 가는 이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태양의, 신의 선택을 받은 듯 찬란한 색으로만 이루어진 남자였다.

나는 이 빛을, 그리고 이 색을 끔찍이도 싫어했었지.

케일의 눈동자가 아늑하고 고요하게 움직인 순간, 땅에서 밧줄 같은 것이 튀어나와 내 팔다리를 꽁꽁 묶었다.

뒤쪽에서 출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움직이지 마! 다들 그대로 멈춰!”

명령을 외치는 동시에 등 뒤에서 나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케일의 얼굴로 의외라는 듯 표정이 스쳤다.

“왜, 도움받지?”

“…….”

바닥에는 가모라였을 때의 피부라거나 옷들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놈의 매끈한 낯짝을 한참 노려보다가 물었다.

“날 알아?”

“널 왜 몰라.”

나는 작게 웃었다.

“하, 하하…….”

그저 몇 마디만으로 놈은 증명한 것이다.

그래.

너도 앞선 회차를, 기억하고 있구나?

저열한 희열감이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솟구쳤다.

이 새끼 손에 내 금쪽같은 수하들이 몇이나 죽었더라?

내 가족들은? 영주민들은?

심장에서 시작해, 활활 타오르는 증오의 불길이 나를 금방이라도 잿더미로 만들 것 같았다.

“어디까지?”

내 질문에 케일의 상체가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마치 내가 꼼짝할 수 없다는 걸 안다는 듯.

무방비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증오스러운 낯짝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저놈이 내쉬는 날숨마저 불쾌했다.

“어디까지이길 바라?”

“당연히…… 모두 기억하길 바라지.”

“…….”

나는 생긋 웃었다.

“그래서 얼마나 기억하는데, 이 노린내 나는 새끼야?”

케일 또한 싱긋 부드럽고도 다정하게 웃었다.

여주인공에게 주는 미소와는 다른 서늘함과 광기를 품은 채.

차가운 손이 내 턱을 붙잡았다.

벌레가 기어오른다면 이런 느낌일까?

“당연히, 칼립소 너와의 기억이 어떤 기억인데 모두 기억해야지. 안 그래?”

“아하. 아주 좋네. 케일.”

우리가 이름을 다정히 부르는 사이였냐 하면,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지.

“널 그리워했어.”

“하하, 나만 할까. 이 새끼야?”

서로의 이름에 담뿍 묻어 나오는 증오가 증거였다.

신분이 높은 자는 절대 함부로 이름을 내어 주지 않는다.

이는 적군이기에 부를 수 있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 얄팍한 목은 잘 닦아 두고 내게 온 거지?”

내 얼굴이 다정하게 풀어졌다.

나를 구속한 밧줄은 흙과 바위로 만들어졌다. 쩌억쩌억 금이 가고 있었다.

“그래야 할 거야.”

케일의 형형한 눈동자로, 긴장감이 얼핏 어리는 순간이었다.

쩌저저적!

콰아앙!

내 주먹이 케일의 몸을 꿰뚫었다. 주먹 형상 그대로 구멍이 뚫렸다.

나는 얼굴로 튄 것을 닦아냈다.

갈색. 진흙, 그리고 흙이다.

“하하, 하하하하. 아쉽다. 너무.”

“…….”

“더 시간이 많을 줄 알았는데…….”

케일은 심장이 있는 자리가 뻥 뚫린 채로도 잘도 처웃었다.

그럴 것이다.

이건 이놈이 만든, 정확히는 ‘땅의 힘’으로 만든 진흙 인형이었으니까.

‘등신 쪼다 새끼. 인형을 보냈을 줄 알았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가모라에게 접근했을 때부터, 아니, 그놈에게서 황태자의 힘이 느껴졌을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세뇌의 힘.

놈이 쓰는 진흙 인형 능력과 세뇌가 합쳐지면 자신을 어떠한 인간이라 믿는 꼭두각시가 탄생한다.

첩자를 만드는 덴 아주 효율적인 능력이라.

전쟁 중에 맥없이 당한 것도 수차례지.

그리고 나는 그 전쟁의 승리자였다. 내게 덤볐던 놈의 능력을 어찌 기억하지 못할까?

“잘됐다. 네가 그리워한다 한들 나만큼 그리워할까?”

나는 히죽 웃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케일.”

케일의 얼굴에서 웃음소리가 점차 사라졌다.

“다시 한번 널 죽일 기회가 오다니.”

네게 기억이 있다니.

“태어나 다시 없을 행복이야.”

네 손에 죽은 세계, 부하, 동료, 가족.

나는 이 모든 것을 정당히 복수할 수 있구나.

아주, 넘치도록 기뻤다.

내 웃음소리가 황무지 가득 울려 퍼졌다.

놈의 진흙 인형이 끝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가 핵을 날려 버린 까닭에 더는 형상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미친년.”

“참, 오랜만에 듣는 소리야. 그거.”

이번엔 내가 히죽 웃을 차례였다.

“넌 늘 그렇게 불러서라도, 날 향한 두려움을 잊고 싶었겠지?”

케일이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어디론가를 향했다.

이내 놈의 얼굴 위로 다시 웃음이 설핏 어렸다.

“뭐, 좋아. 나도 목표를 달성했으니까.”

케일이 향한 곳은 정확히 용 공작이 있는 곳이었다.

채도 낮은 금빛 눈동자 아래로 번들번들한 욕망이 일렁거렸다.

“다시 보자고.”

고이다 못해 넘치는 욕망을 바라보며 나는 스러져 가는 놈의 멱살을 쥐었다.

“멍청한 새끼. 이건 알고 가야지?”

“…….”

“네가 알아차린 게 아니라.”

내가 보여 준 거야.

용 공작이 여기 있는 거.

“목이나 닦고 있어. 갈 테니까.”

내 마지막 웃음을 끝으로 놈의 진흙 인형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놀라 눈을 부릅뜬 채로.

나는 손을 탈탈 털었다.

“……뭘 보고 있냐.”

내가 손을 내밀자 곧 손 위로 시원한 물줄기가 생겨나며 손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아…….”

하늘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꿈틀거리는 주먹은 분노로 가득했지만.

얼굴로는 희열감이 차올랐다.

“하하.”

이번엔……

“꼭 죽여야지.”

* * *

아콰시아델 저택에 도착했다.

요새로 향했던 시간보다 돌아오는 길이 더욱 빨랐던 건. 환자가 있었기에 재촉한 결과였다.

아틀란은 반쯤은 분노로, 나머지 반은 염려를 띤 눈으로 칼립소를 흘끗 보았다.

칼립소는 치료받고 있는 하우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연락을 취해 다른 곳으로 향했던 웨일을 저택으로 불러 놓았다.

다행스럽게도 웨일은 시간 내로 돌아왔고, 치료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웨일의 능력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재료는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9년간 세상에 있는 재료, 없는 재로 모두 이곳에 끌어모았으니.

치료하는 웨일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아틀란은 표정 없이 하우저를 응시하는 칼립소를, 이제는 빤히 바라보았다.

“둘째야.”

칼립소가 아틀란을 보지 않는 채로 말했다.

“내 얼굴 뚫어지겠다.”

“…….”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문 바로 옆 벽 쪽이었다.

웨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이 자리를 고집한 것이기도 했다.

“그보다 말이야.”

칼립소는 여전히 하우저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만약에 넌 이전의 동료가 현 시간엔 범죄자가 되어 있으면 어떻게 할래?”

하우저를 보고 있으니, 분명 저놈을 염두에 두고 물어본 거겠지?

아틀란도 한 번쯤 생각해 본 이야기긴 했다.

바로 이전 생에서 그에겐 친구 하나 없었지만 사선을 함께한 동료는 있었다.

그런 놈이 만약 지금 생에선 범죄를 저지르는 질 나쁜 인간이 됐다면?

“하우저가 그 자리에 있던 건. 아마 붙잡혔을 가능성이 크겠지만 사실 쉽게 붙잡힐 능력이 아니잖아.”

“뭐…… 그렇지.”

칼립소의 말인즉 만약 하우저가 상어 측에 협력했다가 내부 의견충돌로 갇힌 거라면 어떡할까.

이런 고민이었다.

은근히 느슨하게 잘 봐주는 것 같으면서도 선이 확실한 칼립소로서는 고민되는 부분이었을 터.

“글쎄다, 나라면…… 내가 아는 인간이 이번 생에서 그 모양 그 꼴이 됐다면 두들겨 패 줄 건데?”

“…….”

“잘못한 건 용서를 빌게 하고, 맞은 놈이 용서 못 하면 가서 참회도 하고 처벌도 받아야지 뭐 어쩌겠어? 그게 그놈의 남은 인생을 위해 좋은 일이지.”

아틀란의 심드렁한 대꾸에 칼립소는 작게 웃었다.

“왜 웃어?”

“아니, 나랑 생각이 비슷해서.”

그 말처럼 칼립소 얼굴에 드리워있던 근심이 사라지고, 꽤 개운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칼립소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 번도 이런 적 없는데 말이지.’

늘 외롭던 생에 자신과 같은 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유독 이번 회차에만.

그래서 칼립소는 가끔 그런 착각이 들곤 했다.

“이상하지, 아주 가끔 내가 이전 생을 사는 기분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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